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시작

저자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지음
출판사
생각의길 | 2015-05-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노무현에 관한 첫 구술기록집 [노무현의 시작]1. 왜 [노무현의...
가격비교


 

인상깊은 구절

  1심 재판하면서 자주 만났기 때문에 그 정도 인간관계는 되고 형편도 뻔히 다 아는데 '부모님 형편도 어렵고 하니 죄송하지만 무료로 해주이소'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안 해주겠나? 뻔히 해줄 건데... 내 참 서운했다, 이렇게 얘기하시더라구요. 그러고 나서 일주일이나 지났나? 교도관이 변호사 선임계라는 것을 가지고 와서 방으로 쑥 들이밀더라고요. 변호사에 '노무현' 이렇게 돼 있데요.


  부림 사건의 재판 기간 동안 나는 그 청년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 성적도 우수하여 남보다 나은 자리가 보장된 사람들이 왜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마저 내팽개치고 자기 앞날을 스스로 망치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고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들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차츰 그들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고 자신과 가족, 부모 형제끼리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지 이웃의 고통이나 권력의 부정부패, 불의 따윈 모른 체하는 것이 상팔자라고 체념하고 살던 나의 삶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용 요약

  고졸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1977년 대전에서 판사로 법조 생활을 시작한 노무현은 이듬해 4월 사직하고 부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다. 평소 판사보다는 변호사일에 맞다고 생각했지만 부인이 좌익경력의 장인 때문에 판사 못했다는 눈총을 받을까 시작했던 판사였기에 8개월만 하고 그만두었다. 변호사 사무실 개업 초기부터 함께 일을 하며 노무현 변호사의 초기 시절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던 장원두씨는 그를 남들과 다른 변호사로 기억한다. 법원에 서류를 내면서 관례적으로 1000원을 내던 것이 부당하다고 그 돈을 못내게 한다. 또한, 당시 동료 변호사들은 품위가 떨어진다고 하지 않던 등기업무를 맡아서 하는 조금은 독특한 변호사였다.


  1981년 노무현은 조세 전문 변호사로 부산에서 이름을 날리며 아파트도 사고, 요트를 즐기고, 부모 형제들을 돌보며 살고 있었다. 출세하면 고생하며 사는 사람을 도와주리라던 어린시절의 다짐은 희미해져 갔다. 그러던 때 선배 변호사이던 김광일 변호사의 부탁으로 맡은 사건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된다. 바로 영화 변호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부림 사건'이다.


  부림 사건을 맡은 노무현 변호사는 좋은 대학에 입학, 성적도 우수하여 남보다 나은 자리가 보장된 사람들이 이런일을 해서 자신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변호하기 위해 만나서 이야기 하고 그들이 읽는 『전환시대의 논리』와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살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노무현 변호사는 이들을 위해 열심히 변론 하지만 전두환 독재정권 아래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던 재판부는 3년, 5년, 7년씩 무고한 학생들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했다.


  이후 노무현 변호사는 잘나가는 조세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변해간다. 돈 되는 사건은 점점 수임하지 않게 되었다. 그보다는 학생사건, 노동사건 등의 무료 변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요정이나 고급 술집에 발을 끊고, 좋아하던 요트도 정리했다. 노동 법률상담소를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무료 법률 상담과 노동법 강연을 했다. 1987년 6월항쟁 때는 제일 앞에서 진두지휘를 하며 세상을 바꾸기 위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사 개업을 했던 1978년부터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1987년까지 노무현 변호사의 삶에 대한 주변인들의 구술을 기록하였다. 구술기록의 특성상 구술자 개인의 주관과 감정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드러난다. 13명의 구술자가 각자 자기 관점에서 바라보고 서술했기에 그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 (문재인 변호사가 바라본 노무현이 어땠는지 이 책에는 실려있지 않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누구에게는 이제 막 노동문제와 사회문제에 눈을 뜬 햇병아리 변호사이고, 다른 누구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자 신과 같은 존재다. 그런 시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 노무현에 대해 이들 모두 한 목소리로 사람 냄새나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따스한 사람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가 그립다...


p.s.

  책 마지막에 노무현 대통령이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둔 때에 적은 <내가 걸어온 길>이라는 짧은 글이 실려있다. 정치 초년생 노무현의 마음이 잘 담겨있는 글이라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서 찾아보니 노무현 사료관에서 pdf 파일로 받을 수 있다. 찾기 귀찮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기를 누르면 다운 받을 수 있는 페이지로 이동시키니 꼭 한번 읽어 보길 권한다.

블로그 이미지

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낚시-유혹과몰입의기술

저자
전영태 지음
출판사
X생각의나무(주) | 2008-12-08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오랜 기다림을 통한 내적 치유의 세계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 욕망...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예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전영태 작가는 예수로부터 이어지는 사람 낚시꾼의 계보를 이어가는 듯 보인다. 그는 화려한 입담(속된 말로 이빨)으로 독자들을 낚고 있다. 낚시에 걸린 물고기는 낚시꾼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덥석 문 미끼와 입에 걸린 바늘만 알 뿐, 그저 자신을 낚은 낚시꾼을 상상해볼 따름이다. 나는 이 책에 낚인 한 마리의 물고기로 건방지게 낚시 기술이나 낚시꾼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단 그저 내가 낚인 미끼와 바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먼저 내가 유혹당한 미끼는 깊어 보이는 지식이었다. ‘깊어 보이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조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전혀 깊지 않다’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예비 독자들에게 단언하고 말하건대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다. 낚시에 관한 그리고 그림과 문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가볍게 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량감이 느껴지는 책이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이 단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설명하기로 하자.


  이 책을 읽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낚시와 물고기에 관한 그림이 어쩜 이렇게 많은가 였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우리 옛 그림에서 중국과 서양의 그것에 이르기 까지 방대한 그림들을 가지고 와서 썰을 풀고 있다. 그리고 가끔씩 드는 생각은 얼핏 지나치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초라하게 그려진 낚시꾼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의 256페이지에는 정선의 <소요정>이란 그림이 있다. 멀리 산이 보이고 가까이엔 깎아질 듯한 절벽이 그려져 있다. 그 밑에 물결이라 치부해도 아쉬울 것 없을 만한 크기로 두 낚시꾼이 배를 타고 가며 낚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마치 이 그림의 존재 목적이 그들이 하는 견지낚시인양 법석을 떨고 있다. 202 페이지에 나오는 장대천의 <산수>에서도 분명 제목이 산수임에 불구하고 ‘이 모든 분위기의 초점은 낚시꾼이 고결한 품성을 갖춰야 한다는 점에 모아진다. 이쯤 되면 낚시는 그냥 여기가 아니라 구도의 유력한 수단이다’라며 그림의 초점을 낚시에 모은다. 심지어 이 문장에서는 오타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다.


  낚여서 파닥거리는 주제에 한번 웃겨보자고 어거지를 써봤다. 정말이지 이 책의 많은 그림과, 이야기들은 낚시 하나만을 향하고 있다. 이정도면 저자의 낚시에 대한 몰입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있다. 그는 많은 자료들과 깊은 지식을 미끼로 물고기를 유혹했다면 특유의 유머러스함과 우격다짐을 바늘 삼아 물고기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 글이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게 쓰였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할 것인데, 우격다짐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할 물고기들도 많을 줄 안다. 그래서 한 부분을 예로 들겠다.


   대향로 뚜껑에 등장하는 12명의 인물 중 하나가 낚시하는 신선이다. 호숫가 바위에 걸터앉아 낚싯바늘 모양의 낚싯대와 오늘의 릴과 유사한 중국의 조차로 물고기 낚기에 열중하고 있다. 낚싯대가 왜 낚시 바늘 모양인지, 신선이 들고 있는 것이 과연 중국 조차인지, 이 모든 것은 확실하지 않다. 전문가들에게 몇 번 문의해도 낚시의 문외한인 그들은 낚시꾼인 나만큼 관심도 없었고 고대의 낚시 방법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이럴 땐 비전문가인 내가 자신 있게 얘기해도 된다. 왜냐하면 내 설명을 반박할 사람이 없으니까!


   밑줄 친 구절을 유심히 보라. 사실 이 책에 실린 모든 그림에 대한 전문가들은 낚시에 있어 비전문가라 봐도 문제가 없지 않은가? 그 말은 모든 그림에 대한 그의 설명을 반박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 아닐까? 우리는 저자의 이런 우격다짐에 정신을 못 차리고 그의 낚싯바늘 끝에 걸려 파닥거릴 수 밖에 없다.


  내 이야기를 하면서 서평을 끝내려한다. 내 할아버지께서는 낚시꾼이셨다. 집안에서 알아주는 한량으로 날이 따뜻해지면 낚싯대를 가지고 팔도를 유랑하시다 날이 추워지면 돌아오셨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내 고모들과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생신이 양력 시월 즈음에 몰려있다고 할 정도다. 그런 할아버지의 혼이 담긴 낚싯대를 물려받은 것이 큰아버지가 아닌 둘째인 내 아버지였다. 하지만 차 뒷 트렁크에 모셔 다니던 것이 내가 어렸을 때 교통사고 후 아버지께서 입원해계신 사이 차를 폐차시키며 미처 챙기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도 종종 낚시를 하시곤 했는데 그 이후로 새 낚싯대를 사셨으나 점점 멀리하시더니 결국 우리 집안의 낚시 대물림은 끊어지게 되었다. 낚시를 읽으며 우리 집안의 낚시를 잇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물고기 낚시가 아닌, 사람 낚시로.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참된 시작(창비시선 112)

저자
박노해 지음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 2012-10-2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이 시집은 『노동의 새벽』에 이은 박노해의 제2시집으로, 1·2...
가격비교


1. 시인 박노해


  전남 함평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장흥 벌교 등지에서 자랐다. 15세에 상경해 선린상고(야간)를 졸업하고, 섬유·금속·정비 노동자로 일했으며, 경기도 안양에서 서울 개포동까지 운행하는 98번 버스를 몰기도 했다. 유신 말기인 1978년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91년 3월 10일 안기부에 검거되었다. `반국가단체 수괴` 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며, 1998년 8월 15일 정부수립 50주년 경축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1983년 『시와 경제』 제2집에 「시다의 꿈」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1984년 첫시집 『노동의 새벽』 간행. 진지하고 구체적인 노동 현장 경험을 토대로 한 사실주의의 정신으로 노동해방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지향해 가고 있다.  1988년 제1회 노동문학상 수상. 1989년 산문집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사람만이 희망이다』 (1997) 간행. 1991년 시선집 『머리띠를 묶으며』 간행. 1993년 시집 『참된 시작』간행.


2. 사노맹사건


  1990년 10월 30일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발표하였다. 사노맹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약칭으로서 6·25전쟁 이후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최대의 비합법 사회주의 혁명조직이다.  이 조직은 오랜 노동현장경험이 있는 학생운동출신자들과 1980년대 이후 혁명적 활동가로 성장한 선진노동자들이 결합하여 1988년 4월 ’사노맹출범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회주의를 내건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1989년 초까지 조직정비 및 훈련에 집중하고, 이후 대중사업의 활성화에 나서 경인지역 외에도 마산·창원·울산·부산·포항·대구·구미 등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조직체계는 중앙위원회·편집위원회·조직위원회·지방위원회 등의 정규조직과 노동문학사·노동자대학·민주주의학생연맹 등의 외곽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계속되는 공개수배와 검거과정에서 1991년 4월 3일에 중앙상임위원 박기평(필명 박노해) 등 11명이, 1992년 4월 29일에는 중앙상임위원장 백태웅 등 39명이 구속됨으로써 사실상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3. 노동자 시인? 노동계급 시인!


  박노해가 등장하는 80년대 중반은 한국사회에 카프의 등장 환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구조적 변화들이 발생하고 있던 시기이다. 자본주의적 발전 모델에 입각한 산업근대화, 노동계급의 형성, 노사갈등의 심화등은 이 시기의 특징적이고 중요한 변화들을 대표한다.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산업근대화의 빠른 진척과 함께 노동계급이 급격히 형성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부터 발생하는 사회모순의 발전수준이 상당한 정도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 80년대 한국 사회이다. 노사 갈등이 심화킨 사회적 긴장은 이미 70년대 말부터 몇차례의 폭발과 위기 국면을 발생시킨다. 이런 변화들은 카프문학과 노해문학운동의 객관적 기반이 현격히 다른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체제 내적 모순의 심화를 포함한 현실 조건의 성숙이 어떤 문학운동의 긴요한 사회적 토대가 되기는 하지만 그 토대가 반드시 박노해같은 노동계급 시인의 출현이나 노동해방문학의 등장을 ‘불가피한 사건’이 되게 할 자동적 결정력을 갖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회모순이 반드시, 모든 경우에, ‘노동계급에 의한 노동해방문학’을 낳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노해가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들고 등장한 1984년은 한국 노동계급이 어던 통일성을 발휘할 만큼의 계급적 결속력을 갖고 있었던 시기도 아니고, 노동계급의 의식적 자기표현이 괄목할만한 ‘문학 작품’의 형태로 조만간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이나 기대가 강한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시점도 아니다.


  이런 사실은 노동계급의 시인 박노해와 『노동의 새벽』이 왜 우리 문학사에서, 그리고 범위를 넓혔을 때 세계문학사의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를 말할 수 있게 한다. 노동계급 시인이란 단순히 ‘노동자 시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자 출신의 시인은 어느 시대에나 가능하다. 그러나 노동자 시인이 꼭 노동계급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이 의식적인 자기 표현을 문학의 형식으로 시도할 때 ‘노동계급 시인’이 탄생한다. 이 종류의 시인, 노동계급의 고통과 꿈과 의식을 직접 표현히기 위해 그 계급으로부터 진출하는 노동계급 시인의 등장은 그리 흔한 가능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극히 희귀한 사건이다. 박노해는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그같은 노동계급 시인이고 『노동의 새벽』은 노동계급이 문학의 형식을 통해 자기를 표현한 최초의 목소리이다. 이것이 박노해와 그의 문학을 우리 문학사의 특별하고도 중요한 사건이 되게 하는 이유이며, 카프 문인들과 박노해를 갈라놓는 근본적인 차이이다.

「박노해- 그 <길 찾기>의 의미와 중요성」, 도정일


4. 읽기 쉬운 시


  박노해의 시가 가진 특성이자 장점으로서 우리에게 문젯거리를 제공해주는 것은, 그의 시가 참으로 쉽게 읽힌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박노해의 시는 독자대중들을 소외시키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시단의 다른 많은 시인들의 시를 접하다가 박노해의 시를 읽는 사람이라면, 시가 이렇게 쉽게 읽힐 수도 있는 것인지, 시가 그렇게 쉽게 읽혀도 괜찮은 것인지,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시의 본성, 시의 언어적 특성, 시와 독자와의 관계 등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시를 읽어나가면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차적으로 그의 시가 독자들을 만나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의 시가 이와 같이 쉽게 읽히면서도 결코 전달하는 내용이 낮은 수준의 것도 아니며, 그 내용을 형상화하는 기교가 유치한 수준의 것도 아니라는 점이 돋보인다. 그렇다면 박노해는 수준 높은 내용을, 수준 높게 형상화하면서도, 독자들이 쉽게 시를 접하고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시인이다.

「박노해의 시는 왜 감동을 주는가」, 정효구


5. 변화


  박노해의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은 여하튼 아픔이었다. 그리움과 구슬픔, 안쓰러움 혹은 착잡함…… 자꾸만 읽어갈수록 마음결은 폭풍우 속의 물살처럼 흔들렸다. 『노동의 새벽』이 수행한 역할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새로운 전망과 단계를 열어가는 제2시집을 반드시 발간할 것이라고 공언했던 그였기에 아픔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크게 4부로 이루어진 이 시집 속에 『노동의 새벽』과 함께 우리의 노동문학, 그 격량의 10년 역사가 구비치고 있다.


  제3,4부에 실린 시편들은 급격한 변모, 새로이 형성한 활화산의 삶이 내뿜어낸 뜨거운 ‘혁명시편’이다. 그간 여러 잡지 등에 이들 시들이 단편적으로 발표될 때마다 벌어졌던 뜨거운 논쟁의 소용돌이를 우리는 기억한다. 『노동의 새벽』에 대하여 일대 문학사적 사건으로서 바라보던 그 나름의 일치된 평가의 초점이 두 줄기 물길로 나누어지듯 가장 예민한 찬반의 시선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는 결국 100여명의 구속자를 낳게 한 ‘사노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 1991년 ‘자유민주주의 파괴세력의 수괴’로 체포되어 지금 무기징역형을 받고 경주교도소에서 기약없는 세월에 파묻혀 있다. 1,2부에 실린 작품은 바로 이 기간에 쓰여진 시들로서 일종의 ‘옥중시편’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옥중시들 역시 3,4부가 보여주었던 시와는 너무나도 급격한 경사를 보여주고 있어 이미 또 다른 산등성을 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급격한 변모에 대한 최근의 단편적인 비평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진보적 이상주의의 새로운 출발을 예감하기도 하고, 아득한 추락속에서 새로이 싹 틔우는 ‘강철 새잎’을 주목하기도 한다.

「박노해 최근 시의 성격과 변화에 대하여」,임규찬


6.참된 시작


  어쩌면 최근 시편이 위치하는 바에 대해서 박노해 자신은 이미 답을 내려놓고 있는 듯하다. 시집의 표제인 ‘참된 시작’이 이를 말해준다. 실제로 이 말은 시 「그해 겨울나무」와 「그리운 사람」의 핵심어이며, 어찌보면 1,2부 시편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밑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해 겨울나무」란 시는 1,2부 시편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면서 「민들레처럼」과 함께 1,2부 전체를 대표하는 시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집 발문에서 김병익이 이미 잘 지적한 대로 첫 연의 끝에서 “그해 겨울 /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고 고백하고는, 마지막 3연의 끝에서 “그해 겨울 / 나의 패백는 참된 시작이었다”고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증적인 변용’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해 겨울 / 나의 시작’이 의미하는 새로운 단계, ‘나의 패배’와 ‘참된 시작’이 의미하는 삶의 변화, 그 내적 변정법이야말로 박노해 최근 시편을 이해하는 열쇠인 것이다.

「박노해 최근 시의 성격과 변화에 대하여」,임규찬


7. 감상


  사실 나는 시를 즐겨 읽지도 않고, 잘 읽지도 못한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기 전엔 시집 한권을 읽어 본 적이 없다. ‘정말이지 시는 모르겠다.’고 입에 달고 다니는 내가 읽어도 ‘이게 무슨 뜻이지?’ 라며 고개를 갸우뚱 한 적이 한 번 없을 정도로 『참된 시작』은 쉬웠다. ‘이렇게 시가 쉬워도 되나?’ 라는 의문이 절로 고개를 들었다. 함축이나 압축의 미란 찾아볼 수 없는 긴 장문의 시편들을 보면서는 ‘이것이 시인가? 그저 행갈이 한 산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이 시가 ‘노동시’ 라는 것을 환기하고는 그가 이렇게 쉽게 써야 했던 이유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참된 시작』을 읽고 난 후에 나는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지금은 자기 공장에서 일을 하시지만 이 시가 씌어진 당시엔 누군가의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셨을 아버지의 잘릴 뻔 한 흔적을 앉고 살아가는 오른 손 네 번째 손가락이 생각이 났다. 2008년, 이제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텍스트로 존재하는 이야기들이 당시 절절히 체험 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읽혔을까 상상하니 어느 한 군데가 막힌 듯 먹먹해졌다.


  하지만 그의 시가 다 좋았던 것은 아니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이 세계를 자본가와 노동자 이분법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을 지니지 않았나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선전·선동의 색체가 너무 강해서, 조금 과장하자면 내가 읽은 것이 시집인지 아니면 ‘북한의 삐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노맹 사건’에 관한 오래된 기사를 읽던 중 본 한 문단은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박노해씨의 이름이 국민들에게 처음 알려질 때는 지금 같은 혁명가가 아닌 시인이었다. 지난 84년 박씨가 지은 『노동의 새벽』은 문단의 지축을 바꿔놓았다. 어떻게 촉망받는 노동지식인이 직업적인 혁명가로 탈바꿈했을까? 그러나 그와 함께 조직했던 사람들은 “박노해씨는 단 한순간도 직업적 시인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애초에 조직운동가였으며 시는 철저히 운동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심층취재, 박노해와 사노맹」, 최진섭


  수단으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나는 실망했다. 그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선전문학이나, 일제시대의 친일문학, 멀리 나치문학까지 떠올린 것은 그의 숭고한 정신에 대한 모독일까?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혼 불어넣기

저자
메도루마 ?? 지음
출판사
아시아 | 2008-03-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왜, 오키나와에 주목하는가오키나와는 류큐 왕국으로 독립된 섬이었...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메도루마 슌의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은 오키나와의 깊고 오랜 상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고 알게 된 사실인데 오키나와라는 곳은 역사적인 상처를 안고 있는 곳이다. 그 상처에 대해서는 옮긴이의 말에서 발췌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독립국이었던 류큐 왕국은 일본 본토의 무력 침공으로 종속 관계가 되어 오랫동안 경제적 수탈을 당하다가 결국 일본 본토에 오키나와 현으로 복속된다.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 때는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으로 전화에 휩쓸려 주민들은 피난 생활 속에서 굶주림과 말라리아로 죽어 갔다. 더구나 아군인 줄 알았던 일본군은 식량을 강탈하고 주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심지어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고 집단 자결을 유도하여, 전쟁으로 사망한 오키나와 주민의 수는 15만 명에 달한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으나, 포츠담 선언과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으로 군사 전략적 요충지인 오키나와는 오랜 기간 미군정하에 놓이게 되며,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 본토 사람들과 달리 많은 불편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끔 자신의 이야기에 너무 빠진 나머지 상처를 준 상대에 대한 분노를 내게 표출해 화가 나게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자기연민에 빠져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처음엔 그들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도 한번 두 번 계속되다보면 짜증이 나곤 한다.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이라는 소설집에는 상처에 관한 이야기가 여섯 개나 있다. 자칫하면 독자로 하여금 공감하기는커녕 화가 나게 할 수 있었지만, 메도루마 슌은 그 깊은 상처에 대해 격양된 어조로 이야기 한다던가 지나친 자기연민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고 있다. 담담한 어투로 이야기를 풀어나감으로 오히려 그 상처를 공감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게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점이 가장 잘 드런난 소설이 「이승의 상처를 이끌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소설의 화자는 어려서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고, 젊은 시절 사랑하는 이와의 가슴 아픈 이별을 겪고 마지막엔 강간을 당해 죽은 한 많은 귀신이다. 그렇게 깊은 상처를 안고 죽은 그녀가 가주마루 나무아래에 오는 이유는 이승에의 미련이나 복수 따위가 아니다. 그녀는 ‘나를 이렇게 만든 그놈들은 지금도 죽이고 싶어. 하지만 그런 놈들.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어, 내가 여기에 오는 이유는 말이야, 이 가주마루 나무 아래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곳이어서야. 여기서 이렇게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이젠 건물도 다 없어져 버렸지만, 그 사람이 저 건너편 강가에 서서 날 바라보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가 하면 「투계」에서는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요시아키는 유능한 다우치 조련사이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찾아와 조련하는 것을 배워가기도 했다. 그는 아들인 다카시에게 다리를 저는 병아리를 한 마리 준다. 그 병아리에게 아카라고 이름붙이고 정성들여 키운다. 연약한 다리를 가졌던 아카는 최고의 투계로 자라고, 사토하라의 눈에 띄게 된다. 사토하라는 조직 폭력배로 요시아키가 아끼던 분재를 팔라고 강요하다 결국 훔쳐간 인물이다. 이번에도 요시아키는 그의 힘에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카가 거의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아카를 묻으러 가던 다카시는 분노를 느낀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안면을 베이고 머리통이 깨져도 숨이 끊어지지 않는 다우치에게도, 그런 다우치를 묻으라고 시키는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의 말을 순순히 따르고 있는 자신에게도 혐오감과 분노가 솟구쳐 내장까지 소름이 쫙 끼치는 기분이었다.

 

  다카시는 사토하라의 닭장에 불을 붙이고, 온 마을이 다 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통쾌한 결말이었지만 만약 여섯 개의 소설이 모두 이런 결말을 가졌더라면 그 분노의 크기가 오히려 반감되어 다가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소설을 읽은 모든 사람들은 모두 오키나와에 가보고 싶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오키나와를 좀 더 알고 싶어질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사회적, 역사적으로 엄청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게공선

저자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출판사
문파랑 | 2008-08-1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88만 원 세대, 비정규직, 양극화, 워킹 푸어(Working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게공선은 게를 잡아 통조림 상품을 만드는 배이다. 공장선인 게공선은 항해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공장법의 보호를 받는 것도 아니다. 법망의 밖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은 무참히 짓밟힌다. 게공선 위에서의 노동자들의 삶이란 재소자들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을 게 없다. 감독관 아사카와는 풍랑이 크게 이는 날에도 어업 작업은 중단하지 않는다. 게를 잡기 위해 똑딱선을 타고 나간 노동자들은 돌아오지 않고 아사카와는 인명보다 중요한 똑딱선을 찾아 나선다. 다행히 노동자들은 러시아인들에게 구조되었고 거기서 그들은 육체적인 구조보다 더 중요한 구원을 받게 된다. 자본주의 내의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부조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게공선으로 돌아가 그들이 보고 배운 것들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한 학생의 죽음을 기점으로 쌓여있던 불만이 폭발하고 결국 노동자들은 파업을 한다. 상황은 그들에게 유리해보였다. 다 이긴 싸움인 듯 했다. 하지만 자신들을 지켜주기 위해 멀리 캄차카해까지 와있는 줄 알았던 군대에 의해 그들의 파업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파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 소설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노동자 해방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들이 사회 각계 각층으로 스며들어가 더 큰 혁명을 꿈꾼다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이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개인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설 내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노동자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어업노동자, 선원, 잡일꾼으로 분류될 뿐이다. 심지어 선장과 의사도 이름이 없다. 대조적으로 자본가의 대리격이라 할 수 있는 감독관은 아사카와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로 인한 노동자의 파괴된 인격을 상징하는 동시에 집단적 유대를 통해서만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모든 사건이 행동묘사와 대사 위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건 전개가 빠르고 현장감을 살릴 수 있었다. 심리묘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자본주의 하에서 상실된 개인의 자아를 나타내고 있다.

  셋째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철저히 보여줄 수 있는 처절한 문제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지치부호의 SOS신호를 듣고 425명의 목숨을 앞에 둔 아사카와의 “다 낡은 배야. 가라앉으면 오히려 이익이야.”란 말 한마디는 자본을 창출하는 부품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인간을 보여준다. 조난당한 똑딱선을 찾아 나선 이유는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까운 똑딱선을 찾기 위해서이고 각기병에 걸린 어업노동자의 장례식을 환자들만 지키게 한 점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아사카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작가는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사카와가 파업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고됨으로써 결국 아사카와도 역할이 다른 자본주의의 부속품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자본주의 전체의 문제로 화살을 돌림으로 이 소설은 시대적,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아쉬웠던 점은 80년이 지난 현재에 읽으면서도 이 이야기가 공감이 간다는 점이었다. 아쉽게도 80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좀 더 비싼 부품이 되어있을 뿐이었다. 다음 세대들은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하지 못하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 한다.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전태일평전 (개정판)

저자
조영래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01-09-01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절판/[전태일 평전]은 저자가 수배생활 중 혼신의 열정을 다하여...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네이버 지식인에 답변을 달고 내공을 받는 것을 취미로 삼던 때가 있다. 당시 적었던 글 중 유독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것이 전태일 평전의 줄거리를 알려달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오픈사전에 올라간 그 글은 5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이후 수많은 펌질과 짜깁기로 초딩들의 독후감 숙제를 도왔다. 필자가 쓴 글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이 글은 늘 마음 한켠에 짐으로 있었다. 우선 시다라는 용어를 잘못 전달하거나 풀빵을 붕어빵이라 기술한 오류 때문이다. 그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그 글을 작성할 당시 사실은 전태일 평전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공 몇 점 받으려 어렸을 때 다이제스트 판을 읽은 기억을 더듬어 작성한 것이었다. 몇해 전 전태일 평전을 제대로 읽고 난 후, 전태일 평전의 리뷰를 적어야겠단 다짐을 했지만 선천적 게으름으로인해 많이 늦었다. 전태일 열사의 44번 째 기일, 마음의 짐을 더는 심정으로 리뷰를 작성한다.


  전태일 열사의 강렬한 마지막 모습 때문인지 그를 열렬한 투사로 기억했다.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노동자들의 권익을 부르짖었던 노동운동의 투사. 하지만 전태일 평전을 읽은 후에는 누구보다 마음이 여렸던 스물 두 살의 청년이 마음에 그려졌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수기에서 발췌한 이 문장이 인간 전태일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언짢은, 그 언짢은 마음에 하루의 기분이 우울한 사람.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값을 털어서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는 것이 오히려 편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 그가 휴일도 없이 매일 열네 시간의 중노동을 하고도 점심을 사먹을 여유조차 없는 평화시장 어린 시다들의 삶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이었을지.


  이 책은 전태일이란 마음씨 착한 청년이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어린 노동자들을 보살펴 주겠다는 그의 작은 꿈은 번번이 한계에 부딪히지만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커진다. 재단사들의 횡포를 목격한 그는 자신이 재단사가 되겠다 다짐하고, 미싱사로서 벌던 수입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재단 보조일을 한다. 그는 결국 재단사가 되어 어린 시다들을 개인적으로 보살피지만 업주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그들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다. 법을 지키지 않는 업주들을 법을 집행해야하는 국가가 당연히 벌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국가는 노동자들보다 업주들의 편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스스로 모범적인 업체를 설립해 운영하겠다는 꿈도 꾸지만, 자본이 없는 그에게는 문자 그대로 꿈일 뿐이었다. 권력과 자본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도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산화시켜 노동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그 불씨는 이 땅위에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한 꺼지지 않을 것이다.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김대중 VS 김영삼

저자
이동형 지음
출판사
왕의서재 | 2011-07-2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한국정치의 양김, 김영삼과 김대중의 관계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인상깊은 구절

  이 자리에서 노태우는 김대중에게 "김 총재도 이제 고생을 그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힘을 합해 당을 같이 합시다." 생각지도 않은 제안을 받은 김대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제안을 거절한다. "그것은 안됩니다. 나는 국민에게 야당을 하겠다고 선거에 나서서 당선된 사람입니다. 우리 당 65명의 의원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 여소야대를 만들어 준 것은 국민의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국민의 동의도 없이 내 마음대로 여당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나한테 합당을 제의하지 말고, 민주주의만 철저히 하십시오.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됩니다."


 여공들이 김영삼 총재와의 면담을 요청하자, 김영삼은 여공들이 항의 농성 중이던 강당으로 들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은 눈물 겹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경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내 이름 석 자와 신민당의 명예를 걸고 조속히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겠습니다. 경찰이 신민당사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합니다. 나와 서른 명의 신민당원들이 여러분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중도통합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요? 중도통합이란 게 정치학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칙이 섰을 때는 중도통합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이 다를 때 방향이 다를 때 중도통합은 없습니다. 선과 악 사이에 중도통합은 없습니다."

 

 

내용 요약

  김대중·김영삼이냐 김영삼·김대중이냐. 누구 이름을 먼저 하느냐까지도 싸웠던 대한민국 정치의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대 김영삼. 그 두사람의 삶은 닮은 듯 달랐다. 양김 모두 대한민국의 정치 중심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며 라이벌이자 동지로 같은 곳에 서서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있었으나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서부터 자신의 뜻을 관철 시키는 방법까지 판이하게 달랐다. 서로에 대한 평가를 묻는 기자에게 김대중은 "김영삼 씨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고 답하였다. 같은 질문에 김영삼은 "김대중 씨는 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고 화답했다고 하니 두 라이벌의 성격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김영삼은 다들 알다시피 멸치어장을 하는 지역유지인 아버지 김홍조 옹의 영향으로 부족함 없이 자랐다. 당시 거제도 사람 중에 경제적으로 김영삼의 부친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에 김대중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대중의 부친 김운식 옹이 농업 외에도 어업, 대금업, 양조장 등의 부업을 했던것으로 보아 살림살이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겠으나 김대중의 모친 장수금은 김운식의 정실이 아니었다. 이런 것을 고려할 때, 김대중과 김영삼의 유년시절은 꽤 많이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정치 입문도 매우 다르다. 김대중은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벌었다. 사업에 성공한 김대중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며 정치에 입문한다. 김대중의 건국준비위원회 이력은 그를 빨간색으로 칠하는 시작점이 된다. 김대중은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목포시에 출마했는데 낙선했고, 그 후로 민주당 소속으로 4대,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내리 낙선하는 길을 걸었다. 5대 보궐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이 되지만 3일 후 5.16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국회의원 선서조차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반면, 김영삼은 서울대 3학년 시절에 창랑 장택상의 선거운동원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졸업 후 장택상의 비서가 되고, 그해 장택상이 국무총리가 되자, 국무총리 비서관이 되었다. 그 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거제군에 출마해서 부친의 후광과 장인의 지원으로 손쉽게 당선된다. 당시 그의 나이 26세였다. 


  김대중은 낙선을 매우 많이 했다. 국회의원도 네번째 도전에 당선되었고, 대통령선거도 네번째 도전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통령병 환자'라고까지 비아냥댔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단 두번 낙선했다. 3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4대까지 12번의 국회의원 선거 중 전두환 집권 중 열린 11대, 12대를 뺀 10번의 선거에서 민주당 간판을 달고 부산 서구에 도전했던 4대 국회의원 선거를 뺀 9번 당선 되었다. 대통령선거 한번, 국회의원 선거 한번을 뺀 모든 선거에서 당선된 것이니 대통령 선거 포함 6번의 선거에서 한번도 지지 않은 박근혜 씨와 도지사 선거 포함 6번의 선거에서 한번도 지지 않고 아버지 지역구를 지킨 남경필 정도가 이에 맞설 수 있겠다.


  정치 입문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른 양김은 김영삼이 이승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으로 입당하면서 처음으로 같은 정당 소속이 됐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두 사람은 첫번째 대결을 펼쳤는데 당시 당수인 유진오가 김대중을 지명하면서 김대중의 승으로 끝이나는가 했으나 김영삼의 땡깡으로 김대중은 원내총무 인준을 받지 못하고 결국 김영삼이 승리를 가져간다.


  두번째 대결은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펼쳐졌다. 당시 당수 유진산이 김영삼을 지지하여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이 결정되는 듯했다. 경선 전날 밤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문을 정성스럽게 써내려갔다. 같은 시각 김대중은 이희호, 김상현을 대동하여 전당대회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여인숙을 돌아다니며 절하고 읍소하며 대의원들을 설득했다. 전당대회 결과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1등을 하였으나 과반수 득표에 단 20여 표가 모자라 2차 투표로 넘어갔다. 이는 이철승계의 반발로 무효표가 82표나 나왔기 때문이었다. 2차 투표 전 김대중은 이철승계의 수장 조연하와 만나 이철승이 총재가 되도록 지지하고, 이철승계에게 요직의 반을 주겠다는 약속을 김대중의 명함 뒤에 적고 사인하는 것으로 이철승계의 표를 가져왔다. 그 결과, 김대중이 2차 투표에서 김영삼을 이김으로 첫번째 대결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하지만 명함에 쓰여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79년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이철승이 아닌 김영삼의 손을 들어줬다. 훗날 김대중은 이에 대하여 "물론 김영삼은 면회 한 번 편지 한 통 없었고, 사람들이 라이벌이라고 하며 이철승 지지를 호소했지만, 박정희가 김영삼 당선되는 것을 싫어했고 이철승보다 김영삼이 총재가 되는 것이 민주화 투쟁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김영삼을 지지했다"며 이철승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자신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 준 이철승계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명함각서 사건 같은 것들이 김대중을 거짓말쟁이로 공격하는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는 하는데 자신을 향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사사로운 감정을 내려놓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 김대중 대통령 답다는 생각이 든다. 김대중은 왜 거짓말을 하냐는 김영삼의 물음에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약속을 못지킨 것 뿐이지'라고 했다고 한다.


  반면, 김영삼은 전당대회 결과에 승복하고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지 다니며 김대중 지지유세를 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최형우, 깅동영, 조윤형 같은 김영삼의 참모들의 반발에도 끝까지 김대중을 도왔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 관권선거, 돈 선거 등 온갖 부정을 일삼는 박정희에게 김대중은 불과 95만표 차로 졌다. 어마어마한 금품을 살포하고도 겨우 이긴 박정희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선거 이후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반독재 투쟁을 하는 김대중이 너무 미웠다. 그래서 벌어진 일이 바로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김대중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일본으로 가면 '납치 및 살해' 가능성이 있다는 많은 제보편지가 왔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일본행을 감행한다. 도쿄에서 반박정희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그랜드 팔레스 호텔 2212호에 투숙하고 있던 김대중은 회담을 마치고 2211호를 나서던 중 옆방 2210호 그리고 맞은편 2215호에서 쏟아져 나온 괴한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납치당한다. 그들은 김대중을 차에 싣고 고베에서 한시간 가량 떨어진 니시노미항으로 이동하여 준비되어 있던 요트에 김대중을 옮겨 싣고 한참을 달리던 중 용금호라고 하는 대형 선박에 다시 옮겨 싣는다. 김대중의 오른팔과 오른다리에는 30킬로그램 정도의 쇳덩어리를 매어졌고, 던지기만 하면 김대중은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때 김대중을 살려 데려오라는 무전이 날아오는데 이는 주한미국대사 하비브가 사건 직후 CIA를 이용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의 배후가 중정임을 파악하고 박정희를 찾아가 김대중을 죽이면 안된다고 경고하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납치사건으로 정치탄압을 받았다면 김영삼은 YH 무역사건으로 가택연금에 처해진다. YH 사건은 1979년 8월 9일 오전 YH무역이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한 데 항의하는 여공 200여명이 신민당 당사에 몰려와 농성을 벌이는데서 시작된다. 김영삼은 여공들이 항의 농성 중이던 강당으로 들어가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은 눈물 겹게 생각합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내 이름 석 자와 신민당의 명예를 걸고 조속히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겠습니다. 경찰이 신민당사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합니다. 나와 서른 명의 신민당원들이 여러분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2000명이 넘는 엄청난 경찰 병력을 신민당 당사로 투입하여 여공들을 끌어내기 시작한지 딱 23분 만에 상황은 종료됐다. 진압 과정 중 김경숙이라는 여공이 사망했고,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 등의 당원들도 경찰의 폭력에 심하게 부상을 당했고, 김영삼은 상도동 자택에 가택연금 되었다.


  박정희는 YH 사건이 터지자 김영삼의 구속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만 중정부장 김재규가 말린다. 그래서 나온 것이 '김영삼 총재 가처분신청'이다. 이에 김영삼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정권을 욕하고 박정희 하야를 외쳤다. '하야' 소리에 돌아버린 박정희는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시켜 버린다. 이 일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다시 타올랐고 10월 16일 부산대생의 데모로 시작된 사태는 일반시민들까지 합세하게 되고, 박정희가 부산에 계엄을 선포하자 마산 시역에서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바로 '부마항쟁'이다. 결국 부마항쟁을 둘러싼 김재규와 박정희, 차지철의 시각의 차이로 인해 10.26 사태가 벌어진다. 일련의 사건들의 흐름으로 보아 박정희가 죽은게 자신을 국회의원 제명했기 때문이라는 김영삼의 말이 터무니 없는 말은 아니다.


  박정희가 여대생 신재순을 옆에 끼고 심수봉의 노래를 들으며 시바스리갈을 쳐마시다 사망하자 모두 따뜻한 봄바람이 불 것이라 생각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다. 김영삼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상황을 안이하게 인식한데 반해 김대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고 서울의 봄이 온 건 아니다"라며 정치 기류를 곱게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의 자리에 마음을 뺏긴 양김 모두 다음 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양김은 서로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삼은 지난번에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고 주장했고, 김대중은 김영삼으로는 김종필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김대중을 사면복권하면 야당이 분열하게 될 것이라는 전두환의 책략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이 간절히 양김의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결국 두사람은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심재철의 바보 같은 서울역 회군 뒤, 전두환은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공수부대를 광주에 투입한다.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지면 학교 정문 앞에서 모인다는 사전 약속대로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앞으로 모였고, 전남대에 주둔하던 7공수여단은 학생들을 구타하기 시작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다. 5월 19일에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공수부대를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일반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한다. 이에 5월 20일 계엄군은 광주 전역의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선포한다.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M16 소총으로 난사했다. 자국민을 향한 총성은 무려 10분간이나 지속됐다. 5월 27일 새벽 5시 10분, 계엄군이 도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 작전을 완료했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김대중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인 5월 17일 학생들과 재야세력에게 북한의 사주를 받아 활동자금을 건네주고 학생데모를 부추겨 사회를 혼란케 하고 정권을 잡아 북한에 권력을 넘겨주려 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와 '반국가단체결성' 혐의로 연행했다. 이 사실을 끼워 맞추기 위해 당시 대학생이던 이해찬, 설훈, 정동년, 심재철 등을 체포, 고문하고, 허위자백을 강요한다. 구속자들은 모진 고문 끝에 범죄사실을 전부 시인했지만, 재판정에서는 고문에 의한 강요된 진술이었다고 번복했다. 그러나 심재철만은 모든 것을 시인했다. (서울역회군의 주역이자 지금 새누리당 의원으로 국회에서 누드사진 검색하다 걸리고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상하게하는 카톡보내서 논란을 일으킨 그 심재철이다.) 결국 김대중에게는 사형이 선고된다. 1981년 1월 말, 전두환은 레이건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가면서 김대중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해주고, 82년 2월에는 다시 20년 형으로 그리고 그해 연말 형집행정지로 석방해주면서 미국으로 쫓아낸다. 한편 김영삼은 김대중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체포된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때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1980년 8월 13일, 가택연금 중이던 김영삼은 신군부의 강압에 못 이겨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할 것을 선언한다.


  1987년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역사가 꿈틀거릴 조짐이 보이는 사건이 터졌다. 정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문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조한경과 강진규 두 사람만 물고문 했다고 축소 은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6월 9일 연세대 앞에서 데모 중이던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진이 '검열'의 공포 속에서도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렸다. 이 사진의 위력은 엄청났다. 바로 다음날인 6월 10일 6월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는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되었고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다. 결국 6월 항쟁의 결과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로 부터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6.29 선언을 이끌어 내었다.


  1987년 7월 9일 김대중은 드디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공민권이 박탈된 지 7년만에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 6.29 선언 열흘 뒤의 일이다. 양김을 분열시켜 노태우를 당선시키려는 전두환의 책략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양김은 다시 분열했다. 통일민주당 의원총회에서 "80년 서울의 봄 때처럼 분열하게 되면 역사의 죄인, 민족의 반역자가 된다"는 험악한 말도 나오기 시작했으나 단일화는 물 건너가고, 10월 28일 김대중은 분당을 선언,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나간다. 결국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양김은 동시 출마 했고, '보통사람'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된다. 


  이듬해 치뤄진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이 참패하여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가 이루어졌다. 민정당은 125석을 얻어 제1당의 지위는 확보했고, 평민당이 70석으로 제2당이자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어서 민주당이 59석, 공화당이 35석, 무소속이 9석, 한겨레민주당이 1석을 가지고 갔다. '여소야대' 정국에 노태우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5공청문회가 열리고, 전두환이 국회에 끌려나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노태우는 김대중에게 힘을 합쳐 당을 같이하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김대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국민에게 야당을 하겠다고 선거에 나서서 당선된 사람입니다. 우리 당 65명의 의원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 여소야대를 만들어 준 것은 국민의 뜻입니다. 나한테 합당을 제의하지 말고, 민주주의만 철저히 하십시오.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됩니다."


  김대중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노태우는 김영삼에게로 발길을 돌린다. 제안을 받은 김영삼은 장고에 들어간다. 이때 김영삼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대해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87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2위를 했지만 이어지는 총선에서 김대중의 평민당에 제1야당을 내어주자 불안했던 것이다. 게다가 최측근 인사인 서석재가 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에서 후보매수한 혐의로 구속되자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김영삼이 드디어 결심을 하고 3당 합당의 사실을 측근들에게 알리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하지만 김영삼의 생각은 확고했고, 김영삼을 버리느냐 신념과 국민을 버리느냐의 기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김영삼의 3당합당이 선언되는 자리에서 "이의있습니다.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이때 노무현과 같이 김영삼의 설득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찾아 가시밭길을 걸은 사람들이 이기택, 김정길, 박찬종, 장석화, 홍사덕, 이철이었다. 이들은 민자당으로의 합류를 거부하고 민주당에 남았고, 훗날 꼬마 민주당으로 불렸다.


  1992년 대통령 선거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마지막으로 맞붙은 대결이었다. 김대중이나 김영삼이나 누가 되든 군사정권은 막을 내리는 것이다. 국민들은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가 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케케묵은 빨갱이 수법으로 김대중의 얼굴에 붉은색을 칠하면서 첫 단추부터 깨끗한 선거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불공정한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정치에서 심판은 바로 '언론'이다. 그러나 92년 대선은 이 심판들이 일방적으로 김영삼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던 중 '초원복국집' 사건이 터졌다. 선거를 코앞에 둔 12월 11일 정부 기관장들이 부산의 ‘초원복집’이라는 음식점에 모여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지역 감정을 부추기자고 모의한 것이 도청에 의해 드러나 문제가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 '기춘대원군'  김기춘이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부산 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냐 하면 영도다리 빠져죽자.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의 발전에 긍정적"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김영삼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사퇴까지 고려해야 할 정도의 악재여야 하지만 김영삼에게 호재로 작용한다. 오히려 영남인들을 똘똘 뭉치게 만들어 김영삼의 표를 더욱 단단히 해주는 결과가 된 것이다. 조선일보는 대선 당일 사설을 통해 "이번 도청사건은 목적과 관계없이 부도덕한 것이며 앞으로 우리 사회의 관행과 시민생활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파급시킬 것"이라고 관권부정선거를 도청사건으로 물타기 했다. 김영삼은 자신의 연고지인 부산/경남에 전통적 여당의 텃밭인 대구/경북, 거기다가 김종필의 연고인 대전/충남/충북을 바탕으로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김대중은 김영삼의 당선이 확실해지던 12월 18일 자정,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다음날인 12월 19일 기자들을 모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대중은 1995년 치뤄진 제1회 지방선거에서의 민주당의 대승을 밑천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민주당에서는 대선후보로 나갈 수 없다고 판단,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민주당 인사들과 국민은 엄청나게 반발했지만 김대중의 결심은 꺾이지 않았고, 결국 95명의 민주당 의원 중 65명이 새정치국민회의로 옮겼다. 노무현은 이 때도 김대중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야권이 분열된 채로 치뤄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방선거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노무현은 15대 총선에 종로에서 출마해 이명박, 이종찬에 이은 3위로 낙선한다. 이때 노무현을 비롯해 낙선한 민주당 인사들이 강남에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차리고, '통추'를 조직했다. (야권 분열의 결과 이명박이 당선되지만 후에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박탈 당해 미국가서 에리카 누나랑 있을 때 치뤄진 재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다.) 여하튼, 이로 인해 김대중은 엄청난 욕을 먹었다.


  시간이 흘러 1997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통추는 이회창과 손을 잡을 것인지 김대중과 손을 잡을 것인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결국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갔다. 노무현은 김원기, 유인태, 원혜영과 함께 국민회의에 입당했고, 이철, 박계동, 이부영, 제정구는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97년 대선은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의 3자구도가 형성되었다.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에 밀려 2등을 했던 이인제가 이회창이 아들의 병역문제로 지지율이 하락하자 탈당하고 대선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12번의 당적 변경을 통해 현재 새누리당으로 돌아왔지만 '당적변경 한국 기록 보유자' 혹은 '피닉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로인해 보수표가 나뉘었고 이회창 아들의 병역 문제와 IMF, DJP연합, 김대중의 이미지 변신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도 겨우 39만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70대의 노 정객, 네 번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 또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 그러나 김대중은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대한민국이 부도 직전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vs김영삼은 이동형 작가가 인터넷에 연재한 글들을 다듬고 추가해서 출판한 그의 첫번째 저서이다. 이이제이의 태동과도 같은 책이다. 읽기 쉽고 중간중간 삽입된 유머와 야사들로 정치를 매우 재밌게 풀어냈다. 다만 곁가지로 자주 빠져 조금 산만하다는 점이 아쉽다.


  김대중과 김영삼. 양김이라고 불리는 두 사람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표본 그자체다. 다른말로 하자면 '양김의 전쟁이 곧 현대사'이다. 라이벌로서 많은 대결을 하고 서로 돕기도 했다. 하지만 87년 대선에서의 단일화 실패와 김영삼의 3당합당 이후 두 사람은 화합하지 못했다. 92년 대선에서 김영감이 승리하고 승자의 아량으로 김대중을 잡았다면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었겠으나 김영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95년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은 집권을 위해서 김영삼을 매몰차게 몰아붙였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로 상도동 쪽에서 끊임없이 차남 현철 씨의 사면을 부탁했지만, 거절했다. 김영삼의 앙금도 쌓여만 갔다. 두 사람의 앙금은 김대중이 병실에 입원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일 때, 김영삼이 "화해하자"고 말하고 나서야 풀어졌다.


  양김이 화합해서 정치를 할 수 있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본다. 87년에 서로를 인정하고 동전 던지기를 해서라도 단일화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다면 적어도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전재산 29만원으로 골프치고 다니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전두환을 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5.18의 발포책임자를 가려내고 온당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아쉬울 따름이다.


  그런 큰 역사적 가정이 아니라도, 김대중과 김영삼이 조금만 더 일찍, 최소한 서로 의사를 확인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할 때 서로를 인정하고 화해를 했더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생각해본다. 


p.s.

  이 리뷰는 김대중 대통령 서거 5주년을 맞아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행보를 다시 돌아보는 마음으로 적었다. 리뷰를 적으면서 대한민국 정치사의 아픔 구석구석에 김대중 대통령의 흔적이 남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는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정치보복이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김대중 대통령에게 빨간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실제로 빨갱이었다면 IMF로 국력도 바닥을 기던 그 때, 적화통일 되지 않았겠냐는 합리적인 논리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사라지길 기원한다.

블로그 이미지

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100도씨

저자
최규석 지음
출판사
창비 | 2009-06-05 출간
카테고리
만화
책소개
민주화운동의 정점, 뜨거운 기억을 담은 6월민주항쟁 '사람도 1...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인상깊은 구절

 



 

내용 요약

  영호는 광주 5.18 희생자들을 향해 폭도라고 멸공을 외치던 반공 소년이었다. 영호의 외할머니는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고 아버지는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장면이 텔레비젼에 나올 때 마다 광분하며 어린 영호에게 "법관이 되어 저런 놈들 싹 잡아넣어버려"라고 한다. 그런 영호가 대학생이 되어 마주한 그날 광주의 진실 앞에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대학에서 만난 데모나 하는 나쁜(?) 선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데모에 참여 하기 시작한 영호는 경찰에 연행된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으로 어머니를 잃은 영호의 어머니는 영호의 연행 사실에 자신의 아들이 빨갱이가 되었다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가 영호가 수감된 구치소에서 만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활동을 하게 된다.


  민주화를 향한 열기가 더해가던 중 "책상을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쓰러졌다"는 박종철 열사의 고문 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가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한다. 6월 10일 영호의 면회를 한사코 거부하던 영호의 아버지는 영호를 만나고 택시를 타고 돌아간다. 택시기사는 영호의 아버지에게 6시에 맞춰 경적 시위를 할 생각인데 함께 하겠느냐고 묻는다. 이에 영호의 아버지가 택시기사와 함께 경적을 누르는 것으로 만화는 막을 내린다.


  이날 무슨일이 일어났을까? 노태우가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87년 6월 10일 학생들과 재야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되었고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6만 명의 경찰 병력이 배치 되었고, 3,467명이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6·10민주항쟁의 3배가 넘는 시민들이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여 사람들이 끝도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시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6월 항쟁의 결과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로 부터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6.29 선언을 이끌어 내었다.




  이 만화는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습지생태보고서』『대한민국 원주민』을 발표하고 네이버 웹툰 『송곳』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최규석 화백이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의 제안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이 만화 하나로 87년 6월에 대해서 전부 알 수 없지만, 그때의 뜨거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6월 항쟁에 대해서 더 공부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만화의 중심 주제이자 가장 감명깊은 장면은 영호가 감옥에서 선생님(누군지는 모르겠다)과 대화 하는 장면이다. 영호는 세상을 바꾸려는 이 싸움에 이길 수 있을 지, 끝은 있기는 할지 고민한다. 이때 선생님은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이에 영호가 "그렇다 해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남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선생님은 "지금이 99도다... 그렇게 믿어야지" 라고 대답한다.


  어제 7.30 재보선이 야권의 참패로 끝났다. 필자가 투표권이 생긴 2004년 9월 이후 10여년 동안 권리를 행사했던 모든 선거에서 필자가 표를 준 사람은 다 낙선했다. 필자의 지역이 새누리당 텃밭인 데다가 지난 대선에서 부정선거로 박근혜씨가 당선된 탓이다. 표를 주지 못하지만 꼭 당선 되길 바랐던 후보들 중에는 10.26 재보선으로 서울시장에 당선된 박원순 서울시장 외에는 당선된 사람이 거의 없다. 정말 이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지, 죽기 전에 새누리당이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을 지, 끝이 없을 것 같은 싸움에 두렵다. 누가보더라도 새누리당의 행태는 용서할 수가 없는데도 국민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 당에 표를 주는 현실 때문에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긴 한건지 의문 스럽다. 그런 필자의 심정 때문인지 "지금이 99도다... 그렇게 믿어야지" 라는 말이 마음에 확 와 닿는다.


  두번째로 마음에 와 닿은 장면은 영호의 아버지가 택시 안에서 경적시위에 함께 하는 것이다. 택시 기사는 회사에서 경적 시위에 참여할까봐 경적을 다 떼버렸다고 말한다. 경적도 없는 택시로 경적 시위에 참여한다는 택시기사의 권유로 영호의 아버지도 경적을 누르는데 함께 한다. 경적을 떼버렸다는 택시기사의 말과는 달리 영호의 아버지가 경적을 누를 때 큰 경적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게 그 택시에서 난 소리든 다른 차들의 소리든 상관없다. 경적을 떼어버린 자동차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국민과 다르지 않다. 나 같은 것 한명이 내는 소리가 무슨 울림이 있겠느냐고 묻는 그런 한사람 한사람이 마치 이 택시와 다를바 없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더라도, 목소리가 작아서 남에게 들리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함께할 때 만화에서 처럼 큰 울림이 있을것이라 믿는다.


p.s.

  필자는 책으로 읽었는데 리뷰를 쓰면서 찾아보니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구글에서 '100도씨 최규석'으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번 재보궐 선거에 상처 입은 야권 지지자들은 꼭 찾아서 보기를 권한다.

블로그 이미지

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모피아: 돈과 마음의 전쟁

저자
우석훈 지음
출판사
김영사 | 2012-11-2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경제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 정부를 장악한 모피아, 그들에 맞서...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인상깊은 구절

"큰 돈은 늘 작은 돈을 이길 것 같지만, 그게 매번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의장님의 돈, 대통령의 마음, 제가 보기에는 이 둘 중에 마음이 이깁니다."

요구르트를 손에 든 할머니가 대통령 앞에 섰다. 그녀는 요구르트와 함께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대통령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씨오, 대통령님. 돈이 없어서 대통령 관둔다고 딸이 그럽디다. 그러면 몹써요. 내 돈이라도 받으씨오." 대통령은 걸음을 멈추고 할머니가 건넨 돈을 받았다. 할머니는 그걸로 성에 안 찼는지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서 건넸다.

 


 

내용 요약

  한국은행에서 팀장을 하던 오지환은 모피아의 수장인 이현도 전 경제부총리의 추천으로 청와대에 경제 특보라는 자리를 신설하며 들어간다. 오지환이 청와대에 들어간 후 이현도의 청와대 공격이 시작된다. 이현도는 미국 펜타곤의 무기자금을 자본으로 한국 공기업 채권을 야금야금 사들여서 이를 인질 삼아 대통령의 경제권을 찬탈하는 경제쿠데타를 감행한다.


  이로 인해 경제분야에는 식물대통령이 된 대통령은 오지환 특보와 함께 경제권을 모피아로 부터 되찾아오는 방법을 모색한다. 오지환 특보는 이현도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케이맨 제도에 학익 홀딩스라는 회사와 100개의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고 스위스의 UBS, 중국의 인민은행, 프랑스의 BNP에서 100억을 빌려 방어 자금을 모은다. 이현도는 젊은 모피아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대한민국 경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맛게 요리하기 위해 마지막 결전을 치룬다. 


  오지환과 청와대 팀은 각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방어를 하였으나 공적자금과 연기금으로 원화를 공격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빌린 돈은 바닥이 나버린 상태에서 오지환은 국민들에게 하루만 돈을 빌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국민들이 돈을 모아줘서 그 돈으로 모피아의 공격을 막아낸다.



  모피아는 자신을 스스로 C급 경제학자라고 소개하는 우석훈 박사의 장편 소설이다. 경제학자가 쓴 소설이라니. 다큐멘터리와 영화로 제작하려던 시도가 있었지만 현실적 문제(돈)로 인해서 소설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지고 대선에서는 이긴 이후 여소야대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경제학자가 쓴 경제 소설이라 딱딱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달리 재밌고 사건들이 긴장감 넘치고 박진감 있게 전개되어 읽는데 지루하지 않았다. 몇몇 경제 관련 용어나 이야기가 나오지만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 나오는것은 아니어서 필자와 같이 경제에 문외한인 독자들이 읽기에도 부담이 없었다. 하지만 일부 설정들, 예를 들어 모피아 수장인 이현도가 청와대에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오지환을 소개시켜주는 것이나 펜타곤에서 일하는 1조원대 자산가인 김수진 변호사 등은 현실적 설정이라고 하기에는 부담스러웠으나 소설이니 그러려니 하자.


  이 소설의 결말은 조금 유치하다. 시민들의 마음을 모아서 거대 세력에 맞서는 모습은 흡사 드래곤볼의 원기옥을 연상케한다. 대통령이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걸어서 마포대교를 건너 국회로 간다. 이때 만난 할머니는 대통령에게 쓰라고 만원짜리 지폐 몇장과 금반지를 내어놓는다. 이런 소설에서만 있을 법한 내용을 읽다가 필자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씨바. 대한민국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국가 부도사태를 만들고 재벌과 부유층에서는 "이대로 영원히"를 외칠 때, 잘못한 거라고는 열심히 살아온거 밖에 없는 죄없는 서민들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장롱 속에 있던 금반지, 금목걸이 등을 국가에 내어 놓았다. 다시 그런 국가위기 사태가 온다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소설의 결말처럼 현실도 해피엔딩이기를 바란다.

블로그 이미지

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건투를 빈다

저자
김어준 지음
출판사
푸른숲 | 2011-12-19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Q, 난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인상깊은 구절

선택의 누적분이 곧 당신이다.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몇번을 읽어 보려 했지만 뻔한 이야기를 번지르하게 포장했을 것만 같은 느낌이라 망설이다 겨우 읽었다. 기대를 많이 하지 않아서인지 생각보다 내용이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인생 메뉴얼이라는 거창한 부제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이 책은 나, 가족, 친구, 직장, 연인의 다섯장으로 이루어져있다. 각 장에서는 수많은 고민 사연들이 소개되고 각 사연마다 김어준 총수의 진심어린 충고가 담겨있다. 대부분의 고민의 내용들이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비슷하다. 그래서 김어준의 상담 내용 또한 한 줄로 요약가능하다.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는 결정'을 내리라.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면된다.

 

  저자가 책에서 지적하듯 대부분의 고민은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한 고민이고, 대부분 자신의 마음에 이미 한쪽을 선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하고 상담을 요청하는 이유는 그 선택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싶어서이다. 그렇다. 내 욕망을 충족 시켜주는 선택과 그 선택을 했을때 받을 수 있는 비난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다. 김어준의 선택은 명확하다. 둘중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따르는 모든 책임을 지라.

 

  1장이 자기 자신의 삶을 자기가 선택해서 살라는 내용이라면, 2,5장은 남의 삶에 이것 저것 참견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연인을 남이라고 인식하는데 큰 거부감을 드러낸다. 김기춘씨의 '우리가 남이가'가 먹혀들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다 보니 부모는 자식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것인 양 독식하고 이런 과정에서 독립하지 못한 유아적 성인들이 세상에 많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부모 자식 관계보다 더 심한 문제가 있는 것이 바로 남여 관계이다. 내 연인과 그의 옛연인과의 관계, 그의 친구관계, 심지어 그의 직장 상사와의 관계까지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물론 연인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조언을 할 수는 있지만 거기까지. 그 이상은 오지랖이고 남의 인생에 대한 참견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완전한 해법 따위는 없다. 언제나 스스로 판단해서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할 뿐. 그래서 언제나 고민하고 좌충우돌 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위해 김어준은 말한다. '다들, 건투를 빈다, 졸라.'

블로그 이미지

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저자
김성근 지음
출판사
이와우 | 2013-03-18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쓸모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리더만 있...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인상깊은 구절

"세상에 소모품 인간은 없다. 소모품으로 쓰려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선수들을 위해서 허리를 굽힌 적은 많았지만 내 명예를 위해 누군가에게 허리를 굽힌 적은 없었다."

 


 

내용 요약

  이 책은 야신 김성근 감독이 자신의 감독생활을 정리하며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열명의 제자들과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김성근 감독의 리더관을 풀어써서 어렵지 않지만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그 열명의 제자들이 김성근 감독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함되어 있어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리더는 어떠한 사람인가? 김성근 감독은 "사람을 제대로 쓰는게 리더의 핵심"이라고 이야기 한다. 아주 소규모의 조직이라면 모를까 모든 일을 리더 한 사람이 다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을 제대로 쓰는 것이 리더가 가져야할 제일 큰 덕목이다. 사람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 "리더는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의 "장점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한다.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맡겨만 놓으면 리더의 역할을 다하는 것인가? 아니다. 역할에 맞는 "권한과 책임을 같이 배분해야 한다." 책임 없이 권한만 주면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지고, 권한은 없이 책임만 주면 일을 할 수 없게된다. 그럼 권한과 함께 모든 책임을 아랫 사람에가 분배해도 되는가? 김성근 감독은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게임은 선수가 하는 거고, 승패는 감독이 책임지는 거다." 개개인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한 책임은 일을 맡은 사람에게 묻지만 결국 최종적인 책임은 리더 자신이 지는 거라는 뜻일 것이다.

 

  김성근 감독의 리더십의 중심은 '사람'이다. 유명한 일본의 기업가를 만난 젊은이가 "○○전기는 무엇을 만드나요?"라는 질문에 "우리 회사는 사람을 만드는 곳입니다. 그리고 전기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람'이 있어야 야구도 하고 휴대폰도 만들고 반도체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사람'을 '소모품'으로 쓰려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선수들에게는 그들 각자가 자신만이 가진 쓸모가 있다. 그걸 찾아주는 것. '그 사람'의 '그 능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김성근이 생각하는 리더의 참 모습이다.

 


 

  책을 읽는 동안 대한민국 지도자 계층이라고 하는 소위 엘리트 집단에 참 리더가 있을까 의심이 되었다. 특히 이번 세월호 사건을 통해 보여준 박근혜 정부의 무능한 대응이 오버랩 되면서 이 정부에 정말 리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 정부의 가장 문제 점이 바로 사람을 제대로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것 처럼 해경 청장도, 해수부 장관도 그 직책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의 보고를 들었을 박근혜씨는 사건이 발생한지 8시간 후 이경옥 안전행정부 차관과의 대화에서 "구명조끼를 학생들이 입었다고 하던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라고 물어 자신이 이 사건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전 국민에게 노출시켰다.

 

  일을 시켰으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함께 줘야하는데, 박근혜씨의 경우 권한은 주지도 않고 4월 17일 진도를 방문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책임자를 엄벌하겠다"며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장수 전 국가 안보실 실장도 "청와대가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라는 말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최고 책임자가 자신의 책임을 밑으로 떠넘기는데 그 밑에 사람이라고 그 책임을 지려고 할까? 알다시피 그 후로 각 부처들은 자신의 책임을 최소화 하도록 소극적 대처밖에 하지 않앟다. 노무현 정부시절 대통령께서 삼성-허베이스피릿호 기름유출 사고 때 태안에 가서 모든 책임은 당신이 질테니 일본에서 빌려오든 중국에서 빌려오든 가능한 모든 자원을 쏟아 부어서 유출된 기름의 확산을 막으라고 하신 것과 정말 대조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정부의 대처를 보면 이 정부의 중심에는 '사람'이 아니라 '내 지지율' 혹은 내 지지율 지켜줄 '기춘이 오빠' 밖에 없는 듯하다. 정부의 대응의 중심에 '국민'이나 '진심'따위는 없어 보인다. '국민'은 언론을 통제하여 속여야 할 대상이고 '국민'을 속이기 위해서는 지금 위기를 벗어날 어떤 거짓말이라도 상관 없는 것 처럼 행동한다. 아직도 이런 박근혜씨를 옹호하고 희생자 가족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는 일부 대형 교회 목사들과 교수들을 비롯한 사회 지도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자성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지만 '기춘이 오빠'는 이제 버릴 때도 된거 같다.

블로그 이미지

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


노예 12년

저자
솔로몬 노섭 지음
출판사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4-02-1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노예해방 전쟁의 도화선이 된 작품!“흑인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자...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인상깊은 구절

"제가 딱 한마디만 하죠. 전부 다 잘못된 겁니다. 전부 다요. 노예 제도 속에 정당하거나 정의로운 요소는 단 하나도 없어요. 이 노예 제도는 말이죠, 도대체 무슨 권리로 검둥이들을 그렇게 마음대로 부리는 겁니까?"... "헌법에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구속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고요. 물론 당신은 재산을 잃는 게 겁나겠지만, 자유를 잃는 게 훨씬 더 겁나는 일이랍니다."

 


 

내용 요약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화제를 모았던「노예 12년」을 읽었다. 책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북부에서 자유인으로 살고 있던 저자 솔로몬 노섭이 납치되어 남쪽에 노예로 팔리게 되고 극적으로 자유인으로 돌아오기까지 12년 동안 노예로 살았던 처절하고 끔찍한 시간의 기록이다.

 

  솔로몬 노섭은 노예 제도가 폐지된 뉴욕 주에서 태어나 30년을 넘게 자유인으로 살아가던 흑인 바이올린 연주가였다. 그런 그에게 두명의 백인이 찾아와 자신들과 함께 워싱턴에 가서 연주를 하고 돈을 벌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 선택이 가져올 무자비한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채 그들을 따라서 워싱턴으로 돈을 벌러갔던 그는 자유를 박탈 당한 채 워싱턴의 노예 상인 제임스 H 버치에게 팔리게 된다. 버치는 그와 몇명의 노예들을 배에 태워서 사업 동료인 뉴올리언스의 노예 상인 시어필러스 프리맨(노예 상인의 성이 Freeman이라니. 이 얼마나 안성맞춤형 성인가.)에게 건낸다.

 

  프리맨의 노예 수용소에서 그는 그의첫번째 주인 윌리엄 포드를 만나게 된다. 노섭은 그의 첫번째 주인인 윌리엄 포드에 대해서 상냥하고 품위있고 인간적인 주인으로 묘사한다. 그는 가족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평생 포드의 노예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포드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런 포드도 그런 환경에서 나고 자라서 노예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종으로 부리는 일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포드의 재정상태가 나빠져서 노섭은 두번째 주인인 티비츠에게 팔리게 되고 마지막으로 엡스에게 팔리게 된다. 두명의 주인들은 전형적인 노예 주인으로 "노예는 가격만 더 셀 뿐 집에서 기르는 개나 노새와 다름없다고" 여기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노예들의 조그마한 실수에도 가혹한 형벌과 폭력을 일삼았고, 과도한 노동과 무자비한 폭력을 피해 도망치다 잡혀 온 노예는 죽기 전까지 채찍질을 하였다. 그렇게 도망치다 잡혀온 노예는 "상처가 욱신거릴 때마다 무시무시했던 처벌을 떠올리며 다시는 도주 따윈 생각도 안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며 여자 노예는 노리개로 삼기도 하였다. 그들은 노예를 쉽게 죽이지는 않았는데 이는 노예의 생명이 귀해서가 아니라 노예가 자신의 큰 재산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을 뿐 자신의 노예를 죽이는 데에 법이나 도덕, 양심의 가책 등 다른 걸림돌은 없었다. 그들의 자식 또한 그런 환경에서 자라 노예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채찍질을 하고, 이를 보는 아비는 흐뭇한 마음으로 그 자식을 바라보니 그들의 잔인한 본성이 더욱 악해지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희망을 잃은 채 겨우 살아가던 노섭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구세주와 같은 케나다 출신의 백인 배스를 만나 그를 통해 노섭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부칠 수 있게된다. 솔로몬 노섭은 그의 사정을 알게 된 뉴욕의 많은 사람들과 변호사 헨리 B 노섭의 도움으로 지옥과 같은 삶에서 자유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 몇번을 책을 놓아야 했는지 모르겠다. 눈물이 나고, 화가나서 더 읽어 내려가지 못할 때도 몇번이나 있었다. 지금 와서보면 말도 안되는 인종차별이 불과 100여년 전에는 일상생활 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00여년전에 지구 반대편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인종차별은 어렵지 않게 마주 할 수 있다. 흑인들(아프리카인을 차별하는게 아니라 흑인을 차별하는 거다. 아프리카에서 온 백인들은 차별받지 않는다) 그리고 동남아 사람들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차별은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백인에 대한 사대주의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인종차별의 표현이다.

 

  타인종 또는 외국인에 대해서만 차별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일베忠들의 이유 없는 전라도, 장애인, 여성에 대한 차별은 날이 갈 수록 그 강도가 세어지고 있고, 잔인성 또한 증폭되고 있다. 그들은 노예 12년에 나오는 티비츠나 엡스와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일베忠이 아닌 일반인들은 차별에서 자유로운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부모의 재력, 학벌, 성적, 직업, 연봉 등등 많은 것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또 차별한다. 어쩌면 그 많은 차별의 이유 중 몇가지는 100년이 지난 후에 우리의 뒷 세대가 어떻게 저렇게 비인간적인 차별을 했냐고 분노할지도 모를 일이다. 솔로몬 노섭의 말 처럼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관습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윌리엄 포드처럼 선한 사람도 노예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 우리는 좀 더 많이 사유하고 잘못된 점을 고치려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닐까?

 

 

 

 

블로그 이미지

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