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405건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그것이 알고싶다는 매 회 우리 사회의 충격적인 민낯을 보여준다. 지난 28일 방송된 '소년 잔혹사 - 그 여름, 18년 만의 고백' 편 역시 충격적이었다. 18년 전 여름, 피해자 김건우(가명, 당시 15세)는 아이비리그 대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하던 전도사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됐다. 공부를 도와준다는 목적이었다. 명문대 대학원생에, 교회 전도사라는 타이틀 덕분에 가족들은 너무 쉽게 그를 믿었다. 15세 소년은 그 집에서 전도사를 포함 전도사의 동생, 또 다른 가해자 등 세명으로부터 체벌을 빙자한 '고문'을 당했다. 전도사로부터는 성폭행까지 당했다. 당시 가족들이 미국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전도사는 이미 런던으로 출국한 이후였다. 전도사의 동생은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단 한명 기소되었던 가해자는 보석금을 내고 나온 뒤 한국으로 도주, 기소중지 상태다. 전도사는 현재 한국에서 버젓이 목회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 직후 네티즌들에 의해 가해자가 오창 성산순복음 교회 오베드로 목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한미간 범죄인 인도조약이 맺어져 있으므로, 한국 법무부의 의지가 있다면 오 목사는 미국으로 송환돼 법적인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다. (미 백악관 서명 : 오베드로 목사는 아니고, 보석금 내고 한국으로 도망친 공범 안재필씨 송환을 위해 6월 30일까지 10만명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클릭하시면 바로 링크된 주소로 이동합니다. 이름과 메일 주소 적으시고, 메일 컨펌 하셔야 완료 됩니다)




  소위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나는 많은 목회자를 만났다. 존경할 만한 인격을 지닌 목회자도 여럿 만났고, 다수의 목회자는 존경까지는 몰라도 좋아할 만한 사람이었다. 한 명의 미친 목사 때문에 전체 목사를 욕하지 말라는 소리를 하려는 거냐고?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존경을 넘어 추앙하고, 신의 위치에 목사를 놓은 교인들에 관해서다.


  목사가 밥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수년 전 부모님이 다니는 교회에 부임한 목사가 식사비를 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수십년 신앙생활 중 그런 경험이 처음이란다. 밥 한끼 사는 것이 대단한 일화처럼 회자될 만큼 목사들은 대접을 받는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마태복음 20: 28)"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공허할 뿐이다.


  목사는 평신도보다 우월한 존재인가? 어릴 적 목사가 직업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교회 형들과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월급을 받아서 생활하는데 직업이 아니라면 뭔지 따져 물었다. 당시 형들의 사고 체계에서 목사는 천한 노동자, 월급쟁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기억이다. 단적으로 목사들의 월급은 사례비란 이름으로 지급된다. 또한 목사님이 아닌 목사라고 부르는 것은 불경하다는 의식이 지배적인 것을 볼 때, 교회 공동체 내에 목사가 우월한 존재라는 편견이 만연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종교 공동체의 리더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맹목적인 신뢰로 이어졌을 경우 일어나는 부작용들을 우리는 수차례 목격해왔다. "빤스 내려라 해서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내 성도가 아니다"라는 주옥같은 명언을 남기신 불세출의 빤스 전광훈 목사, 성추행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전병욱 목사 뿐만 아니다. 큰 목사님 얘기는 잘못 했다간 명예훼손으로 고발 당할 수도 있으니 패스. 무튼 목사와 관련된 내연녀, 돈문제와 관련된 스캔들은 계속 터져나오고 있다. 뉴스에 나오지 않은 분들은 괜찮은가? (여자 문제 불거져 사임할 뻔 한 임OO목사님 미국 가셨다면서요? 잘 지내시나요? 그러게 디카로 여자 알몸 사진은 왜 찍으셨어요?)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가 터졌을 때, 교계나 기독교인들의 제식구 감싸기식 행태다. 사탄의 시험에 빠졌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단골 레파토리. 그럼 불륜 관계를 가진 여성이 사탄이냐? 목사의 부정과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 언론사 앞으로 달려가기 일쑤.("조목사 관련 PD수첩 방영 말라"...목회자·성도 등 1000여명 MBC 사옥 앞서 시위)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면 세상의 핍박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며 달려든다. 우여곡절 끝에 노회 재판에 회부되어도 솜방망이 징계에 그친다.('성추행 논란'전병욱 목사 판결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겼다) 이들 덕분에 빤스 전광훈 목사 아무 문제 없이 목회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전병욱 목사는 삼일교회에서 사과하고 사임했지만, 1년 6개월 만에 홍대 새교회를 개척해서 잘 살고 있다.


  목사도 인간이다. 그들이 인간으로 살 수있게 돕자. 죄를 지으면 합당한 벌을 받고, 월급을 받으면 세금도 낼 수 있게.


  ps. 오베드로 목사님, 설교를 잘하신다는데 유튜브에서 삭제되고 있대서 안타깝네요. 꼭 들어보고 싶었는데... 설교 못 듣는 아쉬움에 설교 좀 할게요. 방송이 나간 이후에도 강단에 서셨다면서요? 암요, 그러셔야죠. 홈페이지 닫으셨더라구요. 그런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않을 거에요. 얼굴이 팔려서 한국에서 살기 힘드실 거에요. 미국 이민 추천 드려요. 가서 처벌 받고, 피해자분께 사과하고 그렇게 죗값을 치룹시다. 하나님께만 무릎꿇고 회개기도 하지 말고, 피해자분께 꼭 회개하세요.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SNS나 언론 보도를 보면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듯하.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된 점, 체포 직후 피의자 김모씨의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라는 진술을 바탕으로 이 사건은 처음부터 여성혐오 범죄로 다뤄졌다. 김씨가 2년 전부터 '여성이 나를 견제하고 괴롭힌다'는 피해망상 증세를 보여왔다는 사실도 여성혐오 범죄라고 확증하는 듯 보였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여자라서 죽은' 피해자에 대한 애도의 메세지가 이어졌다. 여성들은 SNS상에 여성이라 받아왔던 차별과 폭력의 경험과 범죄에 대한 공포에 대해 털어놓았다.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비토는 가해자인 남성을 향했다.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힌 남성은 그에대한 불쾌감을 드러내 성대결 구도로 흘러가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언론은 이런 갈등을 오히려 부추기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식으로 강남역 묻지마 사건이 성대결의 프레임으로 소비되는 것은 바람직한가? 필자는 성대결의 프레임에 갇혀 오히려 사건의 본질은 사라지고 있는건 아닌가 걱정된다.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의 경우 그 대상이 여성인 경우가 많다. 4대 강력범죄 피해자의 87%가 여성이라는 통계도 있다. 하지만 이를 여성혐오의 결과로 해석하기 보다는 범행의 용이성과 관계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유영철의 경우도 범행 대상이 노인이거나 여성이었다. 자신의 비정상적인 욕구를 충족하는데 쉬운 대상이 상대적 약자인 노인 또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범행 후 자신의 여성에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곧이 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아들러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여성을 혐오해서 여성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기보단 여성에대한 범죄를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여성 혐오를 키웠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너무 성급하게 단정짓지는 않았나 돌아볼 때다. '여성혐오'라는 자극적인 단어로 도배하는 사이 이번 사건의 본질은 사라지고, 살펴봐야하는 문제는 놓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조현병을 앓고 있는 개인을 제대로 치료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들의 말에 따르면 약만 제때 먹어도 조현병은 많이 호전된다고 한다. 불행히도 피의자 김모씨는 최근 두달간 정신분열증 약을 먹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증 조현병 환자들에 대한 파악과 관리체계가 있었다면 이런 불행을 막을 수 있진 않았을까?


  언론들은 계속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점에 집착한다. 소위 팔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클릭질을 유도하기 위해 더욱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쏟아 내는지도 모른다. 일부 남혐주의자들은 이를 자신의 남혐에 대한 포장지로 활용한다. 하지만 진짜 물어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폭력성이 왜 이렇게 증폭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사회가 왜 더 각박해져 가는지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한다. 왜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노력하는데 우리 삶은 나아지지 않는지 따져야 한다. 분노와 피해의식이 가득한 사회에서 그 분노의 화살은 언제나 약자에게 향하기 때문이다.


p.s.

  이번 사건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여성분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인해 조현병 환자에 대한 편견이 깊어져서 차별당하는 분들이 없기를 바란다.

블로그 이미지

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전화를 건 것이 언제였을까. 회사를 그만둔 뒤 이어진 긴 백수 기간. 가끔 걸려오는 전화만 받아왔다. 아마 서른 둘 나이에 기생하고 있는 내 처지가 민망하기도 하고 죄송한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가끔 반찬을 보냈다며 전화를 한다. 아버지는 용돈을 보냈다고.


  전화벨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아침까지 잠을 못 이루다 겨우 잠들었기에 피곤했다. 그 이후로도 두 통의 부재중 전화가 더 와있었다.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섰다. 성곽길을 걸어내려가다 아직 피지 않은, 하지만 벌써 붉은 홍매화 봉오리를 보다 생각이 나 전화를 했다. 도서관에서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았다고 둘러댔다. 아버지는 집에 내려와서 아버지 공장 일을 도울 생각은 없냐고 하신다. 당장 취업을 해서 받을 돈 보다 더 많은 월급을 주겠다고.


  아버지는 평생을 기름밥을 드셨다. 어렸을 적엔 가끔 아버지 공장에 가서 기름때 절은 기계를 닦고 용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자기 일에 프라이드가 강한 분이었지만, 내가 가업을 잇길 누구보다 반대했다. 아버지 주위엔 일을 배우는 자식들이 제법 있었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혀를 찼다. 내겐 기름밥 먹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사향산업이 되어버린 탓도 크겠지만,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본인의 시대에서 끝내길, 자식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길 바라셨던 것 같다.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좋아했던, 재능 없음을 탓하며 소설 한 문단을 써내지 않아도 끝내 믿어주던 아버지였다. 부끄러운 첫 직장에서 누구도 읽지 않는 짜깁기 기사를 쏟아낼 때 회원가입을 하고 댓글을 달아주었던, 두 번째 직장에서 나름대로 보람된 기사를 쓰던 땐 문자를 보내 눈물이 난다’ ‘대기자가 될 것 같다며 응원해주던 아버지가, 그만하자고 하신다. 내려오지 않으면 아르바이트를 하든 알아서 생계를 꾸리라고 하신다. 평소 사랑한다, 믿는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으셨다.


  안다,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란 걸.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란 걸. 아버지 성정 상 독립하라는 말을 모질게 하고 미안했을 것이다. 자신이 더 부유하지 않음을 자책하셨을 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사랑한단 말을 하셨더라면 끝내 울음을 감추지 못하셨을 분이란 걸, 안다.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서울지방경찰청이 내 통신자료를 훔쳐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딱 7일이 지났다. 나는 수사기관의 정보수집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수사기관이 필요한 정보를 요청할 수 있지만, 최소한의 법적 제한을 둬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수사기관이 개인 정보에 접근할 때에는 영장이든 어떤 형태든 다른 기관이 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사 종료 후에는 개인정보에 접근한 사실을 알리고, 그 사유 또한 밝혀야 한다. 수사 종료 후 개인정보의 처리에 관해서도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현재 우리 제도는 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영장이 없이 개인 정보를 요청하면 이동통신사는 조건 없이 내어준다. 이 과정의 편의 때문에 수사기관은 무차별적으로 정보를 수집한다. 이런 행정 편의주의만 수정해도 1년에 1000만여 건에나 달하는 정보조회는 줄어들 것이다. 게다가 정보 조회 사실을 알려주지 않기에 따로 확인하지 않는 한 그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 테러방지법 반대를 위한 필리버스터 중에 논란이 일지 않았다면 대부분 확인하지 않고 넘어갔을 일이다. 정보조회 사실을 알아낸다 하더라도 이유조차 들을 수 없다.


  나도 이동통신사와 서울지방경찰청에 수차례 전화했지만 핑퐁게임 속에 그 답을 듣지 못했다. ([통신자료 제공사실 확인](2)엿본건 사실이지만 이유는 묻지마) 현재는 자료제공 요청서 정보공개를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답답한 마음에 나름대로 이유를 추정해보기도 했다. 나는 정답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통신자료 제공사실 확인]경찰이 내 통신자료를 엿본 이유(추정)) 그래도 그 이유를 꼭 들어야겠다. 그리고 현행의 수사관행이 바뀔 때까지 계속 문제를 제기할 생각이다.


  어제는 오픈넷을 통해 한겨레 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은 오픈넷에서 통신자료 제공과 관련된 공익소송을 진행한다고 해서 참여하기로 했다. 승소할 가능성은 낮다고 하지만. 끝까지 물어주마.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기레기는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수준 낮은 어뷰징 기사, 짜깁기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들을 통칭한다. 더 나아가 기본적인 팩트 체크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취재기자들도 기레기라 불리기도 한다. 심지어 기사의 정확성과 상관없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기자를 조롱하는 언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나는 전직 기레기다. 어뷰징은 하지 않았다. 어뷰징을 할 만큼 큰 언론사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취재도 하지 않았다. 기레기로 일하던 6개월간 취재 건수는 단 세 . 그나마도 전화 통화로 팩트 체크한 것이 한 번, 기사는 쓰지 않고 취재 연습차 한 번, 선배 취재에 동행 한 것이 한 번.


  내가 담당한 일은 여러 언론사 기사들을 짜깁기해 새로워 보이는 위클리 기사를 생산하는 일, 연합뉴스를 긁어 문장을 조금 손봐 데일리 기사를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일이었다. 또 한가지, 선배 기사를 고치는 일도 종종했다. 선배는 기사를 쓰고 나면 내게 문장 확인을 부탁했다. 기본적인 문장력이 되지 않았던 선배는 부장에게 혼나는 것이 일상이었고, 내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사전 검열을 부탁한 것이다. 큰 틀에서 세 가지 다 교정 교열이라고 할 수 있으니,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한 셈이다.


  이 글은 기레기가 창궐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전직 기레기의 경험을 통해 기레기는 무엇을 먹고 사는지 확인하고, 기레기를 욕하는 우리가 먹이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려고 한다.




 

소형 보수신문의 먹거리


  20139, 대학교를 수료한 상태에서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으로부터 취업 자리를 소개받았다. 아마 제 앞가림하기 힘들어 보이는 제자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셨을 것이다. 학과 선배가 광고영업을 하고 있는 신문사라는 간단한 설명만 듣고 이력서를 넣었다. 그렇게 면접 날짜가 잡혔고, 사무실에 들어간 순간 몸이 굳었다. 어쩌면 건물 앞에 서 있는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상을 보고 발길을 돌렸어야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신 나는 사진을 찍어 조롱 섞인 문자를 친구에게 보냈던 것 같다.


  사무실에 쌓인 신문 1면 제목이 무려 좌빨 본색’. 내란음모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을 쓰고 수감되는 이석기 전의원의 일그러진 표정이 내 얼굴 위로 겹쳐졌는지도 모르겠다. 빨갱이 소굴이라고 오해받는 학과의 학생회장을 하며 학내 투쟁을 지휘하기도, 대규모 집회에 참가하기도 하며 교류하던 소위 운동권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소설 빨치산의 딸로 알려진 선생이 내게 이 회사를 소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 사회생활을 이런 곳에서 시작해도 되는가따위의 고민을 하는 통에 면접에선 한문으로 내 이름을 쓰라는 간단한 문제에도 답하지 못했다.


  면접을 마치고 나온 내게 선배는 이념같은 건 신경 쓰지 말자고 했다. 선생은 회사에 다니며 소설 쓸 생각이나 하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기레기가 됐다.


  출근을 하면 연합뉴스에서 기사를 받아(후불 계약을 했으나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으니 갈취해가 더 적확한 표현) 개작한 후 회사 홈페이지에 올렸다. 어뷰징을 위한 복붙은 하지 않았다. 어뷰징도 어느 정도 규모(포털에 등록된 업체)는 되야 한다.


  기자들은 기사 클릭 수를 확인 할 수 있다. 이 회사의 기사 클릭 건수는 두 자리를 넘었던 기억이 잘 없다. 그나마도 기사를 올리고 확인할 때마다 카운트가 되고, 발행인이 확인하고, 회사에서 내세우는 기사의 경우에는 기자가 F5 버튼을 눌러 세자리 수를 만드는 정도다. 외부인들은 아들이 살아 있는지 궁금한 내 아버지 외엔 아무도 안 들어온다고 보는게 맞을 거다. 기본적으로 인건비, 사무실 운영비, 인쇄비를 벌어야 신문사를 운영할 수 있다. 이 신문의 판매가는 1000, 매주 2만부 정도를 찍어냈지만 시중에서 이 신문을 사봤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온라인 광고 수입조차 올리지 않는 이 신문사는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1. 폐지 값

  반은 농담이다. 아니, 반만 농담이다. 지난 신문들이 창고에 가득 있었다. 찍어낸 순간부터 폐지 이외의 효용가치가 없는 이 신문이 문자 그대로 폐지가 되어 쌓여있는 것이다. 회사가 문 닫기 전, 창고에서 이 폐지들을 꺼내 차에 싣는다고 땀 흘려 일했다. 그 날이 내가 이 회사에서 한 일 중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고, 회사가 유일하게 정직하게 돈을 번 날이었다. 그날 번 돈으로 우린 퇴직 회식을 했다.

 

2. 지면 광고

  거대 언론사들이 하는 짓거리를 어설프게 따라한다. 기업을 까는 기사, 빠는 기사, 기사로 위장한 광고까지. 하지만 취재력이 메이저 언론사에 나온 뉴스를 베끼는 수준이기에, 광고 수입이라는 게 떼쓰는 아이 사탕 주는 정도일 수밖에 없다.


  기억나는 일이 있다. 한 번은 경기도 모 대학교 총장의 추문에 대해 기사가 나간 적이 있다. 한 여성이 젊은 시절 총장에게 성적 학대와 폭행을 당했다며 주장했고, 1인 시위를 하는 현장에 취재를 나가는 선배를 따라 나갔다. 나와는 다르게 선배들은 매주 취재를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선배의 취재란 것도 별다를 것이 없었다. 여성이 온라인에서 주장한 것을 육성으로 들었고, 크로스 체크 같은 건 없었다.


  기사가 나가고 대학교 측에서 연락이 왔다. 기사를 내려주는 조건으로 광고를 고려해보겠다는 전화였나 보다. 국장의 지시에 따라 기사를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장이 누가 기사 내렸냐며 소리를 질렀다.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인데 좀 달리 보였다. “광고비 입금도 되기 전에 기사 내려버리면 뭐가 되냐는 말을 듣기 전까지 잠시. 무튼 선배는 특종비 명목으로 소정의 상금을 받았고, 회사는 광고를 받지 못했다.

 

3. 연맹의 후원

  내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사실상 유일한 이유는 연맹이란 단체 덕분이었다. 관변단체 중 하나인 연맹은 회사 설립에 제법 큰 돈을 출자했다. 사무실 역시 연맹에서 빌렸는데, 임대료를 냈는지는 모르겠다. 2만부의 폐지는 전국의 연맹 지부로 뿌려졌다. 어떤 사람들이 몇 부나 읽었는지, 폐지를 팔아 회식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안타까운 점은 이 연맹이란 단체에 국가보조금이란 이름으로 막대한 세금이 지원된다는 점이다. 횡령 등의 비리 문제가 끊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회사가 반쯤 문을 닫고 전 직원이 퇴직을 하게 된 것도 연맹의 지원이 중단 되면서부터였는데, 길고 긴 무직자 생활이 시작됐지만 자연보호의 측면에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매주 발행되는 폐지란 참. 현재 이 회사는 이름을 바꾸고 2~3개월에 한 번 신문을 발행한다. 연맹에 필요한 이슈가 터지는 경우에 발행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소형 진보언론의 먹거리


  퇴직을 하니 홀가분했다. 당시 대표가 새로운 신문을 창간한다며 일자리를 제안해왔다. 수개월 옆에서 봐온 입장에서 전혀 공정하지 않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의 신문사였다. 한 번 선택은 실수라고 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선택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망하지 않은 것을 보니 제안을 받았으면 아마 나는 계속 기레기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실업수당을 받으며 연명할 수 있었기에 거절했다. 일자리가 그리 없을 줄을, 실업수당이 아닌 부모님 등골을 빼먹으며 연명할 줄을 그때는 몰랐다.


  201312월 조그마한 신문사의 면접을 봤다. 진보적 논조의 소규모 언론사였다. 멋들어진 홈페이지는 아니었지만 정치·사회보다 노동·인권, 통일, 참살이 등의 카테고리가 전면에 배치된 점이 인상적이었다. 사무실은 홈페이지보다 더 초라했다. 석유 곤로 위에 놓은 양은 냄비에서 물이 끓고 있었다. 석유 곤로 때문인지 벽지는 누렇게 변색 되었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면접을 봤던 국장의 인상이 좋았다. 언론인으로의 곤조가 말투와 얼굴에 배어있었다. 사무실에 국장 외에 편집기자 한 명 밖에 없었는데, 다른 기자들은 어디 있냐는 질문에 국장은 기자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은 건 무려 4개월이 지난 후였다. 조금 이상했지만 기뻤다. 언론사가 아닌 회사에 더 나은 조건으로 입사가 거의 결정된 상황이었지만, 이 조그마한 언론사를 선택한 것은 아마 과잉수정 오류였을 것이다. 기레기였던 지난날에 대한 참회의 마음도 조금 있었다. 1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기레기가 아니었다. 매주 1천부 정도의 신문을 발행했지만 무가지였다. 그렇다면 이 회사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1. 후원

  하루는 국장이 취재 나가기 전에 점심이나 먹고 나가라고 했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점심시간 전에 기사 마감을 하고 취재를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식대로 10만원을 받았는데, 한 달치일 거라고 당시엔 생각도 못했다. 취재를 나갈 때면 국장은 밥은 꼭 맛있는 걸 사먹어야 한다. 건강해야 일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한 달에 취재나가는 24일 점심 저녁을 괜찮은 음식을 사먹기에 10만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반주를 한잔 하고 알딸딸해진 국장은 내가 후원 계좌를 열면 1억 모으는 건 일도 아니다라고 허세 가득한 말을 했다. “후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런데 손 벌리기 싫어서 안한다따위의 이야기를 늘어놨다. 하지만 나는 후원계좌를 여는 일을 보지 못하고 퇴사했다.

 

2. 광고

  광고 가격까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광고 수입을 통해 내 월급이 입금 된 것은 확실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외에 수입이 떠오르지 않는다. 10년간 직원들 월급 밀린 적이 없다니 분명 적자는 아닐 텐데. 그렇다고 광고지면이 많은 것도 아니라 아직도 신기할 따름이다.

 

3. (혹은 보지 못한 선후배들)

  첫 날, 정장에 구두를 신고 출근했다. (그 전에는 취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보니 구두가 불편한 줄 몰랐다. 발이 퉁퉁 부어 다음날부터는 등산화만 신고 다녔다.) 탐방 기사를 써오란 지시를 받고 취재를 나갔다. 지시 사항은 딱 한 가지, ‘이화동 벽화마을’. 사진기자는커녕 사진기, 노트북 하나 지급되는 것이 없어 형에게 빌린 DSLR15인치 노트북을 들고 취재를 다녔다. 회사에 있는 데스크탑은 윈도우 xp가 버거워 보였고, 요즘은 찾기도 힘든 CRT 모니터가 연결돼 있었다. 불편해도 개인물품으로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취재를 하고 돌아와서 기사를 작성하는데 이상하다. 편집기자와 국장 외에 선배 기자들이 없다. 알고 보니 우리 회사에 소속된 취재기자는 나 혼자였다. 이후 나는 필명을 하나 만들었다. 너무 많은 기사가 내 이름으로 올라가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내 기사 외에 나머지는 국장의 인맥으로 받는 외고 기사들이었다. (그들도 필명으로 활동했다.) 퇴직 후에 내게도 외고를 쓰라고 연락한 것을 보면 아마 퇴직한 (일면식 없는) 선배들이 용돈 벌이를 하는 모양이다.


  일 자체에는 자부심을 느꼈다. 한달 동안 100여개의 기사를 작성했는데, 단 하나도 남의 글을 베껴 쓰지 않았다. 거의 매일 광화문에 나가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참여연대·환경운동 연합의 활동가를 만나고, 민노총·전교조 소속 조합원을 인터뷰 하며 메이저 언론에서 깊이 다루지 않는 이야기를 기사로 써냈다. 매주 수요집회에 나갔고, 동자동 쪽방촌을 찾아 소외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회의를 느낀 건 4.24 총파업 결의대회를 취재하면서였다. 최저임금 1만원 시대의 구호가 내게 와닿지 않았다. 오전 8시 반에 출근해서 전날 취재한 메인기사(A4 4~6장 분량)를 마감하고 집회 현장 취재하러 출발, 스케치 기사 (1) 마감, 이후엔 또 다음날 메인 기사 인터뷰. 8시 퇴근은 기본에 일정이 맞지 않은 경우 12시 퇴근. 광화문 스케치 기사 (1) 마감 하고 인터뷰 녹취록 작성. 그나마도 주말 중 하루는 취재, 하루는 기사 마감.


  식비로 10만원을 지급 받았을 뿐 교통비, 전화비 등 기본적인 취재비용도 모두 120만원이라는 알량한 월급에 포함돼 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 속도가 늦다며 “1장짜리 기사는 5~10분이면 써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국장 입장에서는 내 탓이겠지만, 계산을 해보니 최저임금이 되지 않았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정신승리를 하려는데 내 자신이 역겹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들의 노동은 가치가 없어서 돈이라도 받아야 하는 건가?


  고민을 하던 중 월급을 받았다. 현금으로. 그래도 무려 1년을 놀고 나서 번 돈이라 그런지 노동 의욕이 샘솟는 듯 했다. 우편함에 꽂힌 익숙한 봉투 하나를 보기 전까지. 건강보험 지로용지였다. 찾아보니 수습 혹은 인턴의 경우에도 4대 보험 가입은 법적 의무였다. 돌아보니 정신없이 취재하고 기사 작성을 하던 나는 정작 중요한 근로 계약서 한 장 작성한 적이 없었다. 다음날 출근해 지급받았던 사무실 열쇠를 책상에 놓고 나왔다.


  회사는 양심 있는 언론인 척 하며 기자의 노동력을 먹고 있었다. 난 기레기가 되지 않는 대신 먹이가 된 것이다. 어쩌면 면접 이후 출근까지 4개월 동안 누군가 먹이 역할을 하다 그만뒀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만둔 이후 누군가도 그러겠지. 요즘처럼 대졸 무직자들이 넘치는 세상은 커다란 뷔페일 테니. 수구 언론사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계속 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3개월으로 정했던 수습기간을 줄여준다는 언질을 받기도 했으니. 홈페이지 전면에 내세운 노동·인권이라는 카테고리를 보며 든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전문지는 무엇을 먹고 사나?


  전문지에서 근무한 경험은 없다. 면접을 한 번 봤을 뿐이다. 이달 초에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구직사이트에 올려놓은 이력서를 보고 연락했다며, 면접을 보자고 했다. 전문지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락 온 전문지가 다루는 영역은 신문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뚱맞은 곳이라 고사할 마음이었다. 하지만 오랜 무직 생활에 지쳐 조건이라도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업계 1위라는 대표의 말에 신빙성이 느껴질 정도로 신문은 광고로 가득했다. 24면의 주간 신문의 12면이 광고였으니. 이건 광고지야 신문이야 싶었다. 대표의 첫 질문은 광고 영업 할 생각은 없어요?”였다. 기억나는 또 하나의 질문은 희망연봉을 조금 낮추면 안되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경력 5년은 돼야 맞춰 줄 수 있을 것 같은데였다. 참고로 희망연봉은 2200이었다. 네고는 불가하단 말에 대표는 광고 영업 할 생각은 없어요?” 또 물었다. 아마 광고 영업을 하면 그 값을 맞춰 줄 수 있는가 싶다. 역시 신문에서 기사보다 광고가 중요한 세상이다.

 

기레기는 왜 양산되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아무도 기사를 사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사를 생산하는 사람들이다. 기사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진보 보수를 가르지 않고 누구도 기사를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 기업을 까거나 빠는 기사를 쓰고 그 신문을 들고 기업들을 돌아다니며 광고 영업을 한다. 한 번의 클릭을 더 유도하기 위해 자극적인 기사를 쓴다.


  언론사들이 어뷰징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적은 비용을 들여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양질의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기레기를 욕하는 그대들에게 묻고 싶다. 양질의 기사를 소비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돈을 소비하느냐고. 자전거를 받기 위해, 현금 몇 만원을 받기 위해 조중동을 소비하던 천박함이, 인터넷의 발달 이후로 기사는 공짜라는 인식으로 치환되어 기사보다 광고가 우선인 기레기들을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 더 나은 언론 환경을 원한다면 기사를 사주길, 후원해주길 당부한다.


  두 번째로 우리 의식 수준을 돌이켜보자. 유명 연예인 비키니, . 이런 제목을 보면 나도 모르게 클릭하고 있진 않은가? 블로그를 운영하다 보면 유입 로그를 확인하게 된다. 424 총파업과 관련해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인터뷰 글을 올린적이 있다. 민중총궐기 이후로 한상균 위원장 관련해 유입 수가 증가했다. 그런데 들어오는 유입 키워드를 보면 한상균 월급’, ‘한상균 자식따위가 많다. 엄마부대봉사단 주옥순 대표의 블로그 탐방기에는 주옥순 자식따위의 키워드로 유입된다. 왜 민주노총이 파업을 했는지, 주옥순 씨의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보다 신상 털이식의 개인 정보에 관심이 많은 듯 보인다. 국민은 그들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진다고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수준이 올라가지 않으면 언론의 수준도 올라가지 않는다.


  기레기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레기라고 욕하고 조롱하고 넘어가는 것으로는 기레기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쓰레기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사와 기레기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자. 이에 앞서 어뷰징 기사를 클릭하지 말자. 먹이가 사라지면 기레기는 자멸할 것이다. 더 나아가 좋은 언론을, 기자를 키우길 원한다면 열심히 쓴 기사를 소비하는데 드는 돈을 아까워 하지 말자.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코드 악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빨래 - 이적 [코드 악보]  (0) 2016.03.24
Stay - 넬 [코드 악보]  (0) 2016.03.24
멀어지다 - 넬 [코드 악보]  (0) 2016.03.24
사랑 그놈 - 바비킴 [코드 악보]  (0) 2016.03.24
파랑새 - 바비킴 [코드 악보]  (0) 2016.03.24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