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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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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2015)

Assassination 
8.4
감독
최동훈
출연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오달수, 조진웅
정보
액션, 드라마 | 한국 | 139 분 | 2015-07-22


  개봉 5일만에 300만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암살>. 가장 핫한 영화답게 괜찮은 자리는 이미 다 차버려서 두시간 반을 기다렸다. 처음엔 두시간 반이나 기다려서 봐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기다림 끝에 본 <암살>은 유난히 더웠던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만큼 시원한 영화였다.




최고의 라인업 - 흥행은 이미 예견된 일

  <암살>은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 등 연출하는 작품마다 흥행시킨 최동훈 감독이 제작·연출·각본을 맡았다. 거기에 최고의 흥행 배우 전지현·하정우·이정재가 주연을 맡았고, 오달수·조진웅 등 최고의 감초 배우들이 뒷받침 해주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전지현 저격수

누가 더이상 이 누나를 CF스타라 무시하리(사진 = 네이버 영화)


순제작비 180억원으로 되살린 1933년 개성에서 초특급 액션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정재 분)은 김구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다. 그는 김구의 명을 받아 한국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분),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조진웅 분), 폭탄 전문가 황덕삼(최덕문 분)을 개성에 보낸다. 이들의 임무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심철종 분)와 친일파 강인국(이경영 분) 암살. 반면 살인청부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은 이들 셋을 암살하라는 의뢰를 받고 뒤를 쫓는다. 그렇게 안옥윤, 염석진, 하와이 피스톨은 서로 다른 목표를 갖고 개성에서 만나게 된다. 이들 사이의 갈등, 숨겨진 비밀, 그리고 1933년 개성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스펙타클한 전투씬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잊기에 충분하다.

암살.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 만세~(사진 = 네이버 영화)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같은 모습으로 살진 않았다.

  우리 선조들은 조국을 일제에 빼앗긴 채로 36년이라는 세월을 버텼다.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다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하나 뿐인 목숨까지도 내어 놓았다. 죽음이 뻔한 상황에서 두렵지 않은 사람 어디 있을까? 하지만 두려워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조국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버렸다.


  반면 어떤 이들은 이득을 위해 조국을 버렸다. 처음부터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이완용 같은 매국노도 있다. 처음엔 독립을 부르짖다 일제치하가 길어지자 변절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황국 신민이 되어 전쟁에 나갈 것'을 부르짖은 지식인들도 있다. 그 중엔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도 버리고 일본에 견마지로(개와 말처럼 충성을 다하겠다)를 다하겠다는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도 있다. 그들은 조선이 독립할지 몰랐기에 나라를 버렸다.


  하지만 이들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반성은 커녕 떵떵거리며 살았다. 매국과 친일의 댓가로 손에 쥔 돈과 권력을 바탕으로 기득권을 강화했다.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고문하던 친일 경찰들은 이승만과 손을 잡고 반공 경찰으로 탈바꿈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매국노들에게 수치를 당한 독립운동가 중 일부는 월북하였다. 남한에 남은 독립운동가들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많은 독립운동가 자손들은 국가의 외면으로 가난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친일파의 자손들은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데 말이다.


어이! 3천불! 우리 잊으면 안돼!

  영화는 픽션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이 이 땅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군가는 조선이 독립할지 몰라서 친일을 했고, 누군가는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는 신념에 목숨을 걸었다. 우리가 지금 대한민국을 살 수 있는 건 이승만과 다카키 마사오 같은 기회주의자들 덕분이 아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덕분이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 덕분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그것이 조국을 빚진 우리의 최소한의 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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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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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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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 자이언츠가 다시 팬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의 간판 스타인 손아섭 선수 부친상에 대한 뒷 이야기 때문이다. 동희의 야구인에 따르면 지난 6월 평소 지병을 앓고 계시던 손아섭 선수 부친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7월 초에는 병원측으로 부터 '아버지의 병세가 매우 위중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설명을 들었다. 팀 상황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고민 중이던 손아섭 선수는 코칭 스태프에 "아버지 병세가 매우 위중합니다. 아버지 옆에서 잠시만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라고 어렵게 요청했다. 처음엔 "심사숙고해보자"던 코칭스태프는 전반기 막바지라는 점을 들어 "아버지 병세가 정말 악화됐다라고 판단했을 때 그때 가보는 게 어떻겠냐"며 손아섭을 설득했다. 결국 손아섭은 계속 출전을 강행했다. 14일에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듣고 다시 한 번 코칭스태프에 요청했으나 코칭스태프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손아섭은 16일 전반기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이끌고 나서야 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갈 수 있었다. 그의 부친은 다음날인 17일 둘째 아들 손아섭이 지켜보는 사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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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간판 타자 손아섭. (출처 = 박동희의 야구인)

  이 이야기가 전해지자 야구팬들 사이 비정한 롯데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다행히 임종을 지킬 수 있었지만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손아섭 선수가 얼마나 안절 부절 못했을지.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고작(?) 야구 경기 때문에 뺏은 롯데 자이언츠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다. 더구나 빼어난 성적과 구김살 없는 성격으로 많은 팬들로 부터 사랑을 받는 손아섭 선수와 10개 구단중 가장 욕을 많이 먹는 롯데 자이언츠 사이의 사건이라 롯데 자이언츠에 더 많은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가 욕 먹는건 당연하다. 손아섭 선수가 없으면 경기를 못하는 상황도 아니다. 야구는 팀 경기다. 손아섭 선수가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아무리 크더라도 제한적이다. 만약 손아섭이 뛰지 않아서 한두경기 더 지더라도 손아섭에게 아버지와 마지막 시간을 주는게 구단 이미지에도 팀 사기에도 좋다. 게다가 올 시즌 후 FA로 시장에 풀리는 손아섭이다. 어려운 순간에도 선수를 먼저 생각하는 구단이라는 점을 강조 했더라면 CCTV 파문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구단 이미지와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롯데 자이언츠는 참 이런걸 못한다.

  다만, 롯데 자이언츠만 욕 먹는건 안타깝다. 동희의 야구인』에서도 밝히듯, 이건 롯데 자이언츠라는 악마 구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님이 위독하시거나 아내가 아이를 출산할 때 거의 모든 선수가 속으로 끙끙 앓을 뿐 가족 옆으로 갈 수 없는게 KBO리그의 현실이다. 손아섭 선수 처럼 간판 선수는 팀 성적과 다른 선수들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임시 휴가를 받지 못한다. 1군과 2군을 오가는 선수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임시 휴가를 신청하지도 못한다.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건 외국인 선수들 뿐이다.

  이런 일은 KBO리그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쉽게 발견된다. 법에서 정한 연차 휴가를 쓰면서 상사와 선배 눈치 보는 건 직장인에게 일상이다. 자신이 할 일을 마치고 나서도 부장님이 퇴근하지 않아서 집에 가지 못하고 눌러 앉아 있는 것도 어색한 풍경이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인 출산, 육아휴직을 다 쓰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종종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 사람에게는 팀 생각은 안하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 개념 없는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비정규직은 그런 선택지도 없다. 이런 현실에서 롯데 자이언츠에 욕 할 수 있는가? 롯데 자이언츠를 악마로 만들고 욕하는건 가장 쉬운 일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합리한 상황에 맞서 싸우기를 포기한 채 롯데 자이언츠에 자신의 분노를 쏟아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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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시작

저자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지음
출판사
생각의길 | 2015-05-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노무현에 관한 첫 구술기록집 [노무현의 시작]1. 왜 [노무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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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1심 재판하면서 자주 만났기 때문에 그 정도 인간관계는 되고 형편도 뻔히 다 아는데 '부모님 형편도 어렵고 하니 죄송하지만 무료로 해주이소'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안 해주겠나? 뻔히 해줄 건데... 내 참 서운했다, 이렇게 얘기하시더라구요. 그러고 나서 일주일이나 지났나? 교도관이 변호사 선임계라는 것을 가지고 와서 방으로 쑥 들이밀더라고요. 변호사에 '노무현' 이렇게 돼 있데요.


  부림 사건의 재판 기간 동안 나는 그 청년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 성적도 우수하여 남보다 나은 자리가 보장된 사람들이 왜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마저 내팽개치고 자기 앞날을 스스로 망치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고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들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차츰 그들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고 자신과 가족, 부모 형제끼리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지 이웃의 고통이나 권력의 부정부패, 불의 따윈 모른 체하는 것이 상팔자라고 체념하고 살던 나의 삶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용 요약

  고졸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1977년 대전에서 판사로 법조 생활을 시작한 노무현은 이듬해 4월 사직하고 부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다. 평소 판사보다는 변호사일에 맞다고 생각했지만 부인이 좌익경력의 장인 때문에 판사 못했다는 눈총을 받을까 시작했던 판사였기에 8개월만 하고 그만두었다. 변호사 사무실 개업 초기부터 함께 일을 하며 노무현 변호사의 초기 시절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던 장원두씨는 그를 남들과 다른 변호사로 기억한다. 법원에 서류를 내면서 관례적으로 1000원을 내던 것이 부당하다고 그 돈을 못내게 한다. 또한, 당시 동료 변호사들은 품위가 떨어진다고 하지 않던 등기업무를 맡아서 하는 조금은 독특한 변호사였다.


  1981년 노무현은 조세 전문 변호사로 부산에서 이름을 날리며 아파트도 사고, 요트를 즐기고, 부모 형제들을 돌보며 살고 있었다. 출세하면 고생하며 사는 사람을 도와주리라던 어린시절의 다짐은 희미해져 갔다. 그러던 때 선배 변호사이던 김광일 변호사의 부탁으로 맡은 사건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된다. 바로 영화 변호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부림 사건'이다.


  부림 사건을 맡은 노무현 변호사는 좋은 대학에 입학, 성적도 우수하여 남보다 나은 자리가 보장된 사람들이 이런일을 해서 자신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변호하기 위해 만나서 이야기 하고 그들이 읽는 『전환시대의 논리』와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살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노무현 변호사는 이들을 위해 열심히 변론 하지만 전두환 독재정권 아래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던 재판부는 3년, 5년, 7년씩 무고한 학생들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했다.


  이후 노무현 변호사는 잘나가는 조세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변해간다. 돈 되는 사건은 점점 수임하지 않게 되었다. 그보다는 학생사건, 노동사건 등의 무료 변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요정이나 고급 술집에 발을 끊고, 좋아하던 요트도 정리했다. 노동 법률상담소를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무료 법률 상담과 노동법 강연을 했다. 1987년 6월항쟁 때는 제일 앞에서 진두지휘를 하며 세상을 바꾸기 위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사 개업을 했던 1978년부터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1987년까지 노무현 변호사의 삶에 대한 주변인들의 구술을 기록하였다. 구술기록의 특성상 구술자 개인의 주관과 감정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드러난다. 13명의 구술자가 각자 자기 관점에서 바라보고 서술했기에 그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 (문재인 변호사가 바라본 노무현이 어땠는지 이 책에는 실려있지 않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누구에게는 이제 막 노동문제와 사회문제에 눈을 뜬 햇병아리 변호사이고, 다른 누구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자 신과 같은 존재다. 그런 시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 노무현에 대해 이들 모두 한 목소리로 사람 냄새나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따스한 사람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가 그립다...


p.s.

  책 마지막에 노무현 대통령이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둔 때에 적은 <내가 걸어온 길>이라는 짧은 글이 실려있다. 정치 초년생 노무현의 마음이 잘 담겨있는 글이라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서 찾아보니 노무현 사료관에서 pdf 파일로 받을 수 있다. 찾기 귀찮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기를 누르면 다운 받을 수 있는 페이지로 이동시키니 꼭 한번 읽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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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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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앞, 높다란 빌딩 숲 뒤편 그늘진 마을 동자동 쪽방촌. 동자동 쪽방촌은 전국의 쪽방촌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거주민만 1100명이 넘는다. 이 조그마한 동네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쪽방이라는 기형적인 주거형태 때문이다. 쪽방이란 한국 전쟁 후 생긴 주거형태로 여인숙 주인들이 손님을 더 받기 위해 방을 여러 개로 쪼개 장사를 한 것이 그 유래다. 수많은 인파가 서울역 앞을 오가지만 그들의 존재조차 모른 채 지나간다. 하지만 분명 그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동자동 쪽방촌을 찾아갔다.



  다시 찾은 동자동엔 기대감과 불안감이 뒤섞여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내쫓길 위험에 처했던 9-XX번지의 주민들은 다행히 아직 동자동에서 살고 있다. 집주인이 건물 개보수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 아시바를 설치하겠다고 예고했지만, 강행하지는 않았다. “언론과 시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집주인이 전향적으로 나왔다. 현재 협상이 진행중이라고 9-XX번지 주민들은 말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주민들은 집 밖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었다. 창문조차 없는 좁은 방에서 하루 종일 혼자 갇혀 있기에는 너무 갑갑하다. 추운 겨울에는 어쩔 수 없이 방에서 지내지만, 겨울이 지나면 집에서는 잠만 자고 밖으로 나온다.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낸다. 날이 따뜻해지면 방을 빼고, 노숙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동자동 초입에 위치한 새꿈 어린이 공원에는 주민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따뜻한 볕을 쬔다. 한 쪽에서는 동네 어른들이 바둑을 두고 있다. 훈수를 두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자리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부대끼며 살다보니 다툼이 잦은 것도 사실. 이른 시간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벌써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운 주민도 보인다. 술자리에선 사소한 말다툼이 멱살잡이로 번지기도 한다. 한 쪽에서는 외상을 주지 않겠다는 슈퍼마켓 주인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싸움을 말리기는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 눈치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각자 집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며, 이웃과는 어색한 눈인사만 할 뿐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아파트촌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강모(62.)씨는 21년 전에 동자동 쪽방촌으로 들어왔다. 중간에 두 번 다른 동네로 떠나기도 했지만 결국 동자동으로 돌아왔다. 강 씨는 부산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신문을 팔고, 구두를 닦았다. 그러다 열아홉 살 때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아직 여의도에 비행장이 있던 시절이었다. 영등포에 자리를 잡은 강 씨는 여의도 비행장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중국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배달을 하기도 했다. 요즘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돈을 모을 수는 없었다.


  강 씨는 평생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가방끈이 짧다보니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었다. 사회 전체가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없는 사람들은 더 어려웠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번듯한 직업을 갖고, 열심히 돈을 모아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집값을 감당하지 못해 계속 밀려났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는 고무공장에 취직해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 빈자리가 감당하기 힘이 들었다. 결혼생활도 실패로 끝이 났다. 그동안 일을 해 번 돈을 가지고 다시 상경하게 됐다. 함께 올라왔던 친구를 따라 방세가 싼 동자동 쪽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동자동에 자리를 잡은 것이 21년 전. 그 사이 강 씨는 이 동네를 두 번 벗어났다. 그동안 모은 돈을 밑천 삼아 친구와 함께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그에게 일을 맡기는 이는 적었다. 처음 하는 사업이다 보니 어리숙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다 사기를 당해서 결국 사업을 접게 됐다. 그리고 다시 동자동으로 돌아왔다. 태안화력발전소 공사에 인부로 일을 하러 갔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동자동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또다시 무위로 돌아갔다.



  현재 강 씨는 동자동 희망나눔센터 1층 커피숍에서 일을 하고 있다. 강 씨가 내민 명함에는 예비 바리스타라고 적혀있었다. 그는 정식 학원에서 자격증 딴 것은 아니고 대충 배워 수료증만 받았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취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비 바리스타라고 적었다. 바깥에 커피 전문점에 가면 커피를 비롯해 생과일 쥬스까지 수십 가지 메뉴를 팔고 있다. 우리는 달란 열 가지 정도의 메뉴만 판매한다. 메뉴에 있는 몇 가지만 만들 줄 안다고 말했다. 부끄러워하며 말했지만 일을 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내심 자랑스러운 눈치다.


  강 씨의 한 달 수입은 약 100만원 정도. 자활근로를 하거나, 기초생활 수급을 해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수입이 50만원을 밑도니, 쪽방촌 주민들 중에서는 여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그는 길거리를 지나가다 햄버거 하나를 먹고 싶단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몇 번을 망설이다 그냥 돌아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언제 돈을 쓸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강 씨는 동자동을 떠날 꿈을 아직 꾸고 있다. 100만원 남짓의 수입의 일부를 떼어 주택부금을 넣고 있다. 방세를 내고, 주택부금을 넣고, 이래저래 생활비로 사용하면 남는 것이 없다. 올해 담뱃값이 껑충 뛰면서 40여년간 피웠던 담배도 끊었다. 술은 아직 끊지는 못했지만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결국 동자동을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 “요즘 집값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1억은 우스운 돈이더라. 현재 버는 수입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도 10년이 걸린다. 결국 우리 같은 사람은 갈 곳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강 씨가 일을 하고 있는 희망나눔센터는 한 기업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주민 복지시설이다. 원래 있었던 목욕탕 건물을 5년간 임대해 주민들이 사용하도록 했다. 동자동 회원증이 있으면 샤워시설과 빨래방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커피숍의 음료는 1500원에서 2900원까지 가격이 다양하지만, 회원들에게는 천원에 판매하고 있다.



  조모(60.)씨는 희망나눔센터에서 자활근로 활동을 하고 있다. 몸이 건강할 때는 인근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기사로 일을 했다. 그 때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당뇨로 건강이 좋지 않아진 조 씨는 기초생활 수급을 받아 생활을 했었다. 그러다 지난 해 수급대상자에서 탈락됐다. 몸이 아프니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다. 몇 달간 방세를 못 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동자동 희망센터에서 자활근로를 하게 됐다. 빨래방과 샤워실 청소를 비롯해 세제, 비누 등을 챙기는 것이 조 씨의 몫이다.


  자활근로는 하루에 6시간씩 3교대로 돌아간다. 하루 6시간을 일하고 조 씨는 약 5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겨우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돈이다. 20여만원의 방세를 내고 남은 돈으로 한 달을 생활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아끼려 해도 써야할 돈이 있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하고, 옷도 사야한다. 쪽방은 난방비나 전기세를 따로 내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노후대비란 조 씨에게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조 씨는 주로 무료급식을 이용한다. 동자동은 전국에서 가장 큰 쪽방촌으로 그 수가 1100명에 이른다. 맞은편 서울역에 노숙자들도 많다. 그러다보니 무료급식을 하는 곳도 다양하다. 5분 거리에 인정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만나샘 급식소가 있다. 다시서기 상담센터는 서울역 쪽에서 무료급식을 나눠준다. 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에서 후원을 하고 있다. 어버이날, 추석, 설 때가 되면 양말 한 켤레라도 나눠주는 온정의 손길이 이어진다. 쌀이나 김치 등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조 씨는 그렇게 나누는 손길들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며 감사를 표했다. 또한 동자동은 워낙 쪽방 거주민들이 많이 모여있고, 서울의 중심지에 있어 후원을 많이 받는다. 전국에 쪽방촌들이 있다. 다른 쪽방촌들도 우리와 사정이 다르지 않다. 관심이 부족한 지역은 더 힘들다고 쪽방촌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부탁했다.


  쪽방촌은 현대 도시민들의 삶의 모습과 다르다. 현대인들은 아침부터 바쁘게 일터로 이동해 하루 종일 일하고, 해가 저물고 나서야 돌아오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반상회 때나 한 번 얼굴을 마주친다. 교류가 없는 만큼 부딪힐 일도 잘 없다. 층간 소음 문제나 쓰레기 처리 문제 등 문제가 발생할 때 얼굴을 붉힐 따름이다. 이곳 쪽방 사람들의 삶은 달라 보인다. 매일같이 치고 박고 싸운다. 서로 욕을 한다. 그렇지만 또 화해한다. 동네 사람들끼리 정답게 인사한다. 동자동을 들여다보며 이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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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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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가 연가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전교조가 연가투쟁에 나선 것은 지난 2006년 이후 9년만이다. 전교조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노동자의 기본권 보호, 공무원 연금 개악 저지, 전교조 법외노조화 반대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9일부터 변성호 위원장은 삭발·단식 투쟁을 하고 있다. 중앙집행위원과 시도지부장 24명도 삭발을 했다. 지난 10일에는 전교조 소속 교사 111명이 청와대 게시판에 실명으로 정권퇴진 선언을 올리기도 했다. 전교조송재혁 대변인을 만나 연가투쟁에 나선 자세한 이유와 주장을 들어봤다.


전교조 송재혁 대변인


 

전교조가 연가투쟁에 나서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되었지만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지난 1년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정부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상 규명은커녕 이를 방해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진상규명을 통해 유가족을 위로해야할 정부는 오히려 유가족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세월호의 진실을 요구하는 시민들 뿐 아니라 노동자, 서민, 공무원들을 적으로 내몰고 있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것도 모자라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임금을 주면서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노동시장 구조조정을 획책중이다.


  평생을 국가에 헌신한 교사·공무원들을 배신하고, ‘세금도둑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 또한 전교조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고 있다. 법외 노조화 하려는 시도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정부의 정책들이 선생님들로 하여금 반발하고 저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교육부는 연가투쟁을 불허하겠다는 입장이다.

  교육부가 전국 초··고교에 공문을 보냈다. 학교장에게 교사들의 연가투쟁을 위한 휴가와 조퇴를 승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승인할 경우 학교장도 징계하겠다고 협박했다. 9년 전 연가투쟁을 했을 때도, 그 이전에도 똑같은 공문을 보냈었다. 정부가 전교조의 합법적인 투쟁을 방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오판일 뿐이고 연가는 법으로 명시된 노동자의 권리다. 연가 낸 뒤 그 시간을 어떤 목적으로 쓸 것인가는 개인적 선택의 영역이다. 교육부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사항이 아니다. 연가 사유까지 검토하여 허가, 불허를 가리는 것은 정부와 학교장의 도가 넘는 월권이자 직권 남용이다.

 

연가투쟁에 참여하는 교사들을 징계하겠다는 엄포도 놨다. 동요하지 않는가.

  이전에도 연가투쟁으로 인해 전교조 조합원들이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연가를 사용하는 것은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다. 따라서 전교조 선생님들은 당당하다. 전교조 선생님들은 정부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행동할 것이다.


  교육부는 이번에 투쟁 원천 봉쇄를 위해 조합원투표가 불법이라는 이례적인 공문까지 현장에 내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교조는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연가투쟁 조합원 총투표를 성사시켰고 63% 투표, 67% 찬성으로 연가투쟁을 승인했다.

 

연가투쟁이라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순 없었나.

  연가투쟁을 하게 만드는 것은 전교조의 호전성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불통성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요구를 표현해왔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대규모 주말 집회도 열었고 서명도 했고 선언도 했으며 리본도 달았다. 하지만 정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정부는 전교조와 대화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소통 부재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다 강도 높은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전교조의 판단이다.

 

일각에선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전교조의 연가투쟁 때문에 학습권이 침해된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 개인적 사유로 연가, 병가, 조퇴를 내거나 공무상 출장을 가는 등 학교를 비우게 되는 건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교사들도 아프면 병가를 내고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연가를 낸다. 어떤 사유로든 교사가 자리를 비울 경우에는 시간표 조정이나 다른 선생님이 대신 수업하는 등 조치를 취하여 수업에 결손이 없게끔 늘 조치되고 있다.


  이번에 만약 수업 결손이 생겨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된다면 그 책임은 전교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 개개인의 연가를 모조리 불법으로 규정하고 교장들이 연가를 승인하지 못하게 막은 교육부가 져야 할 것이다. 연가를 승인하지 않으면 수업 시간표 조정이나 대체 수업 등 조치를 취하는 것이 어려워지니, 애초 교육부의 공문이 문제인 것이다.


  연가를 승인하기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정상적으로 수업은 진행될 수 있다. 정부가 연가를 불허하면서 학생의 학습권 운운하는 것은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꼼수일 뿐이다.

 

정부가 공무원들을 세금도둑으로 몰며 공무원 연금을 손보겠다고 나섰다.

  현재 공무원 연기금은 적자상태가 아니다. 미래에 예상되는 적자를 과도하게 부풀려 호도하고 있다. 공무원 연금 때문에 국가 재정이 거덜나는 것처럼 정부가 나서 대대적인 선전 작업을 하고 있다. 공무원 연기금이 열악해진 것은 오히려 정부 때문이다. 그동안 정부가 연기금을 전용해서 다른 곳에 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반성하고 공무원들에게 사과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정부가 오히려 공무원들을 세금도둑으로 매도하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적반하장이란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평생을 살아온 교원들과 공무원들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히고 있다. 연금은 후불임금의 성격이 강하다. 과거 정부는 공무원에게 적정 수준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그 대신 연금을 약속했던 것이다. 이제 와서 기여금을 더 내고 연금은 줄이겠다는 것은 사실상 임금 삭감이나 다름없다. 정부와 공무원의 약속, 계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깨뜨려 하는 것이다. 거짓선전까지 동원해가며 말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또한 공무원 연금 문제는 단순히 공무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무원연금을 하향시키면 국민연금도 하향될 것이 뻔하다. 지금까지 이 둘은 서로 상대방을 깎아먹는 근거로 이용되어 왔다. 공무원 연금 뿐 아니라 국민연금을 비롯한 모든 공적 연금 전반의 후퇴를 막겠다는 것이 전교조의 목소리다. 국민 모두를 위한 투쟁인 것이다. 국민연금과의 형평성을 맞춰야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정부의 속내는 공무원연금을 하향시켜서 국민연금 수준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장은 거꾸로 국민연금을 상향시켜 공무원연금 수준으로 맞추자는 것이다. 형평성이란 말은 같지만 방향은 정반대인 것인다.


  전교조는 이번 연가투쟁을 통해 중요 복지제도의 하나인 공적연금을 강화시키려 한다. 따라서 단순히 공무원 자신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이 점을 시민들께서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 여하튼 정부가 이렇게 대대적인 왜곡 선전을 벌여 국민과 공무원을 이간질하고 일방적으로 연금 개악을 밀어붙이고 있으면서 한 편으로 무슨 기구나 협의체를 만들어 공무원 당사자와 협의하자고 하는 것은 기만행위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교육은 변화하고 있나.

  세월호 참사 직후 교육계에 커다란 반성이 이어졌다. 서로 경쟁하고 경쟁에서 낙오한 친구를 돌아보지 않게 하는 잔인한 경쟁교육은 근본부터 바뀌어야한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한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학생들이 스스로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다.


  안타깝게도 참사 이후 나왔던 반성은 잠시 메아리 쳤을 뿐 교육 현실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교사나 학교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탓할 일이 아니다. 우리 교육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모순이라고 할 입시경쟁 중심 서열화 교육 체제가 여전히 공고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누구는 교통사고였다고 망발을 하던데,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안전문제가 아니다. 안전교육을 강화하자는 요구들은 세월호 참사의 껍데기만 본 결과다. 사람을 수단으로 간주하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안전을 포함하여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희생시키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풍토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달리기를 멈추고 왔던 길을 되돌아 봐야 한다. 우리 사회가 과연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이윤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모해야한다. 이것이야말로 세월호의 비극이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침몰하는 사회를 구하려면 우리 사회의 시스템 중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 첫 단추가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에 있다. 이 부분에서 전혀 진전이 없기 때문에 이 사회의 침몰도 멈추지 않고 있다.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진실을 세월호와 함께 묻어버리려는 박근혜정부의 태도가 가장 문제다. 하루 빨리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새로운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범사회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최저시급 1만원 등 노동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번 전교조의 연가투쟁은 민주노총 총파업의 일부다. 교사들은 최저시급보다 많은 돈을 벌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노동문제를 좌시할 수 없다. 비정규직 문제와 청년실업 문제는 우리 제자들이 빠르면 1년 후 직면할 문제다. 우리는 제자들이 모두 사회에 나가 저마다 사람답게 존중받으며 살기를 바란다.


  ‘최저시급 1만원은 노동자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임금을 지불하라는 요구다. 재벌과 기업과 부자들이 탐욕을 버리고 조금씩 양보하면 가능한 일이다. 대다수 청년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다.


  정부는 노동 유연성이란 이상한 이름으로 이미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했다. 결국 기업이 노동자를 쉽게 소비하고 버리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미 왜곡되어버린 노동시장을 노사정이라는 기만적인 틀을 통해 더 왜곡시키려 하고 있다. 양보할 게 없는 노동자에게 무엇을 더 양보하라는 것인가. 그만 좀 하고, 비참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선해달라는 것이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주장이다. 최저 임금 1만원과 노동기본권 문제는 우리 제자 대부분이 조만간 직면하게 될 현실의 문제이므로 교사로서 두고 볼 수 없는 사안이다.

 

지난해 법외노조 판결이 나왔다. 현재 상황은 어떤가.

  정부가 해고자 9명을 조합원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빌미 삼아 박근혜 정부는 전교조를 노조 아님통보했다. 전교조가 없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전교조는 법외노조 통보 처분의 효력을 정지해 달라며 고용노동부 장관을 상대로 집행정지 신청을 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현재는 법외노조 처분의 효력이 정지된 상태다. 이 문제는 현재 고등법원의 2심에 계류 중인데 헌법재판소에서 해고자의 조합원 지위에 관한 문제의 법조항에 대해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정부의 전교조 탄압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법외노조화 시도는 매우 야비한 발상이다. 그들이 문제를 삼고 있는 해고자 조합원들은 개인의 과오나 위법행위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전교조 탄압에 따라 해고당했던 것이다. 당연히 노동조합으로서는 조합원으로 인정해야한다. 정부는 당연한 것을 실정법 위반으로 걸어 조합원의 지위에 대한 전교조의 규약을 시정하라고 부당한 압박을 했던 것이다.


  전교조는 20136월 굉장히 의미 있는 투표를 했다. ‘고용노동부의 시정명령수용 여부를 묻는 총투표였는데 놀랍게도 투표율 80.96%, 거부한다 68.59%의 결과를 얻었다. 나도 무척 놀랐다. 그리고 자랑스러웠다. 다른 노동조합들이 칭찬했다. 차라리 법외노조를 감수할지언정 해고 동지들을 내치지는 못하겠다는 비장한 결의가 전국의 조합원들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투표 다음 날 전교조가 법외로 가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도 조합원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와 웃음이 넘쳐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비상식적 판단을 해서 문제의 노동법을 합헌 판결하면 정부를 이를 빙자하여 다시 전교조 법외노조화를 추진할 것 같다. 그렇지만 국제사회는 이런 상황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세계 최대 교육 시민 단체인 글로벌 캠페인 포 에듀케이션(Global Campaign for Education, GCE)’이 지난 2월 말 세계 총회에서 전교조 법외노조 조치 철회를 한국 정부에 촉구했고, ‘국제교육연맹(EI)’도 같은 입장이다. 국제사회에서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이제 정부가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야한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비판하는 전교조가 늘 껄끄러울지 모르지만, 비판의 허용과 수용은 민주사회의 상식이다. 정부가 전교조 법외노조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전교조는 강력한 투쟁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지난 9일부터 변성호 위원장이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중앙집행위원과 시도지부장 24명도 삭발을 했다. 삭발과 단식은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최고 수위의 의사 표현 방법이다. 과격해 보일지 모르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만큼 그 순수성이 존중되면 좋겠다. 더욱이 그 목적이 공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료들과 시민들의 공감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원장의 건강은 현재 크게 나쁘진 않지만 날이 갈수록 힘들 것이다. 꽤 장기간의 단식을 각오하고 계신데 걱정이다. 박근혜정부가 태도를 바꾸는 것만이 전교조의 투쟁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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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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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오는 24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총파업 일정에 맞춰 연가투쟁을 결의했다. 전교조가 연가투쟁에 나서게 된 것은 9년만의 일. 전교조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노동자의 기본권 보호, 공무원 연금 개악 저지, 전교조 법외노조화 반대를 요구하고 있다.


  전교조 변성호 위원장은 지난 9일 삭발을 하고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단식을 시작한지도 벌써 2주가 넘었다. 언론들은 전교조의 투쟁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상황이다. 변 위원장은 그 사이 조금 수척해졌다. 박박 깎은 머리카락은 제법 자랐다. 2주간의 단식으로 컨디션이 좋지는 않은 상태.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오랫동안 말을 하기도 힘이 든다. 육체적으로 힘든 가운데서도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국회의사당 인근 국민은행 앞에 설치한 전교조 농성장으로 찾아가 변성호 위원장을 만났다.


전교조 변성호 위원장




단식 2주째다. 건강은 어떤가.

  건강검진을 받았다. 당이 조금 떨어진 것 외에는 큰 문제는 없다. 굶다보니 힘이 조금 없다. 오래 말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가족들이 걱정 많이 하겠다.

  물론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한다. 그런데 가족들보다도 우리 조합원들이 더 염려하는 것 같다. 이번 4월 국면이 쉽지 않은 시기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까지 왔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이고자 단식까지 하게 됐다. 그 마음을 함께하는 조합원 동지들이 가장 잘 이해하기에 격려와 지지를 해준다. 조합원 동지들과 함께 싸워주고 있는 덕분에 버텨올 수 있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자리를 펴고 1인 시위 겸 홍보를 하고 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잘 수가 없기 때문에 국민은행 서여의도 영업부지점 앞에 농성장을 차렸다. 농성장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것이 기본적인 일정이다. 위원장이란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에 농성장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다. 기자회견을 해야 할 일도 많고, 전교조 회의, 연대단위 회의에도 참석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농성장을 비우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전교조 식구들이 교대로 농성장을 지켜준다.

 

봄이라고 하지만 밤에는 여전히 쌀쌀하다.

  낮에는 농성장에 앉아만 있어도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그러다가 밤에는 추워진다. 비 오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한겨울 같다. 그래도 함께하는 조합원들이 있어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단식농성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전교조는 오는 24일 연가투쟁을 결의했다. 시기적으로 민주노총 총파업과 함께 하고 있다. 노동자·민중의 삶을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모는 박근혜 정권의 정책에 대해 함께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앞서 투쟁의 의지를 보이고, 4월 임시국회에서 공무원연금을 개악하려는 것을 저지하려는 절박한 마음 때문에 단식농성까지 하게 됐다. 농성 기간은 국회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

 

오는 24일 전교조가 연가투쟁에 나선다.

  전교조가 연가투쟁에 나서며 내세운 목표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공무원 연금 개악 저지 및 공적연금 강화하는 것이다. 후불제 임금의 성격이 강한 공무원 연금을 삭감하는 것은 사실상 임금 삭감이다. 또한 공무원 연금이 개악되면 필연적으로 국민 연금 등 공적연금 전체가 후퇴할 수 밖에 없다. 국민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져야한다는 입장에서 공적연금을 강화해가는 방향으로 공적연금 전체를 개혁해야한다.


  두 번째는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화 시도를 저지하는 것이다. 전교조는 그동안 교육공무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부에 맞서서 흔들림 없이 싸워왔다. 지난해 박근혜 정부는 해고자 9명을 조합원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빌미 삼아 전교조를 노조 아님통보했다. 현재는 법외노조 처분의 효력이 정지된 상태다. 해고자의 조합원 지위에 관한 문제의 법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세월호 참사 진상을 규명해야한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꽃 같은 아이들, 동료 교사들, 무고한 시민들이 수장됐다. 희생된 학생들이 꼭 내 제자들 같았다. 교사들을 보며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아이들을 무사히 인솔할 수 있었을까 고민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달라져야한다. 더 안전하고 더 건강하고 더 평등한 사회가 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상규명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 진상규명을 통해 잘못한 사람은 처벌해야한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면, 세월호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언론의 관심도가 높지 않은 것 같다.

  이제껏 전교조의 목소리가 언론을 통해 제대로 전달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무시해버리거나 왜곡하기 일쑤였다.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전교조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해주는 언론들이 별로 없다. 이번 투쟁은 전교조뿐만 아니라 민주노총과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동참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절대다수인 노동자와 서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성완종 게이트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우리 사회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고민해야한다.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어려운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 특히 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서민들의 삶이 힘들어질 것이다. 근본적 변화를 위한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언론이 수행해야한다. 언론의 제대로 된 목소리 전달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아쉽다. 아쉽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힘들고 지치진 않나.

  못 먹었으니 힘이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함께 뜻을 모아주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 24일 연가투쟁에서 조합원들과 시민들이 함께 힘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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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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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민주노총은 처음으로 조합원들의 직선제로 위원장을 선출하기로 했다. 선거 결과 쌍용차지부 한상균 지부장이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취임 후 4개월민주노총 총파업, 노동절 궐기 대회 및 이후의 투쟁 준비에 여념이 없는 한상균 위원장을 만났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민주노총 위원장에 취임한 지 4개월이 됐다. 어떻게 지냈나.

  임기 시작한 첫 날부터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바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집에도 못 들어가고 사무실 바닥에서 자면서 지냈다. 처음이라 여러 가지 배울 것도 많고, 실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다녀야할 현장도 많다. 게다가 위원장직을 맡은 첫 해에 총파업을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 벌어졌다. 총파업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몸이 몇 개 더 있었으면 좋겠다.

 

민주노총 직선제 1기 위원장이다.

  민주노총이 직면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더 잘 되기 위해 조합원들이 스스로 직선제를 선택했다. 잘 싸워야 할 때라고 판단해서, 조합원들이 현장 출신인 저를 지지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노총, 세월호 유가족들과도 함께하고 있다.

  1년이 지났지만 밝혀진 것이 없다. 현재 진실을 밝히면 참사의 책임을 정부가 면치 못하는 면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1년째 아무 진전 없이 끌고 오고 있는 것이다. 이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소득이 3만불, 4만불 된다고 해도 한국사회가 진정한 선진사회가 될 수 없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국민 모두가 가지고 있는 충격과 트라우마가 전혀 해소가 되지 않는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꾸 미룰수록 정부의 책임이 많다는 것을 국민들이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정부가 내놓은 시행령을 통해 진실을 은폐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유가족을 포함한 시민들, 노동계까지 함께해서 진실을 밝히는 투쟁을 함께 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한국 사회가 침몰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2000만명이다. 좋은 일자리를 갖고 가정을 꾸리고 내일의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못된다. 직장을 떠나야하고, 비정규직으로 1.7년마다 재계약을 하며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는 비참한 악순환을 정부는 더 공고히 하려고 한다. 재벌만을 위하는 정책이다. 노동자의 삶이 확보되지 않으면 사회는 침몰하고 만다. 그런 면에서 우리 노동계는 거대한 세월호에 승선해 침몰하고 있다.


  산재사고도 세계 1위다. 건설 현장에서 안전사고가 연일 터지고 있다. 가스가 폭발하고, 무너지고 이런 문제들은 정부가 관련 규정들을 보완해야할 책임을 갖고 있지만 손을 놓고 있다. 재벌들의 반발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굴뚝에 올라가고, 자살을 해도 어느 현장에도 국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국가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이런 국가가 노동자들을 위해 필요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노동현장은 침몰하는 세월호와 다르지 않다. 함께 아파하고 행동할 것이다.


24일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한다.

  박근혜 정부가 4대 개혁을 하겠다고 했다. 공무원 연금개혁, 노동시장 개혁, 교육 개혁, 금융 개혁이다. 실제적으로 전 부분이 노동자·서민과 관련이 있다박근혜 정부는 노동자 서민과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겠다고 천명했다. 노사정 합의라는 것은 신뢰를 가지고 해야 하는데, 시간을 정해놓고, 가이드라인을 다 정해놓고 협상테이블에 앉으라고 했다. 노동자들더러 들러리를 서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협상이 아닌 협박이었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협상에 들어가지 않았다. 한국노총이 들어간 노사정 협상은 예상대로 결렬이 됐다. 노동자들이 받을 수 없는 조건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노사정위가 이번처럼 파행으로 치달은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정부가 과하게 밀어붙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기업이 마음대로 해고를 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춰져 있다. 해고기준을 완화하겠다는 것은 노동조합과 무관하게 언제든지 해고를 할 수 있는 해고 면허를 달라는 주장이다. 단순하게 고용 유연화의 목적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무력화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해고를 통해서 정부와 사측이 주장하듯 고용창출과 비정규직 문제해결이 가능한지 객관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법안을 냈는데, 영원히 비정규직으로 살라는 법이다. 전 국민을 비정규직화 하겠다는 것이다. 지금은 파견 기간을 2년으로 하고 있다. 처음 비정규직 보호법을 만들 때는 2년이 지나면 정규직 전환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평균 1.7년이 되면 계약해지를 하고, 재계약을 한다. 비정규직은 10년을 근무하나 20년을 근무하나 처음 입사할 때 받는 급여를 그대로 받는다. 비정규직들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내놓은 대책이 기간을 4년으로 늘이겠다는 것이다. 또한 파견 업종을 넓혀서 불법파견이라는 재벌의 고민을 해결해주려 하고 있다. 순전히 재벌들만을 위한 정책들로 나열돼있다. 당연히 노동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총파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해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소득 양극화 문제를 포함한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했다. 또한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의 정당성을 놓고 논의하려했다. 하지만 아무런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그래서 예고한대로 대의원 전체 결의를 통해 총파업을 결의하고, 조합원 투표를 해서 84%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했다.


 

총파업에 돌입하는 24,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에 없다.

  대통령이 해외로 나간 지난 16일은 세월호 참사 1주기였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절규가 가슴 찢어질 정도로 아프다. 진상규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정부는 오히려 진상규명을 방해했다. 특별법을 무력화하는 시행령으로 결국은 객관적인 조사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정부가 뭔가 구리기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위로하기는커녕 유가족들을 탄압했다. 유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주지는 못할망정 최루액을 뿌려댔다. 불의한 정부들이 할 수 있는 선택들은 폭력적인 공권력으로 분노하는 민심을 짓누르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대통령이 자리를 비우기 전에 지시하고 떠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 단면이 세월호 주말 집회에서 드러났다. 유가족을 포함한 시민 100여명을 연행했다. 특공작전을 방불케 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대포, 소화기, 최루액까지 동원해 폭압적으로 시민을 막는 모습이 군사 정부 때를 떠올리게 했다.


  또한 나라가 온통 성완종 게이트로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정부의 실세들의 이름이 리스트에 올라있었다. 대통령의 부재시 그 역할을 대행해야하는 현직 국무총리도 그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고 결국 사퇴했다. 그들의 부패한 권력의 민낯이 다 드러났는데, 이보다 더 큰 일이 무엇이라고 외국으로 나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공무원 연금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평균 수명이 늘면서 연금을 지급하는 기간이 늘어나서 적자다. 연금 지급액을 하향조정하지 않으면 세금으로 충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금까지 정부가 주기로 약속했던 연금을 줄이겠다는 것이 정부가 주장하는 공무원 연금 개혁의 핵심이다.


  하지만 현재 공무원 연기금은 적자상태가 아니다. 미래에 예상되는 적자를 과도하게 부풀려 호도하고 있다. 또한 연기금이 열악해진 것도 그동안 정부가 전용해서 다른 곳에 썼기 때문이다. 반성은 하지 않고 그 책임을 공무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또한 공무원 연금은 후불임금의 성격이 강하다. 그동안 공무원들은 많지 않은 급여를 받으면서 일을 했다. 그 대신에 미래의 연금을 약속받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연금을 깎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임금 삭감이다. 때문에 100만 공직 사회가 공무원 연금 개혁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공무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에 공무원연금을 하향조정하면, 다음 차례는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 전반일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노인 자살율과 빈곤율이 상당히 높다. 노후를 보장할 수 있는 공적연금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하는데, 정부는 오히려 반대로 하려고 한다. 공적연금을 후퇴시키고, 민간보험의 시장을 확대하려는 의도다.


  민주노총은 국민 모두의 노후를 국가가 제대로 책임져야한다는 수준에서 함께 논의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과 정부는 56일이라는 시한을 정해놓고 공무원 연금 개혁을 마무리해야한다고 밀어붙이고 있다.


  현재는 공무원을 세금 도둑으로 매도하며 국민과 반목하게 할 때가 아니다. 부패 정부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일에 매진해야할 때다.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자원외교, 방위산업, 이른바 사자방 비리가 드러나고 있다. 국민 혈세를 해외자원개발에 투자해서 수십조원의 손실을 끼쳤다. 앞으로도 얼마가 더 낭비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4대강 사업을 한다고 수십조를 낭비하고 환경을 파괴했다. 이런 문제들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해야한다. 그리고 반성하고 다시는 세금이 이런 식으로 낭비되지 않도록 국가를 운영해야 된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엉뚱하게도 비난의 화살을 공무원에게로 돌리고 있다.

 

최저임금 1만원 보장을 주장하고 있다.

  최저임금 1만원을 받아야 월급 200만원이 조금 넘는다. 최저임금이라는 것은 최소한 월급을 받아서 살림이 가능한 수준을 명시해야한다. 그래야 희망을 가지고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 뼈가 빠지게 일하는데 빚만 늘어나고 살 수가 없으면 누가 희망을 갖겠나. 국민의 일자리와 삶에 대해서 자본이 착취하지 못하도록 국가가 감시하고 책임져야한다. 하지만 현재 국가에서 규정하고 있는 최저임금은 자본이 가장 적게 줄 수 있는 수준을 규정하고 있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최저임금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생활을 할 수 있어야한다. 외식을 하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고, 레저 생활을 즐기지는 못해도 최소한 자녀들 교육비 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을 수준은 돼야한다.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어야한다. 추우면 옷을 사 입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정도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최저임금은 최소한 1만원은 돼야한다.


  우리는 여전히 5580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금까지처럼 조금씩 인상해서, 내년에 6천원 그 다음해 6천 몇 백원 이런 식으로 인상하면 1만원이 되는 데까지 20년 더 걸리게 생겼다. 서민층의 절대 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영업만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 자영업도 희망이 없다. 2년 안에 폐업하는 곳이 7080%. 더 수렁으로 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가계부채는 천정부지로 늘어난다. 이런 것을 정부가 방관하고 있다. 최저임금은 조금만 생각 있는 정부라면 적극적으로 견인해야할 문제다. 그래서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민주노총 총파업의 4대 의제로 걸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다.

  양극화 문제는 재앙적인 문제다. 현존하고 있는 사회 문제 중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문제라고 다들 지적하고 있다. 과거 정부들은 경기 부양책을 통해 재벌기업들이 성장하면 낙수효과를 통해 서민들이 살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허구로 드러났다. 서민들의 삶은 팍팍한데, 재벌의 곳간에는 돈이 차고 넘친다. 재벌들은 투자를 하지 않는다. 재벌들이 10%만 투자를 하면 현재 청년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한다. 재벌을 통한 경기부양책 이외에 정부가 내놓는 방안이 없다는 것은 이 사회에 미래가 없다는 말이다.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전 세계적으로도 양극화와 소득불평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앞 다투어 최저임금 인상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은 이번에 우리보다 더 높은 인상률로 체결한 주가 많다. 미연방정부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이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독려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도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통해 경기를 부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과거 일본도 우리같이 재벌을 통한 경기부양을 주장했지만 실패했다. 유럽이나 동남아의 경우에도 앞 다투어 최저임금 인상을 하고 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내수시장을 활성화해야한다.


총파업 4대 의제에는 또 어떤 것이 있나.

  모든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을 허락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자기의 노동의 권리를 노동조합을 통해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이 조직되지 못한 곳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이 노동조합을 통해서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노동 3권은 헌법으로 보장돼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특수고용직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공무원이나 전교조의 경우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천만 장그래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자기 권리를 찾아야 한다.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도록 그 발판을 마련하기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일엔 노동부 장관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했다.

  한국노총이 들어간 노사정위가 결렬되니까 정부 주도의 가이드라인과 시행령을 통해서 일반해고 완화, 임금체계 개편, 취업규칙 변경 기준 완화 등을 밀어붙였다. 노동자들의 동의는 전혀 구하지 않았다. 노동부 장관이 자기 스스로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100인 이상 사업장들에게 이것을 노사관계에 적용하지 않으면 지도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이런 것은 노사관계를 침해하는 직권남용이다. 그래서 지난 20일 노동부 장관을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노동부 장관을 고발할 정도로 정부의 도발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이번에 막지 못하면 앞으로 노동운동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을 방법이 없게 될지 모른다.


  단체협약은 노사간에 협상을 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규정해놓는 것이다. 이런 것까지 정부가 일일이 관여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노사간에 스스로 맺어왔던 자유권을 정부가 박탈해버린 것이다. 이것을 막아내지 못하면 노동조합은 유명무실해지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없으면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은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되나.

  정부가 현재의 반노동 정책과 노동탄압 정책, 노동악법을 계속적으로 밀어붙인다면 투쟁 수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2015년이 숨 가쁘게 돌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24일 총파업에 이어 51일 노동절 궐기대회가 있다. 노동자와 분노하는 서민들이 함께 침몰하는 한국 사회를 견인하는 결의를 하고, 투쟁들을 배치할 것 같다. 5월과 6월 투쟁부터 11월 하반기 투쟁까지 긴 투쟁이 될지도 모르겠다. 박근혜 정부가 바뀌지 않는다면 11월에는 전 민중들이 하나로 총궐기를 해서 박근혜 정부의 반노동 친재벌 정책들을 바꿔나가는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노총과 연대투쟁에 나설 계획인가.

  한국노총이 노사정위 협상에 들어갔다가 결국엔 결렬이 됐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 합의로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한국노총과 긴밀하게 논의를 해오고 있다. 한국노총도 5월 총파업을 결의하고 있다. 서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다양한 방식의 연대와 공동투쟁을 진행할 것이다.


  현재 산업부분별로는 공공부분은 공공부분대로, 제조업은 제조업대로, 연금투쟁하는 단위들은 연금투쟁하는 단위별로 공동투쟁을 이미 결의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반노동 정책을 계속적으로 밀어붙일 경우에는 좀 더 긴밀하게 공동투쟁을 이어가는 한 해가 되지 않을까 전망하고 있다. 당장 앞으로 다가온 5월 투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더 논의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개별 사업장들의 상황은 어떤가.

  힘든 투쟁을 하고 있는 사업장이 너무 많다. 문제가 없는 사업장이 없다고 할 정도다. 부산에서는 택시노동자들과 생탁 노동자들이 광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이천 하이디스 공장의 경우에는 먹튀 자본이 기업을 폐업하겠다며 전원 해고통보를 했다. 삼척의 동양시멘트는 불법 파견으로 확정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계약해지를 하면서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자본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쌍용차에서는 정리해고자들이 사측의 손배가압류에 맞서 최선을 다해 투쟁하고 있다.


  정부에서 주장하는 4대 개혁 중 하나에 교육이 포함되어있다. 교육개혁의 중심은 대학이다. 학과를 통폐합하고, 서열화를 해서 지원금을 줄이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대학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 교수, 비정규교수를 비롯한 대학노조들이 투쟁에 나서고 있다. 울산 과학대, 연세대 송도 캠퍼스를 포함한 전국의 대학 청소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다이외에도 간접고용노동자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 기륭전자, 복수노조를 악용해 노조를 탄압하는 유성기업, KCC, 발레오만도, 서울시 청소 노동자들, 여성연맹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이런 요구들을 다 묶어서 총파업의 구심으로 해서 힘 있게 기세를 높일 것이다. 각각의 노동자들이 개별적 전투에서는 깨질 수도 있고, 처절한 패배를 당하기도 하면서 잘 견뎌왔다. 지금까지는 노동자들의 힘이 많이 밀렸던 것이 사실이다. 산별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전투를 모두 모아서 승리하는 전쟁을 만들겠다는 것이 2015년 민주노총의 결연한 의지다.


불경기에 노동자가 투쟁에 나서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절대 다수의 서민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어떠한 정책도 서민들의 삶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에서 인하한 재벌들의 법인세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결국 재벌들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부족해진 국가 재정을 담뱃세 인상을 포함해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확충하고 있다. 국민이 그런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것이 민심으로 나타나고 있고,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국민들이 그런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으실 거라 생각한다.


쌍용차지부 노조위원장 출신이다
. 쌍용차의 경우 더 애정이 가겠다.

  애정은 많이 가는데, 행동은 더 못하고 있다. 출신 사업장이라 더 챙긴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오히려 더 챙기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업장을 먼저 챙기게 된다. 그래서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쌍용차 노조원들에게는 늘 미안하다.

 

쌍용차 사태는 어떻게 돼가고 있나.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이 공장 안의 굴뚝에 올라가서 100일간 고공농성을 하고 내려왔다. 현재 쌍용차의 대주주인 인도의 마힌드라 그룹의 마힌드라 회장까지 소통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대화를 하는 중이다.


  그런 면에서 진전은 있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7년째 해고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조합원들은 많이 지쳤다. 그 과정에서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회사는 상처를 치유하는 쪽보다는 여전히 현실적인 입장으로 조합원들을 대하고 있다. 가동률·판매 실적을 중심으로 복직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교섭에 임하고 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접근까지는 조금 더디다. 쌍용차 문제가 잘 해결되도록 시민들이 더 많이 응원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총력투쟁에 나선 민주노총의 각오를 얘기하자면.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 역시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 역할을 못하면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 봐야한다. 좋은 일자리를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일자리를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로 전락시키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일자리를 정부가 앞장서서 만들겠다는 것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사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 경제가 노동자들의 소비를 통해서 활력을 찾아가도록 하는 시스템·정책의 변화를 만들어내겠다. 그것을 위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깊어진 서민의 주름살을 펴는데도 앞장서겠다. 많은 시민들이 민주노총의 투쟁을 응원해주셔야 한다. 민주노총이 시대의 아픔을 해결하고 침몰하는 한국 사회를 바로세우는 평형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겠다.


  시민들과 함께 할 것이다. 최저임금 1만원 서명을 받고 있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면 좋겠다. 민주노총만의 투쟁이 아니라 한국사회를 바로 견인하기 위한 투쟁이다. 시민사회 각계에서 민주노총의 투쟁을 앞 다퉈 지지하고 있다. 박수를 보내주고 있다. 마음을 모아주시면 좋겠다.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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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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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도 1년이 지났다. 추모하기도 부족한 시간, 유가족들은 거리로 나왔다. 풍찬노숙을 하고, 도보행진을 하고, 삭발을 했다. 단원고 학생 희생자 김시연양의 어머니 윤경희씨를 만났다. 삭발한 머리가 까슬까슬하게 자라있었다. 시연 엄마는 우리는 자식 잃은 부모들이다. 그런데 내 자식이 왜 죽었는지, 춥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왜 그렇게 죽어가야 했는지 아직도 밝혀진 것이 없다며 먼저 입을 뗐다.


시연이 엄마 윤경희 씨


쇼하고 있네

  참사가 나던 날, 엄마는 소식을 듣고 바로 팽목항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세 시 쯤이었다. 먼저 진도체육관에 도착해있던 가족들이 팽목항은 접근이 금지돼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팽목항에 가보니 통제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180명의 학생이 구조돼서 오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만 흘러가고, 아이들은 오지 않았다.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경찰들에게 물어도, 119 구조대에 물어도 확실한 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해경은 구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며 세월호 관계자들과 해경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밀기에 급급했다. 사고 현장에 있었던 분이 배는 이미 완전히 침몰해서 꼬리만 나와 있다고 했다. 팽목항에서 진행되는 구조에 대해서 쇼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사비를 털어 민간어선을 빌렸다. 남편과 사촌오빠(사촌오빠네 딸 예지양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됐다), 몇몇 단원고 학생 부모들이 함께 현장으로 가기로 했다. 기자 한 명이 동승하겠다고 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겠다고 약속했다. 헬기 1, 10여척이 세월호 주변에 있었다. 구조 활동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도 기름이 유출되면 배 안의 아이들이 위험할 수 있다며 기름 방제 작업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TV에서는 수백 척의 배와 헬기가 총동원돼 활발하게 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고 떠들고 있었다. 동승했던 기자는 뭍으로 나온 뒤 사라졌다.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팽목항에 나와 있던 언론에 현장 상황을 알렸다. 하지만 구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진실은 다 편집하고 유가족들이 울고 소리치는 모습만 보도했다. 이튿날부터는 한국 언론과는 인터뷰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유가족들은 카메라를 부순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안전사회 건설은 시연이가 준 숙제

  시연이는 6일만에 나왔다.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복구한 휴대폰에서 동영상 3개와 사진들 세월호 참사에 관한 기사를 캡쳐한 것들이 나왔다. 기울어지는 세월호 안의 광경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끈 없고, 지퍼 없는 다 떨어진 구명조끼를 입은 아이들의 모습이 공개됐다. 엄마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는 안전사회를 만드는 것이 시연이가 남겨준 숙제라고 생각했다.


  “그 숙제를 푸는 일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고, 시연이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일이다. 진상규명을 하고, 세월호를 인양하고, 안전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내놓을 수 있다.”


  진상규명을 해야,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진단을 해야 고칠 수 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아직도 왜 침몰했는지, 왜 구조에 실패했는지, 밝혀진 것이 없다. 수많은 의문만을 남겼다. 반쪽짜리 특별법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완벽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는 진상이 규명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지난 3월말, 조사를 받아야 할 해수부와 해경의 공무원들이 특별조사위원회에 참여하게 하는 특별법 시행령안이 나왔다. 언제든 만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은 만나주지 않았다. 진상 규명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없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다.


  아직 9명의 실종자가 돌아오지 못했다. 시연이 엄마는 모든 희생자들이 유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난해 11, 정부는 선체인양을 해야만 시신을 수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양도 수색 방법의 하나라고 실종자 가족들을 설득했다. 유품을 건져내면, 시궁창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속에 실종자 가족들의 아이가, 가족이 아직도 있다.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그 곳에 가족을 더 두고 싶은 가족이 있겠나. 하지만 끝까지 찾아내겠다는 약속을 믿고 실종자 가족들은 더 이상의 수색을 중단했다.


  시민들 중엔 박대통령이 해준다고 했다. 시끄럽게 하지마라고 호통을 치고 가시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 선체 인양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지겹다고 한다. 몰라서 그런거다. 아무 것도 밝혀진 것 없고, 인양은 결정되지 않았다. 세월호는 아직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다.


  정부여당은 슬그머니 돈 이야기를 꺼냈다. 인양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보상금 액수를 이야기 하면서 가족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를 돈 문제 때문인 것처럼 호도했다. 그래도 인양에 대해 찬성하는 국민의 여론이 높았다. 그제서야 기술 검토중이라고 발표했다. 사고가 일어난 지 1년이고, 실종자 수색작업을 중단한 것이 5개월 전 일이다. 아직 기술 검토하고 있다는 발표를 엄마는 믿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어서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도, 세월호 선체 인양도, 세월호 이후의 안전사회 건설도 다 물거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거리로 나왔다. 풍찬노숙을 해도 언론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삭발을 결심했다. 안산 분향소에서 광화문까지 12일 도보행진을 했다. 1주기 추모제에 대통령은 오지 않았다. 짧은 담화만 남기고 남미 순방길에 올랐다. 경찰은 차벽을 치고 유가족을 고립시켰다. 유가족과 시민들을 향해 캡사이신을 뿌려댔다.


  엄마는 그래도 지칠 수가 없다. 또 다른 유가족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지칠 수가 없다. “유가족들을 거리로 내모는 국가가 어디 있나. 우리처럼 아픈 유가족들이 우리 사회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으면, 이런 고통은 우리만으로 끝났으면하는 바람이다.

 

시연이는 엄마의 모든 첫 경험

  시연이를 낳았을 때 엄마는 불과 스물 한 살이었다. 엄마에겐 첫 딸이었고, 할머니에겐 첫 손녀였다. 그래서 시연이는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컸다. 엄마는 시연이 덕분에 많은 첫 경험을 했다. 시연이가 처음 기던 날,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준 날, 삐뚤빼뚤 서툰 글씨의 편지를 받던 날. 엄마는 그 모든 경험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시연이는 고등학교 2학년 나이에도 집에 들어오면 아기 같은 면이 있었다. 한창 친구들과 놀다 녹초가 된 몸으로 들어오면 팔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어리광을 부렸다. 아침이면 엄마에게 머리를 맡겼다. 엄마는 매일 시연이 머리를 말리고, 빗질하고 고데기로 말아줬다. 돌아보면 귀찮아서 엄마에게 맡겼다기보다는 엄마의 손길을 좋아했던 것 같다.


  집에서는 아기 같던 시연이는 밖에서는 리더십 있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반장을 도맡아했다. 단원고에 들어가고 난 뒤에는 연극부에 들어갔다. 2학년 때는 연극부 부장을 맡기도 했다. 후배들 오디션을 보고 난 후 설레던 시연이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시연이는 원래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어렸을 때는 아빠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하더니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기타를 배웠다. 1학년 때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음향감독을 맡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미디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학원에도 다니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착실히 준비했다.


  수학여행 가기 전 날까지도 음악 편집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출 곡이었다. 다들 수학여행 가서 입을 옷, 먹을 간식을 챙기던 그 시간까지도 음악 편집에 몰두해있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지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열심히 편집해서 갔던 음악을 틀어보지도 못하고 사고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시계, 4시 16분에 멈춰있다

 

시연이가 남겨준 선물

  지난해 926, 돌아온 시연이의 생일. 엄마는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시연이의 이름으로 음반이 출시된 것. 이 앨범에 실린 ! 이 돼지야는 시연이가 작사·작곡한 곡이다. 서촌갤러리 장영승 대표가 생전에 스마트폰으로 녹화한 영상을 보고 음반을 기획하게 됐다. 시연이의 목소리를 분리하고 새롭게 편곡된 반주를 입히는 작업은 작곡가 윤일상 씨가 맡았다.


  수익금 같은 것엔 일절 욕심이 나지 않았다. 수익금은 전액 세월호 참사 실종자 가족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엄마는 그저 시연이의 꿈이 이뤄진 것, 그리고 언제든 시연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했다.


  큰 선물을 받았지만 엄마는 시연이의 생일을 조용하게 보냈다. 시연이가 좋아하는 호박죽, 미역국 등으로 간소한 생일상을 차렸다. 납골당에 찾아갔다. 엄마는 납골당에 가면 꼭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차가운 유골함이라도 만지고 싶다. 유골함을 껴안고 이야기를 나누고, 뽀뽀도 한다. 음반으로 나온 노래를 들려주고 또 들려줬다.


  시연이는 엄마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고 갔다. 사진도, 동영상도 많이 남겼다. 시연이의 방에는 온통 낙서 투성이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시연이네 방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 때부터 방 구석 구석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아하기도 했는데, 낙서 내용을 보니 정말 재미있었다. 벽에도, 책상에도 아이들의 재기발랄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엄마는 그런 흔적들들 곳곳에 남겨준 시연이가 고맙다.

 

남겨진 가족들의 지난 1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되면 엄마는 너무 아프다. 여지없이 밝아오는 아침 햇살이 야속하다. 안방 문을 열면 바로 맞은편에 시연이의 방이 보인다. 아직도 침대에서 자고 있을 것 같은데, 학교 갈 준비하자고 깨워야 할 것 같은데, 시연이의 침대는 비어있다.


  단원고가 집에서 멀고, 교통편이 좋지 않아 엄마는 항상 시연이의 등굣길을 함께 했다. 학교까지 운전해주는 그 길이 엄마와 시연이의 드라이브였다. 시연이는 조수석에 앉아 재잘재잘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고가 난 뒤, 등교 시간이 되면 엄마는 바보가 됐다. 열 달 동안 그렇게 멍하게 있었다.


  동생 이연이는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이 아팠다. 엄마 아빠가 출근하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던 언니가 그렇게 갔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팠을 것이다. 엄마도 너무 아파 이연이를 잘 보살피지 못했다. 친척들이 정성으로 보살폈지만,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스트레스로 인해 장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 장기간 통원치료를 하고, 입원을 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아프다.


  이연이는 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언니가 들어가고 싶었던 학교였다. 이연이가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 엄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침이면 이연이를 깨우고, 젖은 머리를 말려준다. 빗질을 하다 또 시연이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이연이가 속상할까봐,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한다. 시연이 곁으로 가고 싶단 생각도 많이 했다. 이연이가 없었더라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울음을 참고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몇 번이고 세수를 한다.

 

사고 이전 나는 이기적이었다

  엄마는 세월호 광장에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용기를 얻는다. 처음에 유가족들 외에 다른 사람과 잠깐 대화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불쌍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누군가 수군대는 것만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서명 용지를 내미는 것도 낯설었다. 누가 욕이라도 하고 지나가면 서럽고 비참했다.


  사고 나기 전에 엄마는 이기적으로 살았다. 우리 가족만 행복하게, 안전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고가 난 이후 서로 돕는 삶에 대해, 함께 사는 사회에 대해 배우고 있다. 이 세상에 고마운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희생자 가족들보다 더 열심히 서명 받는 자원봉사자들, 간담회에 와서 귀기울여주는 시민들을 보며 지난날의 이기적인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 엄마는 세월호 문제가 해결이 된 후에는 받은 만큼 사랑을, 관심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세월호 참사가 난 지도 1년이 지났다. 1년이란 것, 지난해 416일에 시간이 멈춘 유가족들에게는 숫자에 불과하다. 엄마는 하루 빨리 세월호 선체를 인양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규명되길 바란다. 그런 이후에라야 시연이를 추모하며 마음껏 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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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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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 앞바다. 지난해 416, 국민 전체를 충격 속에 빠뜨린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난 그 바다 속에는 아직 사람이 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홉 분의 실종자들. 그들은 오늘도 외치고 있다. ‘세월호에 아직 사람이 있다’, ‘유가족이 되고 싶다. 광화문 광장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단원고 2학년 2반 허다윤 양의 아버지 허흥환 씨를 만났다.


다윤이 아빠 허흥환 씨



"유가족이 되고 싶다"

  다윤이 아빠는 유가족이 되고 싶다. 세상 천지에 유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냐만,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은 그렇다. 다만 뼛조각 하나라도 찾았으면. 다윤이가 어둡고 추운 물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하루 빨리 찾아서 밝고 좋은 곳에 보내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아빠로서 최소한의 도리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이 막막하다.


  “아흔이 다 된 내 어머니는 오십 넘은 아들과 통화를 하면 아직도 밥 먹었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묻는다. 그런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는 자식을 버리지 못한다. 속을 썩이면 혼을 낼 수야 있지만, 그 순간 뿐이다. 부모는 자신이 죽어야만 비로소 자식의 손을 놓을 수 있다. 하루빨리 다윤이를 찾아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싶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친구들이 다윤이를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음주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도 1. 하지만 아빠에게 그 시간은 의미가 없다. 시간은 흘러간다는데. 사계절이 한 차례 흘렀다는데. 낙엽이 지고, 눈 내리는 겨울 지나 또 봄이라는데. 아빠의 시계는 아직 지난해 416일에 머물러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팽목항으로 달려갔던 때와 현재가 변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

오히려 현재가 더 참담하다. 당시에는 진도 체육관에서 기다리다 구조작업이 진행되면 바지선으로 바로 달려갔다. 다윤이의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희망도 사라졌다. 지난해 11, 수색 종료 후 5개월이 지났지만 공식적인 인양 발표는 없다. 아빠는 거리로 나섰다.


다윤이는…

  다윤이는 어려서 많이 아팠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를 했다. 아빠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여유도 없이 다윤이를 안고 병원으로 한 달음에 달려갔다. 병원에서는 열없는 경기라고 했다. 흔치 않은 병이라고. 서울대병원에 다니며 3년 동안 치료하고 나서는 괜찮아졌다. 그렇게 나았는가 싶었는데, 또 아팠다. 가게에서 놀다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고 난 뒤, 쓰러진 것. 아빠는 그 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다윤이의 온 몸이 굳어서 못 움직이더라. 5분정도 정신없이 아이의 팔 다리를 주물렀다이후 2년간 또 병원을 다녀야만 했다. 다른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 시기. 다윤이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아팠다. 그런 아픈 시절을 지나, 이제 겨우 건강해졌는데. 이제는 아프지 않고, 행복할 날들만 앞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떠난 다윤이가 아빠는 너무 아프다.


  아프면 빨리 성숙해진다고들 한다. 다윤이가 그랬다. 악의가 없고, 순한 아이. 말 한마디를 해도, 오랜 시간 생각하고 건네던 속 깊은 딸.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진솔하게 사람을 대할 줄 알았던 다윤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먼저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진 아이였다. 방학이나 연휴면 보육원 같은 곳에 봉사를 많이 다녔다. 어린 애들을 좋아했고, 아픈 아이들을 먼저 살필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다윤이의 장래희망은 유치원 선생님. 다윤이에게 딱 어울리는 꿈이었다.


  다윤이는 부모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엄마 아빠한테도 내가 속을 안 썩여서 너무 좋지?”라며 해맑게 웃던 아이. 어려서는 너무 많이 아파서, 속 썩일 시간도 없었다. 아빠는 속을 썩여도 좋으니 옆에만 있었으면한다.


집안 걱정에 가지 않으려 했던 수학여행

  마지막이 된 그 날의 수학여행. 다윤이는 수학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보름 전부터 출발하는 당일까지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을 생각하고, 아픈 엄마를 먼저 걱정했다. 다윤이 엄마는 뇌종양 신경섬유종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다윤이가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에도 병상에 누워 있었다.


  아빠는 그런 다윤이가 안쓰러웠다.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수학여행. 학교 친구들 전체가 갔다 오는데, 다윤이만 친구들과의 추억을 만들지 못할까봐. 수학여행을 다녀오면 한동안 그 이야기로 꽃을 피울건데, 다윤이가 친구들의 대화에 낄 수 없겠다는 걱정도 됐다. 아빠는 이 기회에 공부하느라 받은 스트레스도 풀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라고 다윤이를 설득했다. 착한 딸 다윤이는 이모가 마련해 준 돈으로 어렵게 수학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아빠는 가지 않겠다던 다윤이를 자신이 설득했다는 것이 아직도 한으로 남아있다.


  아빠는 다윤이와 함께 여행을 다니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다윤이는 아팠고, 아빠는 바빴다. 직장 생활하느라 바빴던 아빠는 가족끼리 제대로 놀러 가본 적이 없었다. 사고 나기 한 해전 여름, 부산에 사는 이모네에 놀러 갔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이었다. 마지막 가족여행일 줄 알았더라면,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걸, 더 많은 사진을 남겨 둘 걸. 아빠는 다윤이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아쉽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다윤이

  다윤이의 생일은 101. 그날도 아빠는 진도 체육관에서 다윤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많은 희생자들이 나온 시점, 그래도 아직 수색작업을 한참 열심히 할 때였다. 부모 생일이나 애들 생일에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단원고 황지현 양도 생일에 돌아왔다. 아빠도 생일엔 나오겠지조그마한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그 전날 태풍이 부는 바람에 바지선이 철수했다. 결국 다윤이 생일에는 수색작업도 할 수 없었다. 아빠는 다윤이 생일에 팽목 등대를 찾아갔다. 손에는 조그마한 케익 하나를 들고.


  지난해 11, 실종자 가족들은 초주검이 됐다. 수색 중단.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정부에서는 인양도 수색의 방법이라고 실종자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인양은 결정되지 않고 있다. 아빠는 화가 난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양을 검토하겠다는 말을 했는데, 검토는 5개월 전에 시작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은 공식 발표를 하고 인양작업을 시작해야할 시점이다. 바다에서 작업을 하는 건 4~7월이 시기적으로 좋다고 한다. 8, 9월 되면 바람 불고 태풍 불고. 이런 상태로는 올해 안에 인양 작업을 시작이나 할지 모르겠다.”



"다윤이 뼈라도 품에 안아봤으면"

  엄마 아빠는 아픈 몸을 이끌고 매일 9시 안산 분향소에서 출발하는 서울행 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교복 입은 학생들을 마주친다. 다윤이와 닮지 않은 아이들을 봐도 다윤이 얼굴이 떠오른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다 딸 같다.


  희생자 가족들을 거리로 내모는 현실이 아빠는 화가 난다. 지난 2일에는 삭발식에 참여했다. 아빠는 다윤이를 건질 수만 있다면 삭발이 아니라 더 한 것도 할 수 있다. 부부는 오전에는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오후에는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한다. 엄마 아빠를 버티게 하는 힘은 오로지 다윤이. 다윤이를 바닷속에서 꺼내주고 싶어서 버틴다. “쓰러지더라도 다윤이 꺼내고 나서 쓰러지겠다. 엄마로서,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라며 아빠는 건져낼 때까지 버티겠다 다짐한다.


  지나가던 시민들의 빈정대는 말을 들을 때, 이제 그만하라는 말을 들을 때 아빠는 화가 너무 난다. 원래 아빠는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분한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따져 묻는 성격이었다. 그런 걸 아는 엄마는 다른 사람 어떤 말을 해도, 뭐를 해도 찾을 때까지는 삼키라고. 가만히 있으라고신신당부 한다. 다윤이를 찾기 전까지 아빠는 어떤 일이 있어도 속으로 삼킨다. 그 화가 아빠의 속을 까맣게 태워도, 그래서 건강이 더 나빠진대도 아빠는 삼킨다. 화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 그리고 혹여 다른 사람한테 낸 화가 돌아와 다윤이를 찾는데 방해될까봐, 그것이 겁나서 아빠는 오늘도 참고 넘어간다.


  다윤이 아빠는 건강이 좋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리를 구부릴 수가 없을 정도. 허리도 아프고 왼쪽 다리도 아프다. 30분가량 스스로 왼쪽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이 다윤이 아빠가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 그러지 않으면 잠시 걷는 것조차 힘이 든다. 신경섬유종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다윤이 엄마는 참사 후 상태가 급속히 나빠져 뇌와 양쪽 귀에 종양이 생겼다. 이제 한쪽 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다. 의사는 병의 진행속도를 늦추려면 집에서 쉬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는 집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다윤이가 아직 차가운 바닷속에 있기 때문에.


  아빠의 지금 꿈은 단 하나다. 다윤이 뼈라도 만져보는 것. 다윤이의 유품은 이미 물 밖으로 나왔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 다윤이가 운동화를 사달라고 해서, 같이 고르러 갔다. 다윤이가 좋아하던 민트색 운동화. 그 운동화가 다윤이가 들고 간 여행 가방에 담겨 돌아왔다. 아직 한번도 신겨지지 않은 채. 언니에게 빌린 검은색 모자, 휴대전화, 엄마가 선물한 지갑도 가방에 들어있었다. 다윤이만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유품은 필요 없는데, 다윤이가 돌아와야 하는데아빠는 혼잣말을 한다.


  아빠는 다윤이 유품을 감식할 때 보고 이제껏 보지 않았다. 다윤이를 만날 때까지 보지 않으려 했는데, 그제 찾아온 취재진의 요청에 꺼내보였다. 유품을 보는 것이 너무 아파도, 지금은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해야 할 상황이니까.


  “정부는 못믿지만, 국민은 믿는다. 나도 국민의 한 사람이니까. 세월호를 잊지 말아 달라. 아직 그 안에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기억해 달라. 또한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 달라.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를 인양해야 한다. 우리의 바람은 오직 그 것뿐이다. 딸아이를 제발 품으로 돌려주세요.” 다윤이 아빠의 호소는 오늘도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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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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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사고 희생자 가족들이 416시간 집중 농성을 선포하고 다시 광화문에서 풍찬노숙을 시작한 지도 보름이 넘었다. 봄이 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추운 날씨, 노숙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터.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행색도 초췌해져간다. 하지만 눈빛만은 힘을 잃지 않고 있다. “그렇게 힘은 들지 않다. 몸이 힘든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묻어있다.


유민아빠 김영오 씨가 광화문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김영오씨는 지난해 일어난 세월호 사고로 딸 유민이를 잃었다. 평소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아빠는 딸 유민이에게 미안해서 세월호 사고의 진상을, 유민이가 그 어두운 물 속에서 죽어야만 했던 이유를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유민이를 위해 아빠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못난 아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알아서 진상 조사를 할 줄 알았다. 지난해 516일 청와대 면담에서 받은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의 약속을 믿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만 지나갈 뿐이었다. ‘세월호 특별법은 여야간의 정쟁에 발목을 잡혀 진척이 없었다.


  유민아빠는 지난해 716, 단식 투쟁에 나섰다. 세월호 특별법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라는 요구였다. 유민 아빠는 당시엔 “3일 정도 단식하면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요지부동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유민아빠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갔고, 건강은 악화됐다. 치아가 약해졌다. 통증 때문에 양치질도 할 수 없게 됐다. 기억력도 상당히 나빠졌다. 또렷하던 기억들이 희미해졌다. 하지만 아빠는 왜 자신이 단식을 하고 있는지, 목적만은 잊지 않았다.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 그 진실을 밝혀야 했다.


  각계에서 유민아빠의 건강을 걱정했다. 대신 단식 할테니 건강을 돌보라는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빠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유민이가 사고를 당했을 때, 아빠는 이미 한 번 죽었기 때문이다.


  살이 46킬로그램까지 빠졌다. 허리와 다리 관절이 아파 걷거나 서는 것이 힘들었다. 근육을 다 소진하다보니 앉아있으면 갈비뼈가 장기를 찔러 장기가 붓기도 했다. 그래서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펴고 있었다. 그런 몸으로 청와대로 향했다.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마저도 힘겨운 유민아빠를 경찰은 막아섰다. 단식 40일 째, 결국 유민아빠는 쓰러졌다.


  병원에서도 링거만 투약할 뿐, 단식을 이어갔다. 그래도 정부와 여당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 때 아빠는 대한민국은 정부가 국민을 국민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에게 국민은 그저 세금을 내는 기계일 뿐이다. 사람이 죽어도 그저 기계가 망가졌네, 할 사람들이라고 유민아빠는 느꼈다. 자신이 아니라 천 명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명의 존엄보다 돈의 가치가 우선인 사회, 이 사회를 바꾸기 전까지 아빠는 편히 죽을 수도 없었다. 46일 만에 유민아빠는 단식을 중단했다. 단식은 중단했지만, 진상규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단식하던 때를 돌아보면 고마운 분들이 많았다. 동조단식에 나선 수많은 국민들, 서명을 하고 광화문에 나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민들, SNS에 응원의 글을 올려주는 분들까지. 그 중에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들도 있다.


  나이 많은 분들 중에는 보수층이 많다고 한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 앉아있으면, 들릴 정도로 비아냥거리며 가시는 어른들도 있다. 하지만 마음 따뜻한 어른들도 많았다. 단식을 하고 있는데, 팔순 다 되신 분들이 오시더니 큰 절 하고는 눈물을 쏟았다. “유민아빠 미안해. 내가 사회를 잘못 만들어서 유민아빠가 굶고 이 무슨 고생인가.” 그 한마디에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그 말의 진정성과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눈시울을 붉혔다.


  어린 학생과 젊은이들이 찾아올 때면 더 힘이 났다. 어린 학생들이 벌써 특별법이 왜 중요한지 내용을 다 알고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기특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유민아빠는 희망을 봤다.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왕따를 당하거나 우울증으로 자살하려던 아이들이 편지를 써서 오기도 했다. ‘다시 살겠다는 의지를 갖게 됐다’ ‘왜 살아야하는지 알겠다이런 편지를 많이 받았다. 그런 모든 성원이 유민아빠가 46일을 버티는 힘이 됐다. 유민아빠는 그런 분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46일이나 단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감사를 전했다.


  그런가하면 마음 상하게 하는 일들도 벌어졌다. 일간베스트(일베) 회원들이 단식하는 유민아빠를 조롱하기 위해 광화문으로 왔다. 이른바 폭식투쟁이었다. 부아가 치밀고 속이 뒤집어졌다. 하지만 단상도 설치해주고, 체하지 않게 물도 갖다 주라고 민우아빠한테 부탁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편히 식사할 수 있게 하자. 싸우지 말자. 저 사람들도 같은 나라에서 안전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니까.”


  당시 유민아빠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출처 없는 루머들과 그걸 퍼나르는 언론이었다. 유민아빠의 단식이 길어지고, 언론의 관심을 받자 인터넷에는 온갖 루머들이 나돌았다. 아픈 가족사를 들춰냈다. 마치 보상금을 많이 받아내려고 환장한 사람처럼 몰아갔다. 유민아빠는 스트레스로 머리가 한주먹씩 빠졌다.


  언론은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루머를 사실인 것처럼 보도했다. 그 보도로 루머는 확대재생산 되어갔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유민아빠는 언론을 믿지 않게 됐다. “기자들이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보고 방송을 내보내든 기사를 쓰든 해야 하는데, 알아보지 않는다며 언론사의 보도 행태를 지적했다. 또한 일부러 왜곡된 기사를 쓰지 않는 기자라 하더라도, 정곡을 찌르는 기사를 쓰는 기자가 없다. 겉으로 보이는 면만 보도한다. 그 속을 파헤치고, 물고 늘어지는 기자가 없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유민아빠 김영오씨


  지난해 11, 결국 세월호 특별법은 수사권과 기소권이 빠진 반쪽짜리로 만들어졌다. 아빠는 반쪽짜리 특별법이라도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되면, 제대로 진상조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바랐다. 세월호 사고의 진상을, 왜 딸 유민이가 죽어갔는지, 사회 구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밝혀지길 기도했다. 하지만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해양수산부가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시키는 시행령안을 입법 예고한 것.


  아빠는 다시 광화문 농성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희생자가족들은 지난달 30일부터 ‘416시간 집중 촛불 농성을 선언했다. 이번에도 유민아빠 자신의 건강은 생각하지 않는다. “건강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몸 망가지더라도 시행령 폐기하고, 특별법이 제대로 시행되도록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지난 1, 정부는 배보상 기준을 발표했다. 언론이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4억이니 8억이니 떠들어 댔다. ‘왜 세월호 가족들이 다시 광화문으로 나왔는지’, ‘정부시행령안의 문제점은 무엇인지광화문 광장에서 외치는 유가족들의 목소리는 언론에서 사라졌다. 그러다보니 국민들은 유가족들이 돈을 더 받으려 생떼 쓰는 줄로만 안다. 그래서 임원진 11명이 삭발 결의했다. 임원진의 결단에 희생자 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참여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현재 70여명의 희생자 가족들이 삭발을 한 상황, 유민이 아빠도 당연히 앞장섰다.


  유민 아빠는 정부시행령안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시행령은 모법인 세월호 특별법의 입법취지를 완전히 무력화 시킨다. 쓰레기 같은 시행령이다. 이 시행령대로라면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를 출범시키지 않는게 낫다. 기획조정실에서 실장과 총괄담당, 조사1과장이 상임위원의 업무를 조정하게 되어있다. 결국은 파견공무원들을 통해 정부가 특조위를 조종하겠다는 말이다.”


  “해경에서 8, 해수부에서 9명의 공무원이 파견되는 것도 말이 안된다. 해경과 해수부는 수사를 받아야 할 대상이다. 해경과 해수부에 대해 갖가지 의혹들이 풀리지 않고 있다. 이들이 특조위에 참여하겠다는 것은 내가 죄를 지었는데, 스스로 수사를 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들의 수사를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진상조사 소위원회의 조사 범위를 정부가 조사해온 것을 검토하는 수준으로 축소 한 것도 문제다. 이렇게 할 것이면 왜 특별 조사를 하는가. 형식적으로 대충 덮고 가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수많은 의혹이 산적해있다. 이 의혹들을 제대로 해결하려면 직접적인 재조사를 실시해야 하는데, 시행령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에서는 포괄적인 재해와 재난에 대한 안전을 점검, 안전사회 건설을 추진하게 돼있다. 하지만 시행령에서는 선박과 해상으로만 축소했다. 재해 재난이 해상에서만 일어나는가, 말이 되지 않는 시행령이다라며 정부 시행령안의 폐기를 요구했다. 또한 수정이나 협상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1주기가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예정대로였다면 추모행사 준비에 한창 바쁠 시기. 희생자 가족들은 시행령이 철회가 안 될 경우 1주기 행사 또한 취소하겠다는 마음이다. 유민아빠는 시행령 이대로 통과되면 진상 조사는 물건너 가는데, 추모행사를 하고 싶겠나. 1년이 지났는데,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유민이를 추모할 면목이 없는 것이다. 1주일 내에 진상을 밝힐 수는 없어도, 최소한 정부가 내놓은 쓰레기 시행령안을 폐기하고, 특조위의 원안대로 시행하겠다는 약속, 세월호 선체 인양을 하겠다는 약속 정도는 받아내야 유민이 볼 낯이 생긴다상징적으로 416시간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시행령안이 폐기될 때까지 사실상 무기한 농성에 돌입한 것이라며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유민아빠는 마지막으로 더 이상 가족들 가슴에 상처 주지 말라. 돈 받으려 여기 앉아 있는 것 아니다. 왜 내 자식이 죽었는지 밝혀달라고, 안전사회 건설하자고 앉아있는 거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아프니까 두 번 죽이지 말아 달라. 광화문으로 모여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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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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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모임 창당준비위원회(국민모임)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난 건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였다. 지난 13일 국민모임 지도부가 세월호 동조농성에 들어갔다. 세월호 광장에서 만난 김세균 대표에게서 세월호 참사와 보궐선거, 진보정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국민모임 창당준비위원회 김세균 상임공동대표

 

국민모임이 세월호 동조농성에 들어갔다.

  국민모임과 세월호 문제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국민모임이 여기 세월호 광장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작년 8월 세월호 광장에 사회 각계인사들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결집했다. 세월호 특별법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문제로 정치권이 한창 싸우던 때였다. 그때 참여했던 사회 각계인사들은 정부 여당에 대한 분노를 넘어 야당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됐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박근혜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세월호 문제를 처리하려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정부 여당에 동조하는 야당에 대한 분노심이 생기면서 이런 야당을 해체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세월호 유가족을 비롯해 수많은 서민 대중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제대로 된 야당이 있다면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여당의 제2중대 역할을 하고 있는 제1야당의 모습에서 그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새로운 야당을 만들어야한다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왔고, 그것을 계기로 국민모임이 만들어졌다.


  세월호 1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시간만 흘렀을 뿐 지난 1년간 바뀐 것이 없다. 정부에서는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시행령안을 내놓았다. ·보상금 이야기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려 했다. 지난 주말에는 유가족과 시민을 향해 캡사이신을 뿌리고, 연행했다. 이에 대한 분노로 국민모임이 농성에 나서게 됐다.


  국민모임은 세월호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세월호 유가족뿐만 아니라 세월호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바라는 국민들과 함께 행동할 예정이다.

 

세월호 참사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은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우선 왜 침몰했느냐는 것이다. 선령제한 규제를 완화해 노령선박이 운행하게끔 허가, 과적 등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를 제대로 점검하지 않은 구조적 문제점을 확인하고 고쳐야한다.


  또한 승객들을 왜 구조하지 못했는가의 문제다. 왜 전국민이 보는 앞에서 304명을 수장시킬 수밖에 없었는가, 자발적으로 나온 승객을 제외하고 단 한명도 구조하지 못했는가를 밝혀야한다.


  철저한 진상 규명을 통해 책임자를 처벌해야한다. 더 나아가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 체제를 만들었을 때 비로소 우리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과 자본의 유착관계를 근절시켜야한다. 인간의 생명과 안전보다 돈과 이윤을 중시하는 한국의 신자유주의 체제로부터의 결별을 할 수 있는 시스템 만들어야한다. 진상규명은 그 출발점이다.

 

세월호 참사 문제와 관련한 현안들이 있다.

  아직 실종자 9명이 바다 속에 있다. 실종자 가족들은 뼈라도 가족 품에 돌려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다.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 유해라도 수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종자 수습을 위해서 세월호 선체를 인양해야한다. 진상규명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인양을 해서 참사 원인데 대한 철저한 검사를 해야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정부시행령이다. 세월호 특별법은 처음 특별법 만들 때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세월호 진상규명의 핵심은 독립성에 있다. 해수부·해경을 비롯한 정부 부처가 잠재적인 조사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로부터의 독립된 기관인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의 반대로 관철시키지 못했다.


  부족한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었지만, 특조위가 열심히 조사하면 일정부분 진상이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정부는 말도 안 되는 시행령안을 발표해 진상조사를 막으려 하고 있다. 진실을 덮고 넘어가려 하고 있다.


  정부는 추모주간을 넘기고 보궐선거를 지나가면 이 문제가 덮일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 보궐선거까지 넘어가면 전 국민적 관심을 끌기가 어려워 보인다. 이번 4월동안 역량을 최대한으로 쏟아 부어 정부가 진상 규명을 안 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보궐선거가 한창이다. 국민모임에서는 정동영 전 의원을 후보로 내세웠다.

  국민모임은 아직 제대로 갖춰진 정당이 아니다. 창당과정이다 보니 제대로 잡혀있는 게 없다. 창당준비와 함께 정동영 후보의 보궐선거 운동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주가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분수령이라고 판단해 국민모임을 양분해서 동조농성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국민모임의 역량을 최대한 결집시켜 세월호 문제 해결과 보궐선거 승리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고 있다.

 

신당 창당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우선 창당준비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창당준비 위원회를 만들면 6개월 이내에 당을 만들어야 한다. 아직 창당이 되지는 않았지만 국민모임 내부 논의를 거쳐 정동영 후보를 출마시켰다. 정동영 후보가 당선된다면, 국회의원 의석 수 하나 얻는 의미 아니고 한국 정계 전체를 바꾸는 태풍의 눈이 되어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본다.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이 새로운 희망을 품고, 결집한다면 큰 힘으로 조직될 수 있다. 이 힘을 바탕으로 내년 총선에서도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완전한 새로운 노동자 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집권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국민모임의 희망사항이자 목표이다.


  가능 불가능 여부를 떠나 어쨌든 현재의 정치 구도를 바꿔야한다. 현재 야당으로서는 정권교체가 어렵다고 본다. 설령 정권교체에 성공하고, 집권한다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야당이 현재 절망에 빠져있는 대중의 눈물 고통과 동떨어진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야당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높아지고 있다. 이 국민적 열망이 새로운 야당, 대안야당의 탄생의 조건이 되고 있다.

 

정동영 후보가 낙선하게 된다면.

  물론 이번 보궐선거에서 정동영 후보가 낙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안야당을 향한 국민의 열망은 식지 않을 것이다. 국민모임의 동력은 이런 국민들의 열망이다. 정동영 후보가 낙선하더라도 국민모임은 지금까지 준비해왔던대로 차근차근 준비해서 더 좋은 성과를 내도록 노력할 것이다.

 

정의당·노동당 후보가 사퇴하며 사실상 진보통합을 했다.

  이동영 정의당 예비후보와 나경채 노동당 예비후보가 후보 등록을 포기했다. 두 후보가 큰 결단을 내려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아쉬운 점도 있다. 국민모임, 정의당, 노동당, 노동정치연대 4자연대 제안했다. 후보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우리 측의 본의 아닌 불찰로 연대의 신뢰가 깨져서 4자연대는 현재 무산됐다. 국민모임과 노동당, 노동정치연대는 연대해서 이번 보궐선거에 대응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정의당과도 서로 신뢰를 회복하고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민 모임이 신뢰 회복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

 

국민모임과 다른 진보정당들과의 차별점이 무엇인가.

  국민모임은 진보결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정의당·노동당 등 기존 진보정당들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 보다는 창당작업을 하면서 다른 진보정당들과 합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내년 총선 이전에는 하나의 정당으로 힘을 합쳐서 정치현실을 바꾸길 바란다.

 

통합진보당을 창당할 때 진보 진영을 통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분열했다.

  지난번 진보 통합의 경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중심이 된 통합이었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에서 분리된 평등파가 만든 정당이었다. 그런 면에서 통합진보당은 소위 자주파와 평등파의 재결합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진보정치운동의 한 사이클이 끝난 것이라고 분석한다. 1987년 이후 성장했던 민주·노동 운동 등 대중적 진보운동의 성장에 힘입어 성장해왔던 진보정치운동의 순환이 끝난 것이다. 진보정치 운동은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섰다. 이전의 진보정치운동은 자주파가 중심이 된 진보운동이었다. 헌법재판소에서 정당해산심판을 통해 통진당을 해산한 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해산 판결을 하기 전에 통진당과 정의당이 분당되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2년 전 소위 통진당 분당 사태를 보면서 자주파 중심의 진보운동은 종결이 났다고 판단하게 됐다.


  이제는 비자주파 중심의 새로운 진보운동을 구축해야할 시기다. 국민모임은 새로운 진보정치운동을 주도해서 만들어 나가고 있다. 국민모임운동과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정의당 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세력들이 함께 힘을 뭉칠 때다.

  진보진영이란 이름으로 묶을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의당 노동당과 노동정치연대 각각 다양성이 있다. 이 다양성을 잘 조정하면서 진보의 대의 속에서 뭉칠 수 있도록 잘 만들어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조정에 실패하면 분열되는 길로 가는 가능성도 있다. 분명한 것은 분열하면 공멸한다는 점이다.


  발전하려면 차이를 극복해야한다. 차이점은 내부에서 잘 작동하면 오히려 조직을 탄력적으로 발전시키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긴장과 갈등요소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 요소들 때문에 활발한 토론이 일어난다면 진보진영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찾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를 동력으로 삼으면 진보정치 운동이 성공할 것이고 아니면 실패할 것이다.


  물론 자주파를 완전히 배제하고 진보정치를 논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시간적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평가도 이루어져야 한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일흔이다.

  아직 농성하는데 크게 무리는 없다. 나 같은 사람 역할도 필요한 것 같다. 마중물 역할을 하려고 한다. 펌프로 물을 올릴 때 그냥 펌프질만 한다고 물이 올라오지 않는다. 위에서 물을 부어줘야 올라온다. 새로운 진보정치 주체들이 설 수 있는 마중물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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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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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 앞에서 장애인 30여명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며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는 故송국현씨의 1주기 추모제를 겸해 열렸다. 송국현씨는 지난해 오늘 화재로 사망했다.


지난 17일은 故송국현 씨가 사망한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420공투단)은 17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등급제 폐지를 외쳤다. 이 날은 故 송국현 씨의 1주기. 420공투단은 “故 송국현 씨는 장애등급제의 희생자”라며 “억울한 죽음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정부의 책임 있는 대책을 요구한다”고 촉구했다.


  정명호 씨는 “송국현 씨는 27년간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생활했다. 2013년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들과 어울리며 자립생활을 할 꿈을 안고 거주시설을 나왔다. 혼자서는 불편한 점이 많았기에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으려 했지만, 장애등급 3급인 그는 활동보조 서비스를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해 4월 13일 자립생활체험홈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그는 위중한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지난해 4월 17일 결국 숨졌다”고 전했다.


  정명호 씨는 말을 할 수 없어 태블릿 피씨를 통해 소통한다. 그마저도 손이 불편해 머리에 연결한 펜을 이용해 한 자 한 자 힘겹게 써내려갔다. 비장애인의 경우 1분이면 말할 수 있는 내용을 10분이 넘게 걸려 전달했다. 하지만 타인의 도움 없이 자신의 뜻을 전하는제 문제가 없었다.


정명호씨는 태블릿 피씨를 이용해 타인과 소통한다. 속도는 조금 늦지만 소통하는데 문제는 없다.


  노들장애인야학 한명희 교사는 “장애의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는 것은 겉으로 보기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필요한 서비스를 받는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송국현 씨의 사망사건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라고 말했다. 또한 “서비스를 받으려면 자신의 장애 정도를 증명해야한다. 이것은 장애인에게 엄청난 모욕감을 준다”며 장애등급제 폐지를 주장했다.


  420공투단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국무총리 공관으로 이동해 요구안을 전달할 예정이었지만 경찰 병력이 이들을 막아섰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 위로하겠다고 요구했지만 그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국무총리실 민정민원 비서관실에서 나와 요구안만을 전달 받았다. 이들의 요구안은 ▲장애등급제 폐지 및 대안 논의를 위한 국무총리 산하 범정부기구 설치 ▲장애종합판정체계 재논의이다. 이들은 오는 19일까지 국무총리실의 책임 있는 답변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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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6일 남미순방을 떠났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안산합동분향소에서 열리는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제에 초대했지만 대통령은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초대장이 잘못 전달된 것일까. 팽목항에서 알맹이 없는 담화를 7분간 진행하고 남미로 향했다. 지난해 단 한명도 구조 하지 못하고 304명을 수장시킨 국가의 리더는 그렇게 또 유가족들과의 대화를 회피했다.


광화문 누각 건너편에서는 시민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경찰은 유가족이 보이지 않도록 경찰버스로 차벽을 세웠다.


  대통령의 직무를 대행해야하는 이완구 총리는 ‘성완종 게이트’에 연루돼 곤혹스러운 상태다. 수많은 시민들이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경찰은 1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골목 골목을 막아섰다. 100여대의 경찰 버스로 차벽을 쳤다.


  시민들은 2008년 FTA 반대집회 때 등장한 ‘명박산성’을 떠올렸다. 경찰은 당시보다도 더 가혹하게 시민들을 막아섰다. 당시에는 세종대왕상 앞의 광장까지는 시민들의 진입을 허락한데 반해 광장진입을 원천 봉쇄했다. 시민들은 세월호 광장에서 분향도 할 수 없게 됐다. 신원확인 후 인근주민들에게는 길을 비켜주던 경찰이 이번에는 얄짤없다. 그저 돌아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퇴근길이 경찰에 의해 봉쇄된 인근 주민들의 원성이 터져나왔다. 경찰은 유가족과 행진 참가자들에게 캡사이신을 뿌렸다. 10여명은 연행되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광화문 누각 앞까지 진입에 성공했다. 그리고 경찰은 병력과 버스를 이용해 유가족들을 감금했다. 유가족들은 그 자리에서 노숙 농성을 이어갔다. 광화문 누각 앞은 전기도 물도 화장실도 없다. 기본적인 생활도 유지할 수 없는 곳에 유가족들은 고립되었다. 416연대는 “자식 잃은 부모에게 국가가 이런 모욕까지 안 깁니다”라며 페이스북에 한 장의 사진을 올렸다. 파란색 플라스틱 상자가 하나 놓여있고, 그 아래로 액체가 흘러있다. 유가족들이 최소한의 부위만 가린 채 소변을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사진 출처 = 416연대 페이스북

  17일 저녁, 경찰들은 횡단보도를 지키고 섰다. 횡단보도를 건너겠다는 시민들에게는 우회하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취재기자라고 신분을 밝혀도 통제를 당했다. 경찰 간부 하나는 “지금은 곤란하니 20분 후에 오라”고 말했다. 다시 갔을 때 그 간부는 없었고, “건널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17일 밤 경찰이 횡단보도를 막고 있다.


  그때 건너편에서 유가족들이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화장실 통제는 어느 정도 풀렸다고 했다. 재욱이 엄마는 “도시락은 전달 돼 식사는 했다. 해도해도 너무한다. 우리나라 인권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된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유가족들을 이렇게 대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재욱이 엄마는 “낮에는 잠깐 취재 허락했었는데, 다시 막나보네. 우리 사이에 끼어서 한번 들어가보자"라고 제안했다. 유가족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기로 했다. 영석이 엄마는 “경찰이 막아서면 그냥 돌아가. 괜히 마찰 생기면 우리 엄마들도 못들어가게 할지 몰라”라며 신신당부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 하자 경찰이 막아섰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냥 돌아섰다. 길 건너에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 정부의 불통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작부터 꾸준히 지적받고 있지만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시끄러운 일이 있으면 해외 순방을 떠났다. 세금을 들여 마련한 경찰버스로 차벽을 치고, 대한민국의 청년들을 의경이란 이름의 저임금 경찰 병력으로 뽑아 국민과 반목하는데 낭비하고 있다. 유가족에게서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권리마저 박탈하고, 누가 볼 까 접근까지 막고 있다. 언제까지 피해서 해결될 문제는 없다. 시민들은 오늘도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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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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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2월, 엄동설한의 추위에 지상 70미터의 굴뚝에 올라간 사람이 있다.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이다. 그는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지난달 23일 내려오기까지 101일을 굴뚝에서 버텨냈다. 그는 굴뚝에서 내려온 뒤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지금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창근 실장과 전화인터뷰를 진행했다.


굴뚝에서 내려온 지 20여일 쯤 지났다 건강은 어떤가.

  이제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처음엔 계속 어지럽고 몸이 무거웠다. 병원에서 치료 잘 받고, 지난주 금요일에 퇴원해 집으로 돌아와서 쉬다보니 많이 건강해졌다. 굴뚝 위에선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는데, 이제 조금 살 것 같다.


100여 일 만에 가족들과 만났다.

  그저 좋다. 굴뚝 위에서는 영상통화를 하는 중에도 그리웠다. 아들과 아내 손을 잡을 수 있게 돼서 감사하다. 가족들도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며 좋아한다. 하지만 아직 쌍용차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불안감은 남아있다.


농성 중 어떤 생각을 했나.

  처음엔 ‘나의 약함’을 인정하게 됐다. 그동안 여길 못 올라와서 동료들이 죽었나 싶기도 했다. 두 달이 지나면서는 세상이 만만하더라. 세상의 허점, 모순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많이 났다. 80일을 넘기면서는 오히려 좀 차분해졌다.


농성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굴뚝에 올라갈 땐 한겨울이었다. 100일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봄이 왔다고는 하는데, 굴뚝 위는 여전히 춥다. 추위와의 싸움이 힘겨웠다. 그리고 바람이 많이 불면 굴뚝이 흔들려서 불안하고 괴로웠다.


굴뚝 위에 오른 김정욱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오른쪽)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 출처 = 이창근 실장 페이스북


내려올 결심을 한 계기는.

  이유일 사장에서 최종식 사장으로 경영진이 바뀌게 됐다. 해고자들이 새 경영진과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굴뚝을 지키는 것이 새로운 경영진에 부담을 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교섭 과정에서 혹여나 굴뚝농성이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새 경영진이 선임되는 주주총회가 지난달 24일에 있었다. 그래서 23일 내려오게 됐다.

 

내려온 심경을 말해달라.

  다른 건 모르겠고, 쌍용차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기만을 바란다.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 조만간 쌍용차 현장에 복귀할 생각이다.


내려올 때 신임 사장 믿고 내려온다고 했다. 그 믿음은 아직 유효한가.

  유효하다. 교섭의 기본은 상대에 대한 신뢰다. 상대에 대한 신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상대를 신뢰하지 않고 교섭을 진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꾸 의심하면 자신만 괴로워질 뿐이다. 최종식 신임 사장을 비롯한 중역 그리고 사무관리직, 현장직 등 옛 동료들을 믿는다. 희망과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다만 교섭 진행내용을 보면 아쉬운 점이 있다. 26명의 희생자 문제를 포함해서 노사 협의가 형식적 측면만 부각되는 것 같다. 내용적 측면에서의 진전이 부족하다.


복직자 명단에서 스스로를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7년이란 긴 투쟁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7년이란 시간을 잃었다. 이 시간은 복직한다고 해서 보상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고자라는 이름을 스스로 던져버리고 싶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쌍용차 해고자가 아닌 심리치유센터 ‘와락’ 기획팀장으로 살아가려고 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 쌍용차 문제에 도움이 될 땐 도움을 주고, 빠져야 할 땐 빠지려 했다.

  하지만 무위로 돌아갈 것 같다. 복직자 명단 삭제에 대한 전권은 지부장에게 있고, 아직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지부 김득중 지부장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까지도 김 지부장에게 설득 전화가 왔다. 


좋은 결말 있기를 기도하겠다. 건강관리 잘하고 다시 굴뚝에 오르는 일이 없기를 바래본다.

  늘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맙다. 힘이 돼준 많은 분들에게도 감사하단 말씀 꼭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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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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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주요 관문. 갓 상경한 시골 촌부들의 입을 다물지 못 하게하는 화려한 빌딩들. 그 화려함의 뒤편, 서울에서 가장 어두운 곳 동자동 쪽방촌이 있다. 쪽방촌은 한국 전쟁 후 생긴 주거형태. 여인숙 주인들이 손님을 더 받기 위해 방을 여러 개로 쪼개 장사를 한 것이 그 유래다. 동자동은 서울시의 쪽방촌 중 가장 큰 규모. 거주민이 1100명이 넘는다.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동자동 쪽방촌에 찾아가봤다.


  동자동 주민들을 만난 건 서울시청 앞. 한 손에 피켓을 든 동자동 주민 20여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피켓을 들어본 경험이 없다”는 수줍은 고백처럼 그들의 모습은 어색했다. 변변한 구호 한 번 외치지 않고, 묵묵히 피켓을 들고 앉아있을 뿐. 손에 든 피켓만 아니었더라면 영락없이 동네 마실 나온 어르신들이다. 덩치가 큰 오세영(남.61) 씨가 앉은 간이의자가 휘청하더니 이내 오 씨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뒹굴었다. 그 모습을 본 김 모 씨는 “의자가 부서졌다”며 핀잔을 준다. 오 씨는 “사람이 다치지 않았는지 먼저 묻는 게 도리 아니냐”며 툴툴댄다. 김씨는 “돌바닥이 부서지진 않았는지 봐야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지켜보는 경찰들도 크게 경계하지 않는 눈치다.


6일 동자구 주민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종착역이라 생각했는데…

  이날 시청 앞에 모인 이들은 용산구 동자동 9-XX번지에 사는 주민들. 44년 된 이 건물은 동자동 쪽방촌 중에서도 가장 월세가 싼 편에 속한다. 그런 이유로 이곳 주민들 대부분이 이 건물에서만 10년 이상씩 살았다. 그들은 동자동이 인생의 종착역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 모 씨는 “이렇게 살다가 망우리나 벽제로 가겠거니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2월 이곳에 퇴거 공고문이 나붙었다. 건물의 개보수와 안전보강공사가 이유라고 했다. 주민들은 비상대책위를 세우고 합의를 통해 해결하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건물주는 지난 3월, ‘아시바’(공사를 위해 건물 외벽에 설치하는 철골 구조물) 설치를 강행했고, 주민들과의 마찰이 빚어지면서 중단된 상황. 건물주는 조만간 추가 설치를 강행하겠다는 입장. 현재 주민들의 월세 두 달치도 받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월세 두 달치 해봤자 30만원인데, 그 돈으로 어딜 갈 수 있겠나. 동자동 일대의 다른 쪽방에서도 우리를 받아줄 여력이 없다”고 했다. 기초생활 수급자인 최 모 씨는 “여기서 밀려나면 서울역에서 노숙을 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주거지가 없으면 기초생활 수급비도 받을 수 없다”며 사정을 얘기했다.

  이들의 요구는 “그저 지금처럼 살게 해 달라”는 것. 하지만 말처럼 간단하게 해결되기 힘든 실정이다. 서울시가 중재에 나서긴 했지만, 개인의 사유재산이라 적극적인 개입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주민 대표들과의 면담에서 “서울시에서 일정한 조건 하에 있는 주거취약계층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하는 것은 많이 했다. 지난 임기에 8만호, 이번 임기때 8만호 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람이 방에 몸만 누인다고 되는 게 아니고, 자신의 삶과 연결된 생태계가 있어야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며 건물주와의 중재를 통해 동자동 공동체가 이어질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원순 시장과의 면담을 끝내고 나온 이들의 면담 결과를 듣는 주민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사실상 해결된 것은 없기 때문. 당장 공사가 단행되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이 앞선다. 상심한 주민들은 터덜터덜 동자동으로 걸어서 돌아갔다. 주민들과 서울역 맞은편 동자동까지 동행했다. 동자동 9-XX번지 앞에 나와 있던 주민들이 걱정되는 얼굴로 맞이한다. 결과를 전해들은 주민들의 표정이 어둡다. 주민들이 집을 비운 사이 우체부가 다녀갔다. 건물주가 내용증명을 보내온 것. 공사를 강행하겠다는 건물주의 의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용증명을 받고 보니 더 착잡해진다.



"누군가 내 죽음 슬퍼해주면…"

  뇌병변 장애 4급 판정을 받은 오세영(61) 씨는 요즘 통 잠을 이루지 못한다. 퇴거 공고장이 붙은 이후 계속되는 불안증세 때문이다. 그는 매일 수면제를 먹고 잠에 든다. 고아원에서 유년을 보낸 그는 이곳 동자동을 고향이라 생각한다. 

  “고아원에서 나와 16세부터 혼자 살아왔다. 이곳저곳 떠돌다 정착한 곳이 동자동 쪽방촌이다. 9-XX번지에 산지도 벌써 15년”이라며 남은 시간도 이곳에서 보내길 원한다고 했다. “혼자 살다보니 외롭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래도 내가 죽었을 때 다만 한두 사람이라도 소주 한 잔 올리며 슬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 다른 곳으로 간다면 어찌될지 모를 일 아니냐.”

  그는 “지난겨울 동자동에서 네 사람이 죽었다. 그 중 셋은 무연고다. 한 달간 보관되다 화장터 근처에 뿌려졌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을의 가운데 위치한 조그마한 공원에서 합동 장례식을 한 차례 치른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동자희망나눔센터


  지난해에는 ‘동자동 희망나눔센터’가 KT의 지원을 받아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주민을 위해 빨래방과 공동샤워시설을 개방하고, 자활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한 카페프렌차이즈업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 중인 1층 마을 카페에서는 시중보다 훨씬 저렴한 1000원에 커피를 살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에겐 그마저도 사치다. 담뱃값마저 올라 가뜩이나 빡빡한 살림이 더 어렵다. 희망나눔센터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전찬우(남.50) 씨는 “담뱃값이 올라 올 초에 금연을 결심했다. 보건소에서 운영하는 금연클리닉에도 가봤다. 6주간 금연 패치를 지원받았는데, 6주 이후에는 지원이 되지 않더라. 이후 다시 피게 됐다”고 말했다.

  전씨가 동자동 쪽방촌으로 오게 된 건 1999년. 1997년 IMF 한파로 운영하던 인쇄공장이 문을 닫을 상황에 처했다. 친척들에게 돈을 융통하려했지만 이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그렇게 떠돌다 전씨가 찾은 곳은 남산. 죽기 위해서였다. 전 아내와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려 했다. 자해를 해 팔뚝에서 피를 흘리고 있던 그를 지나가던 가톨릭 신부가 데리고 내려왔고, 동자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세상은 쪽방과 쪽방 아닌 곳으로  

  전씨는 쪽방촌의 현실을 보여주겠다며 본인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가 사는 곳은 9-XX번지에서 불과 5분 정도 떨어진 쪽방. 가는 내내 그는 “이쪽은 쪽방이고, 이쪽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어쩌면 그에게 세상은 쪽방과 아닌 곳으로 나뉘어있는 줄도 모르겠다. 그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건물의 복도는 좁고 어두웠다. 건장한 성인 남성 두 명이 마주하게 되면 누군가는 길을 비켜줘야 할 정도. 좁은 복도를 사이로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의 방은 10호. 붉은 가림막을 걷고 들어가자 살림이 한 눈에 보였다. 옷가지들이 한켠에 수북이 쌓여있고, 바닥에는 이불이 깔려있다. 곰돌이 인형이 두 개 있는데, 순이와 돌이란다. 순이와 돌이는 쿠션이자 전씨의 말동무.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TV, 냉장고가 들어가 있다. 그런 이유로 월세는 20만원이 넘는다. 이 동네 쪽방 중에서 제법 비싼 편이다. 전씨는 “없는 살림에라도 손님 대접은 해야 한다”며 굳이 매실주스를 권했다. 




  전씨에게서 쪽방촌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쪽방촌에서는 취사에 어려움이 많다. 휴대용 버너를 이용해 통로에서 취사를 한다. 겨울에는 춥다보니 방 안에서 취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간이 협소해 화재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역의 무료급식소를 찾아가 해결하기도 하고, 동자동 사랑방에서 500원을 주고 사먹기도 한다. 싼 값에 먹지만 김치·밥·국 세 가지만 나오는 식단이 맛있을 리 없다.

  화재 위험 때문에 개인 난방기기를 사용할 수도 없다. 정해진 시간동안 전기패널을 통해 공동으로 난방이 된다. 난방시간은 보통 밤 10시에서 아침 6시까지 정도. 조금의 온기나마 오래 잡아두기 위해 겨울철엔 이불을 개지 않는 것이 쪽방촌 생활의 지혜.

  쪽방촌에는 40여만원씩의 지원을 받아 생활하는 기초생활 수급대상자들, 노인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노인들이 많이 산다.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아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 경제적 취약계층인 이들에겐 실질적 도움이 절실하다. 일용직 잡부로나마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다. 그마저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전씨는 “이 동네에 건강한 사람들은 없다고 보면 된다. 일을 나가는 날보다 못가는 날이 더 많다”고 했다.

  인터뷰 당일에도 전 씨는 병원에 다녀왔다. 척추와 허리 쪽이 많이 아프다. 전씨는 인터뷰 중 약을 먹을 시간이라며 약봉투에서 약을 주섬주섬 꺼냈다. 한 번 먹는 양이 열다섯 알은 넘어 보인다. “배고플 때 먹는다”며 웃음을 짓는다. “저녁에 먹는 약은 더 많다”고 했다. 달력에는 다음 병원 예약 날짜가 적혀있다.

 

언제쯤 동자동에도 봄바람이

  전씨는 9-XX번지의 상황이 남 일 같지가 않다. 언제 나가랄지 모르는 건 이곳도 마찬가지. 9-XX번지 문제가 건물주의 의사대로 진행이 된다면 그 다음엔 어느 곳이 될 줄 모른다는 것이 동자동 주민들의 공통적인 불안.

그는 “시에서는 서울 외곽의 임대주택으로 가라고 한다. 모두 뿔뿔이 흩어지라는 말이다. 그래도 이 동네에 함께 살며 부족하나마 이웃의 정을 가지고 살았는데,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섞이는 것이 쉽지 않다. 이미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갔다가 돌아온 주민들도 있다”고 했다.
작년에 돌아온 주민 한 명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단다. 다행히 미수에 그쳐 지금은 정신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쪽방촌 낡은 건물 앞에는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그 모습이 이질적이다. 서울역 쪽으로 내려가는데 바람이 스치고 지난다. 온기를 품은 봄바람이. 언젠가는 이곳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에게도 봄바람 부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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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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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일 박근혜 대통령의 인양 검토 발언에 대해 세월호 유가족들과 국민대책위는 못 믿겠다는 입장이다. 유가족들은 세월호 인양의 기술적 검토는 이미 끝났다. 그런데 기술적 검토를 한 뒤 결정하겠다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유가족들이 박 대통령의 발언을 반기고 있다는 보도를 봤는데, 아무 발언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는 말을 침소봉대한 것이라며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박래군 416일의약속국민연대 상임운영위원은 유가족들은 박 대통령의 발언을 믿지 않는다. 세월호 선체 인양의 기술적 검토가 끝났다는 사실을 유가족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인양에 대한 찬성 여론이 높아지자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벌인 쇼라고 평가 절하했다. 또한 우는 아이 달래듯 하는 정부의 태도에 유가족들이 분개하고 있다. 시행령안의 폐기와 세월호 선체 인양 문제를 결정할 때까지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주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기술적 검토를 한 뒤 적극적으로 고려하겠다는 이야기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백 번 해오던 이야기다. 대통령의 입에서 처음 나온 발언이라고 특별히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여야할 때라며 정부의 세월호 선체 인양 결정을 촉구했다.


  한편 이완구 국무총리는 7일 기자단 오찬 간담회에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에 문제가 있다면 유족의 입장을 반영하겠다. 유가족의 입장을 진솔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이번주 유가족을 만나겠다. 전향적으로 모든 문제를 풀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 총리의 발언에 대해 박주민 사무차장은 수정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문구 몇 개 고치자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고, 본질을 흐리는 발언이다. 폐기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주장했다.


  7일 일부를 제외한 세월호 유가족들은 농성을 쉬었다. 지난달 30일부터 계속된 강행군에 심신이 지친 것. 특히 지난 4일과 5일 안산분향소에서 광화문까지의 도보행진과 6일 세종시 해수부 앞에서의 농성은 유가족들을 지치게 했다. 끝날 기약이 없는 농성을 위해 7일 하루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


  4.16 촛불 문화제는 계속 이어졌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50여명의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촛불을 밝혔다. 이날 집회에서 세월호 특위 비상임위원인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가 강연을 했다. 김 교수는 세월호 유가족들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감사해야할 대상이다. 안전 사회 건설을 위해 앞장서고 있는 숭고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또한 세월호 진상조사는 단순히 세월호 사고의 원인을 밝혀 유가족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일이 아니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며 “200억원이 아니라 더 큰 비용을 치르더라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교수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 정부 시행령안에 대해 파견된 공무원인 기획조정실장이 조사를 조정하는 업무를 맡게 되는데, 사실상 조정이 아닌 조종을 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정부 시행령안대로 조사가 이뤄진다면, 특위 위원들은 거수기로 전락하고 만다. 이른바 세금도둑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가족의 입장을 반영하겠다는 이완구 총리의 발언에 대해서는 문제점들을 다 고치면 이미 지난 2월 세월호 조사특위에서 제출한 안과 똑같을 것이라며 정부 시행령안 폐기와 특조위 원안 채택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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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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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유가족들이 광화문 광장에서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세월호 1주기, 추모를 해야 할 기간에 농성을 하게끔 만드는 정부가 유가족들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번엔 2학년 3김도언 학생의 어머니를 만나봤다.


4월 3일. 광화문 광장 퍼포먼스

 


우리 도언이는

  엄마가 기억하는 도언이는 구김 없고, 정의감 있는 아이였다. 집에서는 동글동글 도언이라고 불렀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동그란 안경을 썼기 때문. 성격도 동글동글해서 친구도 많았다. 바른생활부 활동도 하고, 연극도 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던 아이였다. 1학년 때는 연극을 해서 금상을 받아오기도 했다. 전교에서 도언이를 모르는 친구들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피아노 연주도 잘 하고, 춤도 잘 추고, 사물놀이도 잘 하고. 다방면에 재능이 있던 도언이. 엄마, 오빠, 이모, 사촌오빠들 까지 6명이 한 팀이 되어 사물놀이 봉사를 다니기도 했다. 엄마는 그때 그 시절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도언이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누구보다 친근한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과 소통하고 싶어했다. 누구보다 선생님을 잘 따르는 아이기도 했다. 그 또래 아이들이 선생님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다반사. 하지만 도언이는 진로와 관련해서는 꼭 선생님하고 상담했다. 선생님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난 뒤 다은이 친구들로부터 알게 된 사실 하나. 친구들 사이에서 상담사로 통했다는 것. 고민이 있는 친구들은 항상 도언이에게 이야기를 했다. 도언이는 친구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조언도 해줬다. 친구의 비밀을 다른데 가서 떠벌리는 성격도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아이였다. 외가쪽에서 막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어른을 만나면 배꼽인사를 할 정도로 예의가 바른 아이였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 딸을 잃었으니, 엄마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하다.

 

  아들은 든든한 맛이 있고, 딸은 살가운 맛이 있다. 도언이 오빠도 있지만 도언이는 특히 친구 같은 자식이었다. 도언이랑 커플링도 맞췄다. 도언이가 엄마를 졸라서 맞추게 된 것. 도언이는 학생들 하는 티타늄 같은 것으로 하려 했는데, 엄마의 제안에 화이트 골드로 맞췄다. 도언이는 그 커플링을 항상 손에 끼고 다녔다. 엄마와 교감하는 징표였다. 지금 반지는 평택 추모공원에 도원이랑 함께 있다.


  도언이는 엄마의 살아가는 낙이자 의미였다. 항상 도언이를 끼고 잤다. 자다가도 뽀뽀하고, 만질 정도로 엄마와의 스킨십에 스스럼이 없을 정도였다. 도언이가 잘 때 볼을 만지면 ~하면서 잠투정을 했다. 그러다가도 엄마야하면 안도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또 엄마가 이불을 안 덮고 자면, 조심히 이불을 덮어주던 속 깊은 아이. 그런데 지금은 손을 대도 없으니 미칠 노릇이다. 자다가 습관적으로 손을 뻗는데, 그 곳에 도언이가 없다. 엄마는 자신을 너무나 닮은 딸의 사진을 휴대폰에 저장해 놓았다. 포토샵으로 수정을 하지 않아도 예뻤던 딸. 하루 종일 그 사진을 보고 있어도, 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지난 1년의 기억

  도언이가 나오기 전까지, 물에서 시신이 올라오면 가족들이 확인을 하러 가야했다. 특이사항이 도언이와 비슷한 여학생의 시신이 건져질 때마다. 마음 약한 엄마가 무너질까봐 도언이 오빠가 그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오빠라고 하지만 아직 20대 초반, 시신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힘든 내색하지 않고 감당해냈다. 그 슬픔과 분노가 어느 정도의 크기일지, 엄마도 가늠하지 못한다.

 

  오빠는 제대로 된 심리치료도 받지 못하고 작년 6월 군에 입대했다. 연기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17년간 함께 살았던 동생이 죽었는데,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가족들의 곁에 남아 힘을 보태려 했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설득했다. 제대하고 나왔을 때도 엄마 아빠가 밝히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때 행동하라고 했다. 권리는 보호해주지 못하면서 의무를 강요하는 나라가 싫었지만, 의무를 다 해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입대하는 아들이 엄마는 걱정됐다. 혹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돌발행동을 할까봐. 그랬을 때, 혹시나 세월호 유가족 전체가 욕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 여느 엄마들 같았으면 몸 건강하란 말하기에도 바쁜 그 시간, 엄마는 군대에서 문제 일으키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아들이 입대한 지 벌써 10개월이 지났지만 면회 한 번 찾아가지 못한 것이 엄마는 못내 미안하다. 그런 상황을 만드는 정부가 밉다. 아들은 1주기에 맞춰 휴가를 나온다. 휴가 나온 아들을 위한 음식 장만할 시간도 없는 현실이 엄마는 또 미안하다.

 

  엄마는 동네에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전에는 편하게 하던 행동들도 조심하게 된다. 주위 시선을 자꾸 의식하게 된다. ‘딸을 잃었는데 저렇게 행동해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동네 슈퍼도 가지 않고, 세탁소도 가지 않는다. 사고에 대해 물어볼까봐, 부담스럽다.

 

  이런 이유로 유가족분들 중에는 이사를 하신 분들이 많다. 도언이네도 이사를 하려고 생각했다.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의 반대로 없던 일이 됐다. 아빠는 도언이 흔적이 남아있는 집을 떠나기 싫다. 도언이의 흔적이 남은 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사는 것도 싫었다. 도언이 방은 그대로 뒀다. 책상, 침대, 옷장도 그대로 뒀다. 도언이 신발, 우산 할 것 없이 도언이가 사용하던 모든 물건도 모아뒀다. 학교에서 신던 실내화도 집으로 가져왔다. 심지어 사용하던 칫솔도 그대로 뒀다. 그런데 도언이만 없다. 그래서 물건들로 가득찬 그 방은 엄마에게 그저 빈 방이다.

 

  돌아온 도언이의 생일. 엄마는 생일상을 집에서 직접 차렸다. 살아 있을 때도 항상 집에서 생일상을 차려줬으니까. 도언이가 좋아하던 김치찌개, 카레, 튀김, 잡채 등 한 상 차렸다. 김치찌개는 특별히 아빠가 끓였다. 도언이가 아빠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좋아했기 때문. 생일상을 도언이 책상 위에 차려줬다. 다른 부모님들은 함께 생일잔치를 하고, 서로 챙겨주기도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도언이 생일은 우리 가족끼리 있고 싶었고, 다른 가족들을 만나면 더 아플 것 같았다. 그리고는 도언이가 있는 평택 추모공원에 다녀왔다.

 

  엄마는 도언이가 매 순간 그립고, 또 그립다. 특히 아침에, 애들 학교 가는 시간에 생각이 많이 난다.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미어진다. 매일 데리고 등교하던 기억이 떠올라 더 힘들다. 오전 여섯시 반, 도언이랑 함께 집을 나서던 그 시간. 엄마는 또 도언이 방에서 눈물을 훔친다.


4월 5일. 안산~광화문 1박2일 도보행진을 마친 유가족들

지난한 싸움

  사고가 난 뒤 엄마는 운영하던 가게를 닫았다. 진행하던 건강 관련 강의도 접었다. 도언이의 장례를 치르고,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슬렀다. 지난 6월이었다. 엄마는 아빠랑 진도 체육관, 팽목항을 돌아다녔다. 음식 싸들고,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다녔다. 도언이 친구들이고, 선생님이니까. 수중수색이 종료될 때까지 그렇게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엄마 아빠도 위로를 많이 받았다.

 

  엄마는 연약하지 않다.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1920일 동안 도보행진을 했다. 물론 힘들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것조차 힘든 순간도 있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그 물집이 터지고. 근육통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는 도언이 생각하면서, 실종자 분들 생각하면서 걸었다. 아침이면 근육 이완제를 먹었다. 저녁이 되면 파스를 붙이고. 아침에 또 일어나면 힘들지만 약 먹고, 함성 한 번 지르고, 힘을 얻어 걸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겠지, 정부에서 세월호 인양 등 문제를 해결해주겠지. 기대하며 걸었다.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 전국에서 4000명이 넘는 분들이 유가족들을 맞이했다. 도보행진은 학부모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언론에서는 보도해주지 않았다. 제대로 보도했다면 현재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추모기간에 쓰레기 시행령안이나 배·보상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가족 마음을 제대로 전해줬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할 것을 요구했다.

 

교육계 변화해야

  엄마는 세월호 이후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계는 세월호 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교육청의 허가를 받고, 학교에서 아이들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겠다고 인솔하고 갔지만 지켜주지 못했다. 엄마는 학교를 믿고 애들을 보냈다. 하지만 아직 교육부는 변화지 않고 있다.

 

  “아이들 안전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교과서적인 내용 말고 실제 위험이 닥쳤을 때, 생명을 지키는 방법과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또한 세월호의 진실을 가르쳐야한다. 세월호 사고의 원인과 현재 과정을 알려줘야 한다. 진실을 알아야 아이들이 행동할 수 있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엄마는 교육청 등 교육계와 연계된 활동을 많이 한다. 지난 1일과 2일 도언이 엄마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청년 문화 콘서트 기억과 약속에 참석했다. 1일에는 약 1200명의 청년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월호 사고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2일에는 의정부에 있는 북부 청사에서 교장선생님, 교육부 직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교장선생님들 모시고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경기도 이재정 교육감이 추진한 덕분에 마련된 자리였다. 세월호에 대해, 교육부의 부패, 세월호 이후 달라져야할 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 일정 때문에 엄마는 삭발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마음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오는 길에 유가족들이 단체삭발식 하는 모습을 인터넷 생중계로 봤다. 너무 마음이 미어졌다. 유가족들이 삭발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그렇게 몰아넣는 정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1주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추모기간에 추모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부는 느닷없이 배·보상 이야기를 꺼냈다. 돈을 흔들며 유가족을 모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론은 분별없이 배·보상에 관련된 뉴스만 보도했다. 마치 우리가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나선 것이 더 많은 보상을 받아내기 위함인 것처럼 비쳐지게 만들고 있다.


4월 6일. 광화문 촛불 문화제

도언이만을 위해 울고 싶다

  비가 오면 엄마는 제일 먼저 도언이 우산이 생각난다. 도언이는 노란, 빨간, 하얀 우산 세 개를 준비해두고 옷에 맞춰 들고 다닐 정도로 멋쟁이였다. 우산에는 예쁜 공주 도언이라고 표시해 두었다. 우산 뿐만 아니라 자기 물건에는 꼭 예쁜 공주 도언이라고 표시를 했다. 하늘나라에도 비가 올 텐데, 그 곳에서 우산은 쓰고 있을까. 도언이 우산은 내가 쓰고 있는데혹여나 비를 맞고 있지 않을지 여느 엄마와 같은 걱정을 한다.

 

  또한 이 비가 침몰하는 대한민국에 단비가 되어주기를 기도한다. 물은 생명이다. 메마른 대지에 비가 쏟아지면 그 토양에서 생물이 다시 살아난다. 메마른 대한민국에 생명을 불어넣는 근원이 되기를 바란다. 하늘에서 아이들이 도와줄 거라고 믿는다.

 

멈춘 시간 움직일 수 있는 건 언론

  그날 모든 시간이 멈춰졌다. 엄마 아빠들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생각도 멈춰버렸다. 작년 416일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게 중요한 사실이다. 애들 희생된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진상을 밝히고자 1년을 버텨왔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멈춘 시간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언론이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지만 국민들도 깨우칠 수 있다. 우리는 그 시계를 움직이게 하려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다.”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데,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다. 언론이 제대로 서있다면 지금처럼 정부에서 추모기간에 배·보상 이야기를 했겠나. 빨리 진상규명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면 온전히 내 딸 도언이만을 위해 울 수 있으니까. 기도할 수 있으니까.”

 

  엄마는 지금 울 수가 없다. 밖에서는 절대 울지 않는다. 울면 지치니까, 지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도언이 방에서 소리 죽여 운다. 엄마는 진상이 규명되고 도언이만을 위해 울 시간이 오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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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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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광화문의 날씨는 흐렸다. 봄바람 같지 않게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다.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 연합예배 준비 위원회의 주관으로 부활절 예배가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약 8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해 예수의 부활과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렸다.


  예배가 마칠 즈음 세월호 유가족 250여명과 함께 도보행진을 한 시민들이 세월호 광장으로 들어섰다. 광화문 광장에서 기다리던 시민들은 상복을 입고, 영정사진을 든 유가족들을 박수로 맞았다. 지나가는 유가족들의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건네고, 포옹하며 위로했다. 유가족 중 일부는 오랜 도보행진에 물집이 잡힌 탓에 걸음을 절기도 했다.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 앞에 자리를 잡고 촛불문화제를 진행했다.


4월 5일. 안산~광화문 1박2일 도보행진을 마친 유가족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딸 예은이의 영정사진을 안고 시민들 앞에 나섰다. 그는 쉰 목소리로 예은이의 꿈이 가수였다. 노래하고 즐기는 자리는 아니지만 많은 분들 앞에 예은이와 함께 서고 싶었다흐린 날씨에도 세월호 광장을 가득 채워준 많은 시민분들께 감사하다. 하지만 더 많은 분들이 나서주셔야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며 더 많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촉구했다.


  전명선 4.16가족협위회 대책위원장은 국민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설 수 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어 세월호 진상규명이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첫 걸음이라며 진상규명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진상규명의 의지를 밝혔다.


  이번 12일 도보행진에 함께한 시민 안승혜씨는 오는 동안 비가 오락가락 했다. 영정사진에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맞을까, 꼭 안고 가는 유가족들을 보며 눈물이 흘렀다우리는 세월호 유가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살고 있다. 더 많은 빚을 지기 싫어 함께 걸었다고 세월호 유가족의 12일 도보행진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무대에 오른 세월호 가족들은 정부에 욕을 하기도 했다. 유경근 위원장은 이제껏 욕을 참았다. 할 말이 많아도 참았다. 참고 또 참으면 국가가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하지만 우리가 속았다. 앞으로는 해야 할 말들을 가감 없이 하겠다고 밝혔다.


4월 5일. 안산~광화문 1박2일 도보행진을 마친 유가족들


  광장 옆에는 119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한 시민이 구급차에 다가가 치료를 요구했다. 12일의 도보행진 동안 8개의 발가락에 물집이 잡힌 것. 본인을 트위터리안 서패후라고 소개한 시민은 군대 간 아들과 고등학교 2학년 딸을 키우는 평택에 사는 평범한 엄마다. 내 자식도 언제든지 이런 가고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엄마로서 아이들을 위해 안전사회를 건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2일간의 도보행진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한편, 세월호 유가족들은 6일 세종시 청사로 내려가 해수부에 항의 방문 할 예정이다. 오는 11일에는 집중 촛불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유경근 위원장은 “11일에는 오늘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야 한다며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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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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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일 광화문 광장에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삭발식이 거행됐다. 이미 아이들과 함께 죽은 목숨, 기꺼이 내던질 각오가 되어있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단원고 희생자 이재욱 학생의 엄마 홍영미씨도 이날 길었던 머리를 다 밀어버렸다. 싹둑 잘린 머리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단원고 이재욱 군의 엄마를 만나봤다.


단원고 故이재욱 군의 엄마 홍영미씨


  재욱이 엄마는 아직 삭발한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화장실 갔을 때 살짝 봤다.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조금 다르더라. 내 머리가 뒤통수가 납작하다. 재욱이도 뒤통수가 납작하다며 낯선 모습 속에서도 아들을 찾았다.


우리 재욱이는…

  엄마가 기억하는 아들 재욱이는 밝고 자유롭고 건강한 아이였다. 재욱이는 워낙 활발해 이런 저런 활동도 많이 했다. 1학년 때는 2학년이었던 누나와 함께 학생회 활동을 했다. 재욱이가 학생회에 들어갔던 이유는 축제를 멋지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 홍보부장을 맡아 제 역할을 충실히 했고, 덕분에 그 해 단원고 축제는 어느 때보다 성공적으로 마쳤다.

 

  대외 활동도 활발했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코스프레 축제에도 3년간 친구들과 함께 쫓아다녔다. 파쿠르 전국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했다. 파쿠르는 주변 환경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극복하는 훈련으로 스턴트맨처럼 벽을 타고 뛰어넘기도 한다. 재욱이는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이면 동아리 모임에 나가 비디오를 찍기도 했다. 홍씨는 사고가 났을 때 동아리 친구들이 많이 찾아와줬다며 분향소에 찾아와 함께 힘들어하고 울어준 아들의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재욱이는 또 애인처럼 살가운 아들이었다. 엉덩이나 팔뚝 같은 데가 튼튼했는데, 엉덩이를 팡팡 때리에이엄마!” 하면서도 엄마와의 그런 스킨십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도 가끔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재욱이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엄마는 속상하다. “재욱이 사이즈만한 인형을 만들까하는 생각도 해봤다며 농담을 해본다.

 

  재욱이는 누나랑 방을 같이 썼다. 나이를 먹어가며 방이 필요해져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지만, 이사를 하게 됐을 때는 이미 사고가 난 이후. 엄마는 재욱이의 방을 꾸몄다. 방에는 평소 사용하던 물건들로 가득하다. 이사를 할 때면 의례 물건들을 버리지만 엄마는 아들의 물건을 작은 것 하나까지 놔두고 올 수가 없었다. 책상도, 옷장도 그대로 뒀다. 모든 게 다 그대로인데 재욱이만 없다. 엄마는 재욱이의 향취를 느낄 수 있을까 가끔 옷장을 열어본다.

 

지옥 같았던 지난 1

  지난 1년 재욱이네 가족의 삶은 지옥 같았다. 운동을 좋아해 건강에 자신이 있던 재욱이 엄마는 건강을 잃었다. 위도 아프고, 소화도 잘 안 된다. 물만 먹어도 살이 붙는다. 순환이 안돼서 그렇다. 세포 활성화가 잘되면서 노폐물들이 땀으로 배출이 돼야하는데 안되면서 결국 피부병이 생기는 단계까지 왔다. 아픈 몸을 이끌고라도 농성장에 나오는 것이 엄마는 좋다.

 

  엄마는 사고 당일의 기억은 떠올리기도 싫다. 그날은 몹시 추웠다. 몸도 추웠지만 마음까지 추웠다. 으슬으슬하고 세포가 떨렸다. 심장이 멎고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심정이었다. 재욱이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엄마니까. 그 순간부터 무너지고 엄마도 같이 죽었다. 그리고 삶의 목표를 잃었다.

 

  사고가 난 직후에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힘들었다. 재욱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정해야하니까. 잊기 위해 잠을 자고, 잊지 못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던 날들이 이어졌다. 재욱이가 좋아하던 치킨·피자를 시켜 먹을 때, 같이 갔던 음식점 앞을 지나갈 때면 잘 먹던 모습이 자꾸 떠오르다. 하루에 수십번은 냉장고 문을 여닫던 아이. 길을 가다 재욱이 또래의 아이가 보이면 가슴이 미어진다. 재욱이와 닮은 곳 하나 없는 그 모습에서도 재욱이가 떠오른다.


  사고 당시에 단원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누나는 상실감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재욱이 뿐만 아니라 250명의 후배를 한 번에 잃었다. 학생회, 동아리에서 친하게 지냈던 후배들도 다 잃었다. 한 달쯤 지나고 나서야 마음을 추슬렀다. 동생의 삶을 대신 살아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예전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절망감을 벗어나야했다. 현재는 어엿한 대학생.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누나로 살기 위해 목표했던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휴대폰 바탕화면에는 교복을 입은 재욱이가 누나와 함께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다. 엄마는 수시로 재욱이의 사진을 본다. 딸아이였다면 더 많은 사진이 남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학생증 사진이 다른 사진들보다 잘 나왔다. 이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사용될 줄 당시엔 누구도 몰랐다. 재욱이의 명예주민등록증에도 이 사진이 사용됐다. 고등학교 2학년 생일이 지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수 있지만, 재욱이는 주민등록증을 받아보지 못하고 떠났다.

 

재욱이의 첫 생일

  지난해 1219. 사고가 난 후 맞은 재욱이의 첫 생일. 먼저 경험한 주변 엄마들이 많이 걱정했다. 거의 매일 아이들의 생일이 돌아온다. 생일을 맞는 엄마들은 미친다. 첫 생일이니까. 아이 장례도 장례지만 첫 생일이 너무 힘들다고 먼저 경험한 엄마들이 위로했다. 평소 꿋꿋한 성격이기에 잘 견딜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1주일 전부터 이유 없이 아팠다. 재욱이 생일을 양력으로 챙겼는지, 음력으로 챙겼는지도 헷갈렸다. 가족들은 양력으로 챙겼다고 하는데, 자꾸 음력으로 챙겼던 것만 같았다. 불과 1년 전에 챙긴 생일인데. 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생일날 아침엔 미역국, 생선구이, 피자 등 재욱이가 좋아하던 것으로 상을 차렸다. 생일상을 가족끼리 함께 나눠 먹고, 납골당·분향소에 들러 다시 상을 차렸다. 재욱이 친구들도 찾아왔다. 재욱이랑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닌,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아이들이었다. 재욱이도 단원고에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독수리 5인방 엄마 아빠들도 재욱이의 생일을 함께 챙겨줬다. 독수리 5인방이란 재욱이랑 1학년 때 친했던 친구들 부모의 모임. 아이들은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라졌지만 똘똘 뭉쳐서 잘 다녔다. 그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애들 장례를 치르고 나서 5인방 부모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누구보다 서로의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주 모인다.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많은 위안을 받는다. 그렇게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다. 아이들 때문에 맺어진 부모들의 인연이 지금은 살아가는 동력이 됐다.

 

바라는 건 오로지 진상규명

  지난 1년간 세월호와 관련돼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가족들이 바라는 건 진상규명과 참사 이전과는 다른 안전한 대한민국 건설. 재욱이 엄마는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 이 두 가지만 옳은 방향으로 결정이 됐으면 삭발까지 할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모든 것들이 유가족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건지고, 장례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애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했는지 알아야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 움직이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경우를 목격하고 경험했다. 시간만 끌고 있지 진상규명은 하나도 되지 않고 있었다. 재판은 그 동안에 진행되고 있고.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될 거라고 믿었다.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부와 정치권은 차일피일 미뤘다. 언론들은 세월호 사건을 정치적 사건처럼 보도했다. 세월호 가족의 목적이 더 많은 돈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악질적인 기사들도 넘쳐났다. 여야는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하다 결국에는 반쪽짜리 특별법을 만들었다. 반쪽짜리 특별법을 가지고라도 어느 정도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정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안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진상규명이 될 거라는 기대의 조그마한 불씨마저 꺼뜨린 거다. 사고 후 현재까지의 상황이 완전한 속임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래서 엄마는 머리를 박박 깎았다.

 

  재욱이 엄마는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죽었다. 지금 내가 움직이는 것은 그 아이들을 살려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라고 밝혔다. “육신을 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해도 정신은 살려낼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이 과정이 아이들을 살리는 과정이다. 그러니 우리가 세월호를 어떻게 인양하지 않을 수 있겠나. 썩어가는 대한민국을 눈 뜨고 지켜볼 수는 없다. 양심이 회복되고 정부, 정치, 국민의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다. 지금껏 방관하며 살아와서 이런 꼴이 됐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지구는 계속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언론이 변해야 사회도 변해 

  삭발식날, 광화문광장은 기자들로 발 딛을 틈이 없었다. 이에 대해 재욱이 엄마는 우리 목소리를 한껏 냈다. 이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왔다는 게 조금은 위안이 됐다. 그 전에는 아무리 외쳐도 철옹성이었다. 평소에는 농성장에 찾아오는 기자들이 별로 없다. 오늘 많은 언론사에서 취재를 오는 것은 좋다. 하지만 제대로 보도가 될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며 언론행태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언론이 중요하다. 416일날도 언론만 제대로 보도 했더라면 살릴 수 있었다. ‘전원 구조 오보’, 책임 진 사람이 하나라도 있나? 세월호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왜곡한다. 마치 우리가 보상금을 때문에 이러는 것처럼 보도한다. 언론은 양심선언을 해야할 때다. 언론히 변해야 우리 사회도 변할 수 있다. 그러면 4.16 이후에 멈춰있던 시간도 흘러갈 수 있다”라며 언론의 각성을 촉구했다.


  삭발식이 끝나갈 무렵 내리던 비는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거세게 내렸다재욱이 엄마는 개인적으로 비 오는 것을 좋아한다재욱이가 옛날에 친한 친구들끼리 비가 쏟아질 때 맨몸으로 뛰어나가 개구쟁이 짓을 하며 동영상 촬영을 한 적이 있다그런 상황들을 알고 있으니까 비가 오는 것이 반갑다하늘나라에서 또 모여서 신나게 놀고 있겠구나 싶다실제로 세월호 100, 200, 300일 등 큰 행사 때마다 비가 왔다아이들이 응원을 해주는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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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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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4월이다. 기억하기 괴로운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되어간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시간은 고장난 시계 같다. 사계절의 변화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지난한 싸움 끝에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반쪽짜리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나마도 제정됐다는 사실에 진상규명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시키는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이 입법예고 됐다. 유가족들이 416시간 집중농성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농성중인 광화문 세월호 광장의 풍경을 담아봤다.



  오후 다섯시 경의 광화문 광장, 4월이 되었다고 제법 봄 날씨 같다. 바람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도 이전처럼 외투를 단속하지 않는다. 교복을 입은 중고생들이 세종대왕상 앞에서 셀카봉을 들고 활짝 웃는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사진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의경들은 일사분란하게 이동한다. 그 분주한 사이에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부시행령 폐기하라”, “세월호 선체 인양하라”, “실종자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세요”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멈춰있다.


“시행령안을 폐기하라”

  세월호 유가족들은 지난달 30일 416시간 집중농성을 선언하고 항의행동에 나섰다. 다시 농성을 시작하게 된 배경은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의 입법예고. 유가족들은 “정부의 시행령안은 반쪽짜리나마 만들어진 세월호 특별법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시행령안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나섰다. 장완익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위원은 “특별법의 취지를 완전히 무시한 시행령안에 놀랐다. 법률가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기가 막힌 시행령안이다. 정부가 새로운 입법행위를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독립성 훼손과 위원회 조직 축소

  박주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시행령안은 여당 추천 상임위원인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무처장 밑에 기획조정실장과 또 기획총괄담당관을 편성, 파견 공무원이 맡게 한다. 진상규명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조사1과장 역시 파견된 공무원이 맡게 돼 있다. 정부로부터 파견된 공무원들이 여당이 추천한 사무처장을 보조케 해서 위원회 전체의 업무를 종합 조정하고 각 소위원회의 임무를 기획 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잠재적 조사 대상인 정부부처와 여당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위원회 조직 축소에 대해 “특별법에 따르면 120명 내의 직원을 둘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시행령안은 합리적 이유 없이 출범시 인원을 90명으로 한정했다. 비율 또한 파견 공무원이 다수를 차지한다. 특별조사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입장은 단호하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말도 안 되는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이 전면 폐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시행령안의 폐기를 요구했다. 


매주 수요일 7시,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을 기억하는 미사’가 열린다.


해가 저문 광화문 광장

  해가 지면서 관광객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엔 유가족들이 우두커니 남았다. 저녁 일곱시에는 한국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가 진행하는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을 기억하는 미사’가 열렸다. 지난해 12월 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시작된 이 미사는 세월호 광장으로 옮겨 매주 수요일 7시에 열리고 있다. 세월호 광장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시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그 시각 광화문 바로 앞, 유가족이 자리한 곳엔 촛불이 하나 둘씩 켜졌다. 유가족의 주위를 촛불이 둥글게 감싸 유가족들을 비추고 있다. 바닥에 세워뒀는데 바람이 불어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자세히 보니 다 마신 음료수병, 자양강장제병 따위가 촛불이 흔들리지 않게 받치고 있었다. 문득 이 장면이 바람직한 사회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뜻있는 사람들이 빛을 비추고, 그 빛이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모습.


세월호 유가족들의 주위를 촛불이 밝히고 있다.


  그 곳에서 성빈이 아빠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내 딸은 뭐든 잘 하는 아이였다.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럽지만 전교 1등 하는 딸이었다. 상장도 장학금도 많이 받았다. 판사나 외교관의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며 딸의 핸드폰에서 딸의 사진과 상장, 장학증서를 보여줬다. 눈에 그리움이 그렁그렁 맺혔다. 건강은 어떠냐고 묻자 “여기 몸 성한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런데 아플 수도 없다. 여기서 아파서 쓰러지면 안 된다. 아직 진상규명이 전혀 되지 않았고, 내 딸이 왜 그렇게 죽었는지 모르는데, 아프면 안 된다”고 다짐하듯 대답했다.


  사고 직후의 상황에 대해 “처음에 유족들은 사고 현장에 접근하지 못했다. 계속 못 가게 막았다. 해수부 장관에게 항의해서 해경 순시선을 타고 현장에 갔다. 현장에서 돌아오니 아내한테 연락이 왔다. 사망자 명단에 딸 이름이 올랐다고. 이후 병원에서 애들 신원 확인해주시던 단원고 선생으로부터 우리 딸이 아니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포 중앙병원으로 향했다. 내 딸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성빈이는 29일에 물에서 나왔다. 다른 아이들보다 빠른 편이었다”라던 성빈이 아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신 찾아가면서 나와 줘서 고맙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을 거다. 우리는 나왔으니까 다행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나온 것이 다행인 일인가 싶다”라고 어렵게 말을 이었다. “1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 물속에 있으니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은 오죽하겠나. 세월호 선체는 꼭 인양돼야 한다. 이런 기사나 좀 써라. 여기서 과거 얘기 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없다. 그 때 생각을 돌아보면 울화만 치밀고, 애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말을 끝으로 성빈이 아빠는 자리로 돌아갔다.


  유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동석했다. 유가족들은 자신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 누구의 엄마이고 아빠일 뿐이었다. 해가 저물고 나니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매트를 깔고 담요를 나눠 덮고 있어도 한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인터뷰를 중단한 것이 마음이 쓰였던지, 성빈 아빠는 가지고 있던 핫팩 하나를 건넸다.


  유가족들 사이에서는 삭발식이 화제다. 집행부를 포함해 최소 20명 이상이 삭발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한다.(실제로는 2차에 걸쳐 70여명이 삭발에 동참했다) “00이 엄마는 두상이 예쁘니까 꼭 해야겠다”, “머리숱 적은 00이 아빠는 하나 안하나 별 차이가 없다”등 서로 농담을 주고 받지만 그 속에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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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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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누군가는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20144월을 잔인하단 단어로 다 형용할 수 있을까? 세월호 1주년. 걷다보니 어느새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손에 들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 겨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광화문에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봄을 돌려주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목도리 하나는 둘러줄 수는 있지 않을까?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이하 세월호 가족협의회)330일 광화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세월호 선체 인양과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제정안의 철회를 요구했다. 기자회견 이후 청와대 항의 방문을 시도했지만 다수의 경찰 병력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경찰에 막힌 청와대 항의방문

  세월호 가족협의회는 항의 방문하기 위해 청와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세종대왕상 앞에서 지키고 있던 경찰 병력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마치 세종대왕이 앞길을 막고 있는 듯 보였다. 괜히 세종대왕에 화가 났다. 가족협의회 일부는 경찰 병력이 막지 않는 곳을 뚫고 광화문 앞까지 나아갔다. 그 이상은 넘어갈 수 없었다.


  50여명 남짓의 유가족들을 막겠다고 나선 병력은 세 배는 족히 되어보였다. 병력이 디귿자로 가족협의회를 감쌌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바쁜 걸음을 재촉했으며, 또 누군가는 잠시 서있었다. 외국인들은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광화문으로 나아가려던 한 시민과 경찰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50대 남성으로 보이는 그는 왜 자꾸 따라오냐? 경찰이면 다냐? 움직일 자유가 내게 있는 것 아니냐며 경찰에 따져 물었다. 경찰은 당신이 자꾸 넘어가려 하니까 그러지라며 대꾸했다. 따라오지 말라는 남성을 경찰은 결국 세종대왕상까지 따라갔다. 그를 따라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경찰이 광화문 가는 길을 막기에 뒤돌아서 농성장으로 가려했다. 그 순간 경찰 여섯 명이 따라 오더라.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울분을 토하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재근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은 대통령께 면담을 요청하기 위한 청와대 항의 방문일 뿐 가두시위나 행진이 아니라고 행사의 성격을 확실히 규정했다. 그런 연유로 경찰이 막아선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 공동상황실장은 경찰이 계속 막더라도 그 자리에 앉아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또 청와대로 가기 위해 날마다 항의행동을 계속할 것이라며 의지를 밝혔다.


  이 공동상황실장은 가족들이 왜 또 광장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는지 (국민들이) 잘 모르고 계신 것 같다. 특조위 조사권을 무력화 시키는 시행령 폐기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광장으로 나오게 됐다고 세월호 가족협의회가 광장으로 다시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대통령 면담을 요청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힘이 절실하다. 411일부터 추모주간을 선포, 촛불집회(11)대규모 추모문화제(16)범국민 대회(18) 뿐만 아니라 1주기를 맞아 전국에서 다양한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국민들의 참여를 부탁했다. 끝으로 우여곡절 끝에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됐는데, 특별법이 제대로 시행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며 언론이 더욱 관심을 갖고 올바르게 보도할 것을 촉구했다.

 

그래도 아직 희망 갖는다

  시민단체 간사인 조은씨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민들에 유인물을 건네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면 광화문 농성장에 찾아와 일을 돕는다고 밝힌 그는 시행령 제정안 철회와 세월호 선체 인양 등 문제들이 하루 속히 해결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반대 주장을 가질 수는 있지만, 농성장에 찾아와 유가족들에게 욕을 하는 분들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며 관용의 정신을 요구했다. “하지만 몇 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유인물도 잘 받아 주시고, 다른 유인물과 달리 길바닥에 버리는 분들도 많지 않다그런 모습을 볼 때 아직 우리 사회에 희망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바닥에 나뒹구는 유인물이 없었다.



가족협의회는 왜?

  세월호 가족협의회는 왜 다시 광화문 농성장으로 나왔을까? 가족협의회는 지난 327일 해양수산부가 입법예고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제정안은 특별조사위원들이 제안한 시행령안을 완전히 묵살한 전혀 새로운 안이라고 소리 높였다.


  이들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을 정부가 조사한 것에 대한 검증 수준으로 축소 위원장과 위원들의 위상과 역할을 약화 사무처의 인력과 예산을 축소하고 위원회 사무처의 주요 직책을 정부 파견 고위 공무원이 장악했다며 조사대상이 되는 기관의 공무원들이 특조위를 사실상 통제하는 법안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세월호 특별법과 특조위의 조사권을 무력화시키는 시행령이라며 즉각 철회를 요구했다.


  세월호 가족협의회는 또한 특별법을 무력화하는 이런 초법적이고 불법적인 시행령안을 일개 부처인 해양수산부가 단독으로 마련했을 리 없다청와대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독립적 국가기구의 시행령이 아니라 청와대가 작성한 진상규명 통제령이며 간섭령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박근혜 정부가 특별법 시행령 논의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세월호 인양 약속에 대해서도 손바닥 뒤집듯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며 세월호 선체에 대한 온전하고 조속한 인양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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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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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31일은 세월호가 침몰한 349일째 되는 날이었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의 딸 예은양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지도 349. 그의 시계는 아직도 2014416일에 멈춰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해 그는 오늘도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차가운 바닥에 앉아있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을 만난 건 광화문, 저녁 일곱 시가 넘어갈 무렵이었다. 낮에 한차례 비가 내린 탓에 조금 쌀쌀한 날씨였다.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덤덤히 이렇게 지낸다는 유 위원장. 그 앞에 어둠이 내려앉은 광화문 광장이 펼쳐져 있다. 광장의 돌바닥에 그대로 앉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찬기운이 올라오는 그 자리에 앉은 모습이 묘하게도 편해보였다. 1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 했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건강은 괜찮은가.

  건강이야 당연히 안 좋다. 계속 밖에서 생활하다보니 여기저기 아픈데도 생기고. 그래도 몸 아픈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세월호 사고가 벌써 1주기를 맞는다.

  1, 저희한테는 그런 감각이 없다. 시간이란 감각을 잃은 지 오래 돼서, 그게 1년인지 10년인지 그냥 똑같은 날들의 반복일 뿐이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입장에선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하다. 1년이란 시간이 원래 어느 정도의 길이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 416일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세월호 유가족들은 2014415일까지 삶을 살았던 거고, 416일부터는 살아있지 않다. 참사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고통 속에 갇혀있다.

 

예은이는 어떤 딸이었나.

  그냥 내 딸이다. 어떤 딸이었냐 따지기 전에 그냥 내 딸이다. 내 목숨보다도 귀한 내 딸. 그것뿐이다. 가수가 되는 것이 예은이의 꿈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에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한테 예쁜 모습을 남겨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프로필 사진을 포함해서 예은이 사진이 핸드폰에 잔뜩 있다. 그런데 안 본다. 못 보겠다.

 

사고 이후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가.

  아내는 지금 광화문 광장에 같이 나와 있다. 나보다 더 힘들거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엄마니까.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니까. 그 고통을 가늠할 수도 없다. 예은이한테 쌍둥이 언니가 있다. 우리 하은이(쌍둥이 언니)는 말로 표현은 잘 하지 않아도 엄마 아빠보다도 더 많이 힘들거다. 쌍둥이는 항상 티격태격 한다. 그러다가도 가장 친한 친구처럼 서로를 의지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함께 있었으니 세상 누구보다도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1년이 지났지만 하은이는 아직 적응을 잘 못하는 것 같다. 새벽마다 운다. 보고싶다고. 나도 아내도 같이 운다.

 

하은이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하은이가 부쩍 더 열심히 공부하고, 매사에 열심이다. 표현하지 않아도 아빠 눈에는 마음이 다 보인다. ‘예은이 몫까지 해야지, 예은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언니가 돼야지하는 다짐이. 그렇게라도 집중하면 그 시간동안 동생 예은이를, 아픈 기억을 잊을 수 있으니까. 1년간 스스로 이겨내기 위해서 무던히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대견하고, 고맙다.

 

세월호 이후 1, 언제 가장 힘들었나?

  지난 1년간 많은 일이 있었다.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게 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이를 찾으려고 팽목항에서 진도앞 바다에서 헤맸던 일들, 그때 목격했던 말도 안되는 일들, 예은이를 다시 찾았을 때 그 얼굴, 차가운 손의 감촉도 다 생생하다. 돌아와서 미안한 아빠지만 부끄러운 아빠는 되지 말자고 다짐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내자고 달려들었을 때 그 다짐은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특별법 만드는 과정에서 단식하고 농성하고 도보행진 하고 별 짓을 다 했는데 그 과정도 다 기억이 난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무엇을 했고, 무슨 어려움이 있었고, 무엇 때문에 울었고. 그런데 아쉬운 건 이 1년이란 시간동안 숱하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어느 하나도 우리를 웃게 해준 일이 없다. 우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준 일은 없었다. 언제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 할 수가 없다. 매일같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니까. 오늘도 마찬가지고.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의 항의는 어떻게 해결되었나?

  해결이 된 건 없다.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지금 이렇게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자리를 잡았는데 내려올 이유가 있나. 우리는 농성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 면담 요청을 하고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농성을 할 계획이었다. 전혀 납득되지 않는 이유로 막히게 되면서 청운동까지 가게 됐고, 12일간 농성을 하다 내려왔다. 해결이 된 게 아니고 자진해서 내려온 것이다.

 

아직 아홉 분의 실종자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선체 인양도 아직 되지 않았다.

  선체 인양에 대한 국민의 여론은 여전히 관심이 많다. 어제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62%의 국민이 비용에 관계없이 선체 인양을 해야 한다고 뜻을 보여주셨다. 이건 정말 놀라운 수치다. 정부나 여당은 세월호 인양에 대한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가능한 한 인양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려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가 넘는 국민들이 인양을 지지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시신일지언정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서 가족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다. 그것을 미루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의 정부이기를 부정하는 것 밖에 안된다.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비용도 정부에서 주장하는 것만큼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세월호 인양을 통해 아홉 분의 실종자들이 하루 속히 가족분들의 품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호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책임지는 안전한 사회 건설. 이것이 세월호 특별법의 목적이다. 이번에 세월호 선체를 인양하고, 아홉 분의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를 정상적으로 풀어가면 정부에 대한 신뢰, 안전에 대한 믿음이 쌓일 것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정부에서 왜 놓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부는 왜 선체 인양을 하지 않는다고 보는가?

  단정적으로 말을 할 수 없다. 여태까지 정부는 인양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물론 인양을 하겠다는 말을 한 적도 없다. 그러니 왜 인양을 안 하는지 거기에 대해 뭐라 이야기 할 뚜렷한 근거가 없다. 그냥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다. 인양을 할 경우에 무언가 이 정부에 부담이 되는 거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세계 경제10대국인 대한민국에서 세월호 한 척 인양하지 못한다는 것은 납득이 되질 않는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4월 2일 삭발식에 앞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광화문 농성장에 시민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세월호가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다. 얼마 전 여론조사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관심도를 물어봤을 때 관심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70%가 넘었다. 참사 직후에 거리로 광장으로 나와주셨던 뜨거운 행동으로 보여준 열기는 식었다고 볼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국민이 1년 내내 거리로 나올 수 있나? 더 중요한 건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을 국민들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국민들을 만날 때마다 느낀다. 관심이 식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변화했을 뿐이다. 1주기를 앞두고 국민들이 저희에게 보여준 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까지 돕겠다고 성원해준다.

  참사 이후 안전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는데, 세월호 사고이후 대한민국이 안전해졌다고 생각하느냐는 여론조사에 80%가 넘는 사람들이 안전해지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안전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겪고 나서 안전 문제를 여실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새정치 민주연합을 비롯한 야당에 대해.

  새정치 민주연합은 사실 1년간 노력 많이 했다.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의 편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항상 애를 써준 의원들도 많다. 문제는 항상 아쉬운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정치 구조에서 야당의 현실적 어려움을 부정할 순 없지만, 너무 쉽게 타협해주고 양보해준 것 같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못하는 모습이 아쉽다. 협상의 한계를 너무 쉽게 인정하는 것 같다.

  정의당의 경우에는 워낙 소수 정당이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그 정도의 소수 정당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본다. 특히 세월호 사고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서 배제됐기 때문에 정의당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적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애쓴 분들께는 감사하다.

 

새누리당에 대해 묻겠다.

  새누리당에도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의원들이 있다. 야당보다 그 비율이 낮지만. 새누리당의 경우에는 당차원에서의 결집력, 결정된 사항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좋다. 문제는 그 방향이 우리 가족들의 생각과 정반대 방향이라는 점에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런 모습들이 피해자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세월호 사고를 단순 교통사고로 표현하고, 피해자 가족들이 정치투쟁을 하는 것처럼 몰아간다. 국민을 편가른다. 정부여당에 우호적이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여당이 결정해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 아쉬운 건 우리니까.

 

팽목항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 중인 이호진씨 부녀의 근황이 궁금하다.

  직접 연락한 지는 꽤 됐고, 다른 가족들을 통해 소식은 전해 듣고 있다. 근황이야 뻔하다. 도보행진을 해본 사람의 입장에서 그 고통이 눈앞에 선하다. 더욱이 삼보일배 도보행진을 하는데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중단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으면 좋겠다. 지금 속도로 하면 올 가을이나 돼야 도착한다. 같은 가족의 입장으로 가족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향후 계획을 말해달라.

  지금 당장은 416시간 집중 행동 농성을 하고 있다. 목적은 두 가지다. 우선 말도 안 되는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이 전면 폐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폐기만이 목표다. 두 번째로는 정부가 세월호를 인양하겠다는 입장을 1주기 이전에 밝히는 것이다. 진상조사 된 것도 없는데 최소한 그 약속은 받고 1주기를 맞아야하지 않겠나.

 

어떤 문제가 해결 돼야 집에 돌아갈 수 있나?

  난 돌아갈 집이 없다. 내 집에는 예은이가 있어야 한다. 예은이가 없는 집은 건물일 뿐이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좀 덜 미안한 엄마 아빠가 되어 예은이를 만나러 가는 것이 목표다.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예은이한테 갈 수 있는 것. 지금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 왜 예은이가, 우리 아이들이 거기서 죽어야했는지. 그 진실을 밝혀야 예은이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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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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