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월이다. 기억하기 괴로운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되어간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시간은 고장난 시계 같다. 사계절의 변화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지난한 싸움 끝에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반쪽짜리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나마도 제정됐다는 사실에 진상규명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시키는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이 입법예고 됐다. 유가족들이 416시간 집중농성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농성중인 광화문 세월호 광장의 풍경을 담아봤다.



  오후 다섯시 경의 광화문 광장, 4월이 되었다고 제법 봄 날씨 같다. 바람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도 이전처럼 외투를 단속하지 않는다. 교복을 입은 중고생들이 세종대왕상 앞에서 셀카봉을 들고 활짝 웃는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사진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의경들은 일사분란하게 이동한다. 그 분주한 사이에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부시행령 폐기하라”, “세월호 선체 인양하라”, “실종자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세요”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멈춰있다.


“시행령안을 폐기하라”

  세월호 유가족들은 지난달 30일 416시간 집중농성을 선언하고 항의행동에 나섰다. 다시 농성을 시작하게 된 배경은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의 입법예고. 유가족들은 “정부의 시행령안은 반쪽짜리나마 만들어진 세월호 특별법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시행령안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나섰다. 장완익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위원은 “특별법의 취지를 완전히 무시한 시행령안에 놀랐다. 법률가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기가 막힌 시행령안이다. 정부가 새로운 입법행위를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독립성 훼손과 위원회 조직 축소

  박주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시행령안은 여당 추천 상임위원인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무처장 밑에 기획조정실장과 또 기획총괄담당관을 편성, 파견 공무원이 맡게 한다. 진상규명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조사1과장 역시 파견된 공무원이 맡게 돼 있다. 정부로부터 파견된 공무원들이 여당이 추천한 사무처장을 보조케 해서 위원회 전체의 업무를 종합 조정하고 각 소위원회의 임무를 기획 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잠재적 조사 대상인 정부부처와 여당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위원회 조직 축소에 대해 “특별법에 따르면 120명 내의 직원을 둘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시행령안은 합리적 이유 없이 출범시 인원을 90명으로 한정했다. 비율 또한 파견 공무원이 다수를 차지한다. 특별조사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입장은 단호하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말도 안 되는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이 전면 폐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시행령안의 폐기를 요구했다. 


매주 수요일 7시,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을 기억하는 미사’가 열린다.


해가 저문 광화문 광장

  해가 지면서 관광객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엔 유가족들이 우두커니 남았다. 저녁 일곱시에는 한국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가 진행하는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을 기억하는 미사’가 열렸다. 지난해 12월 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시작된 이 미사는 세월호 광장으로 옮겨 매주 수요일 7시에 열리고 있다. 세월호 광장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시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그 시각 광화문 바로 앞, 유가족이 자리한 곳엔 촛불이 하나 둘씩 켜졌다. 유가족의 주위를 촛불이 둥글게 감싸 유가족들을 비추고 있다. 바닥에 세워뒀는데 바람이 불어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자세히 보니 다 마신 음료수병, 자양강장제병 따위가 촛불이 흔들리지 않게 받치고 있었다. 문득 이 장면이 바람직한 사회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뜻있는 사람들이 빛을 비추고, 그 빛이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모습.


세월호 유가족들의 주위를 촛불이 밝히고 있다.


  그 곳에서 성빈이 아빠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내 딸은 뭐든 잘 하는 아이였다.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럽지만 전교 1등 하는 딸이었다. 상장도 장학금도 많이 받았다. 판사나 외교관의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며 딸의 핸드폰에서 딸의 사진과 상장, 장학증서를 보여줬다. 눈에 그리움이 그렁그렁 맺혔다. 건강은 어떠냐고 묻자 “여기 몸 성한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런데 아플 수도 없다. 여기서 아파서 쓰러지면 안 된다. 아직 진상규명이 전혀 되지 않았고, 내 딸이 왜 그렇게 죽었는지 모르는데, 아프면 안 된다”고 다짐하듯 대답했다.


  사고 직후의 상황에 대해 “처음에 유족들은 사고 현장에 접근하지 못했다. 계속 못 가게 막았다. 해수부 장관에게 항의해서 해경 순시선을 타고 현장에 갔다. 현장에서 돌아오니 아내한테 연락이 왔다. 사망자 명단에 딸 이름이 올랐다고. 이후 병원에서 애들 신원 확인해주시던 단원고 선생으로부터 우리 딸이 아니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포 중앙병원으로 향했다. 내 딸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성빈이는 29일에 물에서 나왔다. 다른 아이들보다 빠른 편이었다”라던 성빈이 아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신 찾아가면서 나와 줘서 고맙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을 거다. 우리는 나왔으니까 다행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나온 것이 다행인 일인가 싶다”라고 어렵게 말을 이었다. “1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 물속에 있으니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은 오죽하겠나. 세월호 선체는 꼭 인양돼야 한다. 이런 기사나 좀 써라. 여기서 과거 얘기 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없다. 그 때 생각을 돌아보면 울화만 치밀고, 애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말을 끝으로 성빈이 아빠는 자리로 돌아갔다.


  유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동석했다. 유가족들은 자신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 누구의 엄마이고 아빠일 뿐이었다. 해가 저물고 나니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매트를 깔고 담요를 나눠 덮고 있어도 한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인터뷰를 중단한 것이 마음이 쓰였던지, 성빈 아빠는 가지고 있던 핫팩 하나를 건넸다.


  유가족들 사이에서는 삭발식이 화제다. 집행부를 포함해 최소 20명 이상이 삭발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한다.(실제로는 2차에 걸쳐 70여명이 삭발에 동참했다) “00이 엄마는 두상이 예쁘니까 꼭 해야겠다”, “머리숱 적은 00이 아빠는 하나 안하나 별 차이가 없다”등 서로 농담을 주고 받지만 그 속에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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