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도 1년이 지났다. 추모하기도 부족한 시간, 유가족들은 거리로 나왔다. 풍찬노숙을 하고, 도보행진을 하고, 삭발을 했다. 단원고 학생 희생자 김시연양의 어머니 윤경희씨를 만났다. 삭발한 머리가 까슬까슬하게 자라있었다. 시연 엄마는 우리는 자식 잃은 부모들이다. 그런데 내 자식이 왜 죽었는지, 춥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왜 그렇게 죽어가야 했는지 아직도 밝혀진 것이 없다며 먼저 입을 뗐다.


시연이 엄마 윤경희 씨


쇼하고 있네

  참사가 나던 날, 엄마는 소식을 듣고 바로 팽목항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세 시 쯤이었다. 먼저 진도체육관에 도착해있던 가족들이 팽목항은 접근이 금지돼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팽목항에 가보니 통제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180명의 학생이 구조돼서 오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만 흘러가고, 아이들은 오지 않았다.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경찰들에게 물어도, 119 구조대에 물어도 확실한 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해경은 구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며 세월호 관계자들과 해경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밀기에 급급했다. 사고 현장에 있었던 분이 배는 이미 완전히 침몰해서 꼬리만 나와 있다고 했다. 팽목항에서 진행되는 구조에 대해서 쇼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사비를 털어 민간어선을 빌렸다. 남편과 사촌오빠(사촌오빠네 딸 예지양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됐다), 몇몇 단원고 학생 부모들이 함께 현장으로 가기로 했다. 기자 한 명이 동승하겠다고 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겠다고 약속했다. 헬기 1, 10여척이 세월호 주변에 있었다. 구조 활동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도 기름이 유출되면 배 안의 아이들이 위험할 수 있다며 기름 방제 작업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TV에서는 수백 척의 배와 헬기가 총동원돼 활발하게 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고 떠들고 있었다. 동승했던 기자는 뭍으로 나온 뒤 사라졌다.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팽목항에 나와 있던 언론에 현장 상황을 알렸다. 하지만 구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진실은 다 편집하고 유가족들이 울고 소리치는 모습만 보도했다. 이튿날부터는 한국 언론과는 인터뷰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유가족들은 카메라를 부순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안전사회 건설은 시연이가 준 숙제

  시연이는 6일만에 나왔다.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복구한 휴대폰에서 동영상 3개와 사진들 세월호 참사에 관한 기사를 캡쳐한 것들이 나왔다. 기울어지는 세월호 안의 광경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끈 없고, 지퍼 없는 다 떨어진 구명조끼를 입은 아이들의 모습이 공개됐다. 엄마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는 안전사회를 만드는 것이 시연이가 남겨준 숙제라고 생각했다.


  “그 숙제를 푸는 일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고, 시연이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일이다. 진상규명을 하고, 세월호를 인양하고, 안전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내놓을 수 있다.”


  진상규명을 해야,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진단을 해야 고칠 수 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아직도 왜 침몰했는지, 왜 구조에 실패했는지, 밝혀진 것이 없다. 수많은 의문만을 남겼다. 반쪽짜리 특별법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완벽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는 진상이 규명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지난 3월말, 조사를 받아야 할 해수부와 해경의 공무원들이 특별조사위원회에 참여하게 하는 특별법 시행령안이 나왔다. 언제든 만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은 만나주지 않았다. 진상 규명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없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다.


  아직 9명의 실종자가 돌아오지 못했다. 시연이 엄마는 모든 희생자들이 유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난해 11, 정부는 선체인양을 해야만 시신을 수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양도 수색 방법의 하나라고 실종자 가족들을 설득했다. 유품을 건져내면, 시궁창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속에 실종자 가족들의 아이가, 가족이 아직도 있다.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그 곳에 가족을 더 두고 싶은 가족이 있겠나. 하지만 끝까지 찾아내겠다는 약속을 믿고 실종자 가족들은 더 이상의 수색을 중단했다.


  시민들 중엔 박대통령이 해준다고 했다. 시끄럽게 하지마라고 호통을 치고 가시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 선체 인양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지겹다고 한다. 몰라서 그런거다. 아무 것도 밝혀진 것 없고, 인양은 결정되지 않았다. 세월호는 아직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다.


  정부여당은 슬그머니 돈 이야기를 꺼냈다. 인양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보상금 액수를 이야기 하면서 가족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를 돈 문제 때문인 것처럼 호도했다. 그래도 인양에 대해 찬성하는 국민의 여론이 높았다. 그제서야 기술 검토중이라고 발표했다. 사고가 일어난 지 1년이고, 실종자 수색작업을 중단한 것이 5개월 전 일이다. 아직 기술 검토하고 있다는 발표를 엄마는 믿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어서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도, 세월호 선체 인양도, 세월호 이후의 안전사회 건설도 다 물거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거리로 나왔다. 풍찬노숙을 해도 언론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삭발을 결심했다. 안산 분향소에서 광화문까지 12일 도보행진을 했다. 1주기 추모제에 대통령은 오지 않았다. 짧은 담화만 남기고 남미 순방길에 올랐다. 경찰은 차벽을 치고 유가족을 고립시켰다. 유가족과 시민들을 향해 캡사이신을 뿌려댔다.


  엄마는 그래도 지칠 수가 없다. 또 다른 유가족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지칠 수가 없다. “유가족들을 거리로 내모는 국가가 어디 있나. 우리처럼 아픈 유가족들이 우리 사회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으면, 이런 고통은 우리만으로 끝났으면하는 바람이다.

 

시연이는 엄마의 모든 첫 경험

  시연이를 낳았을 때 엄마는 불과 스물 한 살이었다. 엄마에겐 첫 딸이었고, 할머니에겐 첫 손녀였다. 그래서 시연이는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컸다. 엄마는 시연이 덕분에 많은 첫 경험을 했다. 시연이가 처음 기던 날,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준 날, 삐뚤빼뚤 서툰 글씨의 편지를 받던 날. 엄마는 그 모든 경험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시연이는 고등학교 2학년 나이에도 집에 들어오면 아기 같은 면이 있었다. 한창 친구들과 놀다 녹초가 된 몸으로 들어오면 팔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어리광을 부렸다. 아침이면 엄마에게 머리를 맡겼다. 엄마는 매일 시연이 머리를 말리고, 빗질하고 고데기로 말아줬다. 돌아보면 귀찮아서 엄마에게 맡겼다기보다는 엄마의 손길을 좋아했던 것 같다.


  집에서는 아기 같던 시연이는 밖에서는 리더십 있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반장을 도맡아했다. 단원고에 들어가고 난 뒤에는 연극부에 들어갔다. 2학년 때는 연극부 부장을 맡기도 했다. 후배들 오디션을 보고 난 후 설레던 시연이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시연이는 원래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어렸을 때는 아빠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하더니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기타를 배웠다. 1학년 때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음향감독을 맡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미디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학원에도 다니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착실히 준비했다.


  수학여행 가기 전 날까지도 음악 편집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출 곡이었다. 다들 수학여행 가서 입을 옷, 먹을 간식을 챙기던 그 시간까지도 음악 편집에 몰두해있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지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열심히 편집해서 갔던 음악을 틀어보지도 못하고 사고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시계, 4시 16분에 멈춰있다

 

시연이가 남겨준 선물

  지난해 926, 돌아온 시연이의 생일. 엄마는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시연이의 이름으로 음반이 출시된 것. 이 앨범에 실린 ! 이 돼지야는 시연이가 작사·작곡한 곡이다. 서촌갤러리 장영승 대표가 생전에 스마트폰으로 녹화한 영상을 보고 음반을 기획하게 됐다. 시연이의 목소리를 분리하고 새롭게 편곡된 반주를 입히는 작업은 작곡가 윤일상 씨가 맡았다.


  수익금 같은 것엔 일절 욕심이 나지 않았다. 수익금은 전액 세월호 참사 실종자 가족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엄마는 그저 시연이의 꿈이 이뤄진 것, 그리고 언제든 시연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했다.


  큰 선물을 받았지만 엄마는 시연이의 생일을 조용하게 보냈다. 시연이가 좋아하는 호박죽, 미역국 등으로 간소한 생일상을 차렸다. 납골당에 찾아갔다. 엄마는 납골당에 가면 꼭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차가운 유골함이라도 만지고 싶다. 유골함을 껴안고 이야기를 나누고, 뽀뽀도 한다. 음반으로 나온 노래를 들려주고 또 들려줬다.


  시연이는 엄마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고 갔다. 사진도, 동영상도 많이 남겼다. 시연이의 방에는 온통 낙서 투성이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시연이네 방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 때부터 방 구석 구석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아하기도 했는데, 낙서 내용을 보니 정말 재미있었다. 벽에도, 책상에도 아이들의 재기발랄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엄마는 그런 흔적들들 곳곳에 남겨준 시연이가 고맙다.

 

남겨진 가족들의 지난 1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되면 엄마는 너무 아프다. 여지없이 밝아오는 아침 햇살이 야속하다. 안방 문을 열면 바로 맞은편에 시연이의 방이 보인다. 아직도 침대에서 자고 있을 것 같은데, 학교 갈 준비하자고 깨워야 할 것 같은데, 시연이의 침대는 비어있다.


  단원고가 집에서 멀고, 교통편이 좋지 않아 엄마는 항상 시연이의 등굣길을 함께 했다. 학교까지 운전해주는 그 길이 엄마와 시연이의 드라이브였다. 시연이는 조수석에 앉아 재잘재잘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고가 난 뒤, 등교 시간이 되면 엄마는 바보가 됐다. 열 달 동안 그렇게 멍하게 있었다.


  동생 이연이는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이 아팠다. 엄마 아빠가 출근하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던 언니가 그렇게 갔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팠을 것이다. 엄마도 너무 아파 이연이를 잘 보살피지 못했다. 친척들이 정성으로 보살폈지만,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스트레스로 인해 장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 장기간 통원치료를 하고, 입원을 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아프다.


  이연이는 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언니가 들어가고 싶었던 학교였다. 이연이가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 엄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침이면 이연이를 깨우고, 젖은 머리를 말려준다. 빗질을 하다 또 시연이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이연이가 속상할까봐,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한다. 시연이 곁으로 가고 싶단 생각도 많이 했다. 이연이가 없었더라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울음을 참고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몇 번이고 세수를 한다.

 

사고 이전 나는 이기적이었다

  엄마는 세월호 광장에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용기를 얻는다. 처음에 유가족들 외에 다른 사람과 잠깐 대화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불쌍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누군가 수군대는 것만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서명 용지를 내미는 것도 낯설었다. 누가 욕이라도 하고 지나가면 서럽고 비참했다.


  사고 나기 전에 엄마는 이기적으로 살았다. 우리 가족만 행복하게, 안전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고가 난 이후 서로 돕는 삶에 대해, 함께 사는 사회에 대해 배우고 있다. 이 세상에 고마운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희생자 가족들보다 더 열심히 서명 받는 자원봉사자들, 간담회에 와서 귀기울여주는 시민들을 보며 지난날의 이기적인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 엄마는 세월호 문제가 해결이 된 후에는 받은 만큼 사랑을, 관심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세월호 참사가 난 지도 1년이 지났다. 1년이란 것, 지난해 416일에 시간이 멈춘 유가족들에게는 숫자에 불과하다. 엄마는 하루 빨리 세월호 선체를 인양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규명되길 바란다. 그런 이후에라야 시연이를 추모하며 마음껏 울 수 있으니까.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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