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가족들이 광화문 광장에서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세월호 1주기, 추모를 해야 할 기간에 농성을 하게끔 만드는 정부가 유가족들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번엔 2학년 3김도언 학생의 어머니를 만나봤다.


4월 3일. 광화문 광장 퍼포먼스

 


우리 도언이는

  엄마가 기억하는 도언이는 구김 없고, 정의감 있는 아이였다. 집에서는 동글동글 도언이라고 불렀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동그란 안경을 썼기 때문. 성격도 동글동글해서 친구도 많았다. 바른생활부 활동도 하고, 연극도 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던 아이였다. 1학년 때는 연극을 해서 금상을 받아오기도 했다. 전교에서 도언이를 모르는 친구들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피아노 연주도 잘 하고, 춤도 잘 추고, 사물놀이도 잘 하고. 다방면에 재능이 있던 도언이. 엄마, 오빠, 이모, 사촌오빠들 까지 6명이 한 팀이 되어 사물놀이 봉사를 다니기도 했다. 엄마는 그때 그 시절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도언이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누구보다 친근한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과 소통하고 싶어했다. 누구보다 선생님을 잘 따르는 아이기도 했다. 그 또래 아이들이 선생님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다반사. 하지만 도언이는 진로와 관련해서는 꼭 선생님하고 상담했다. 선생님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난 뒤 다은이 친구들로부터 알게 된 사실 하나. 친구들 사이에서 상담사로 통했다는 것. 고민이 있는 친구들은 항상 도언이에게 이야기를 했다. 도언이는 친구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조언도 해줬다. 친구의 비밀을 다른데 가서 떠벌리는 성격도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아이였다. 외가쪽에서 막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어른을 만나면 배꼽인사를 할 정도로 예의가 바른 아이였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 딸을 잃었으니, 엄마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하다.

 

  아들은 든든한 맛이 있고, 딸은 살가운 맛이 있다. 도언이 오빠도 있지만 도언이는 특히 친구 같은 자식이었다. 도언이랑 커플링도 맞췄다. 도언이가 엄마를 졸라서 맞추게 된 것. 도언이는 학생들 하는 티타늄 같은 것으로 하려 했는데, 엄마의 제안에 화이트 골드로 맞췄다. 도언이는 그 커플링을 항상 손에 끼고 다녔다. 엄마와 교감하는 징표였다. 지금 반지는 평택 추모공원에 도원이랑 함께 있다.


  도언이는 엄마의 살아가는 낙이자 의미였다. 항상 도언이를 끼고 잤다. 자다가도 뽀뽀하고, 만질 정도로 엄마와의 스킨십에 스스럼이 없을 정도였다. 도언이가 잘 때 볼을 만지면 ~하면서 잠투정을 했다. 그러다가도 엄마야하면 안도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또 엄마가 이불을 안 덮고 자면, 조심히 이불을 덮어주던 속 깊은 아이. 그런데 지금은 손을 대도 없으니 미칠 노릇이다. 자다가 습관적으로 손을 뻗는데, 그 곳에 도언이가 없다. 엄마는 자신을 너무나 닮은 딸의 사진을 휴대폰에 저장해 놓았다. 포토샵으로 수정을 하지 않아도 예뻤던 딸. 하루 종일 그 사진을 보고 있어도, 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지난 1년의 기억

  도언이가 나오기 전까지, 물에서 시신이 올라오면 가족들이 확인을 하러 가야했다. 특이사항이 도언이와 비슷한 여학생의 시신이 건져질 때마다. 마음 약한 엄마가 무너질까봐 도언이 오빠가 그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오빠라고 하지만 아직 20대 초반, 시신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힘든 내색하지 않고 감당해냈다. 그 슬픔과 분노가 어느 정도의 크기일지, 엄마도 가늠하지 못한다.

 

  오빠는 제대로 된 심리치료도 받지 못하고 작년 6월 군에 입대했다. 연기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17년간 함께 살았던 동생이 죽었는데,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가족들의 곁에 남아 힘을 보태려 했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설득했다. 제대하고 나왔을 때도 엄마 아빠가 밝히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때 행동하라고 했다. 권리는 보호해주지 못하면서 의무를 강요하는 나라가 싫었지만, 의무를 다 해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입대하는 아들이 엄마는 걱정됐다. 혹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돌발행동을 할까봐. 그랬을 때, 혹시나 세월호 유가족 전체가 욕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 여느 엄마들 같았으면 몸 건강하란 말하기에도 바쁜 그 시간, 엄마는 군대에서 문제 일으키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아들이 입대한 지 벌써 10개월이 지났지만 면회 한 번 찾아가지 못한 것이 엄마는 못내 미안하다. 그런 상황을 만드는 정부가 밉다. 아들은 1주기에 맞춰 휴가를 나온다. 휴가 나온 아들을 위한 음식 장만할 시간도 없는 현실이 엄마는 또 미안하다.

 

  엄마는 동네에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전에는 편하게 하던 행동들도 조심하게 된다. 주위 시선을 자꾸 의식하게 된다. ‘딸을 잃었는데 저렇게 행동해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동네 슈퍼도 가지 않고, 세탁소도 가지 않는다. 사고에 대해 물어볼까봐, 부담스럽다.

 

  이런 이유로 유가족분들 중에는 이사를 하신 분들이 많다. 도언이네도 이사를 하려고 생각했다.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의 반대로 없던 일이 됐다. 아빠는 도언이 흔적이 남아있는 집을 떠나기 싫다. 도언이의 흔적이 남은 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사는 것도 싫었다. 도언이 방은 그대로 뒀다. 책상, 침대, 옷장도 그대로 뒀다. 도언이 신발, 우산 할 것 없이 도언이가 사용하던 모든 물건도 모아뒀다. 학교에서 신던 실내화도 집으로 가져왔다. 심지어 사용하던 칫솔도 그대로 뒀다. 그런데 도언이만 없다. 그래서 물건들로 가득찬 그 방은 엄마에게 그저 빈 방이다.

 

  돌아온 도언이의 생일. 엄마는 생일상을 집에서 직접 차렸다. 살아 있을 때도 항상 집에서 생일상을 차려줬으니까. 도언이가 좋아하던 김치찌개, 카레, 튀김, 잡채 등 한 상 차렸다. 김치찌개는 특별히 아빠가 끓였다. 도언이가 아빠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좋아했기 때문. 생일상을 도언이 책상 위에 차려줬다. 다른 부모님들은 함께 생일잔치를 하고, 서로 챙겨주기도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도언이 생일은 우리 가족끼리 있고 싶었고, 다른 가족들을 만나면 더 아플 것 같았다. 그리고는 도언이가 있는 평택 추모공원에 다녀왔다.

 

  엄마는 도언이가 매 순간 그립고, 또 그립다. 특히 아침에, 애들 학교 가는 시간에 생각이 많이 난다.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미어진다. 매일 데리고 등교하던 기억이 떠올라 더 힘들다. 오전 여섯시 반, 도언이랑 함께 집을 나서던 그 시간. 엄마는 또 도언이 방에서 눈물을 훔친다.


4월 5일. 안산~광화문 1박2일 도보행진을 마친 유가족들

지난한 싸움

  사고가 난 뒤 엄마는 운영하던 가게를 닫았다. 진행하던 건강 관련 강의도 접었다. 도언이의 장례를 치르고,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슬렀다. 지난 6월이었다. 엄마는 아빠랑 진도 체육관, 팽목항을 돌아다녔다. 음식 싸들고,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다녔다. 도언이 친구들이고, 선생님이니까. 수중수색이 종료될 때까지 그렇게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엄마 아빠도 위로를 많이 받았다.

 

  엄마는 연약하지 않다.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1920일 동안 도보행진을 했다. 물론 힘들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것조차 힘든 순간도 있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그 물집이 터지고. 근육통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는 도언이 생각하면서, 실종자 분들 생각하면서 걸었다. 아침이면 근육 이완제를 먹었다. 저녁이 되면 파스를 붙이고. 아침에 또 일어나면 힘들지만 약 먹고, 함성 한 번 지르고, 힘을 얻어 걸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겠지, 정부에서 세월호 인양 등 문제를 해결해주겠지. 기대하며 걸었다.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 전국에서 4000명이 넘는 분들이 유가족들을 맞이했다. 도보행진은 학부모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언론에서는 보도해주지 않았다. 제대로 보도했다면 현재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추모기간에 쓰레기 시행령안이나 배·보상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가족 마음을 제대로 전해줬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할 것을 요구했다.

 

교육계 변화해야

  엄마는 세월호 이후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계는 세월호 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교육청의 허가를 받고, 학교에서 아이들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겠다고 인솔하고 갔지만 지켜주지 못했다. 엄마는 학교를 믿고 애들을 보냈다. 하지만 아직 교육부는 변화지 않고 있다.

 

  “아이들 안전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교과서적인 내용 말고 실제 위험이 닥쳤을 때, 생명을 지키는 방법과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또한 세월호의 진실을 가르쳐야한다. 세월호 사고의 원인과 현재 과정을 알려줘야 한다. 진실을 알아야 아이들이 행동할 수 있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엄마는 교육청 등 교육계와 연계된 활동을 많이 한다. 지난 1일과 2일 도언이 엄마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청년 문화 콘서트 기억과 약속에 참석했다. 1일에는 약 1200명의 청년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월호 사고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2일에는 의정부에 있는 북부 청사에서 교장선생님, 교육부 직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교장선생님들 모시고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경기도 이재정 교육감이 추진한 덕분에 마련된 자리였다. 세월호에 대해, 교육부의 부패, 세월호 이후 달라져야할 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 일정 때문에 엄마는 삭발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마음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오는 길에 유가족들이 단체삭발식 하는 모습을 인터넷 생중계로 봤다. 너무 마음이 미어졌다. 유가족들이 삭발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그렇게 몰아넣는 정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1주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추모기간에 추모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부는 느닷없이 배·보상 이야기를 꺼냈다. 돈을 흔들며 유가족을 모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론은 분별없이 배·보상에 관련된 뉴스만 보도했다. 마치 우리가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나선 것이 더 많은 보상을 받아내기 위함인 것처럼 비쳐지게 만들고 있다.


4월 6일. 광화문 촛불 문화제

도언이만을 위해 울고 싶다

  비가 오면 엄마는 제일 먼저 도언이 우산이 생각난다. 도언이는 노란, 빨간, 하얀 우산 세 개를 준비해두고 옷에 맞춰 들고 다닐 정도로 멋쟁이였다. 우산에는 예쁜 공주 도언이라고 표시해 두었다. 우산 뿐만 아니라 자기 물건에는 꼭 예쁜 공주 도언이라고 표시를 했다. 하늘나라에도 비가 올 텐데, 그 곳에서 우산은 쓰고 있을까. 도언이 우산은 내가 쓰고 있는데혹여나 비를 맞고 있지 않을지 여느 엄마와 같은 걱정을 한다.

 

  또한 이 비가 침몰하는 대한민국에 단비가 되어주기를 기도한다. 물은 생명이다. 메마른 대지에 비가 쏟아지면 그 토양에서 생물이 다시 살아난다. 메마른 대한민국에 생명을 불어넣는 근원이 되기를 바란다. 하늘에서 아이들이 도와줄 거라고 믿는다.

 

멈춘 시간 움직일 수 있는 건 언론

  그날 모든 시간이 멈춰졌다. 엄마 아빠들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생각도 멈춰버렸다. 작년 416일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게 중요한 사실이다. 애들 희생된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진상을 밝히고자 1년을 버텨왔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멈춘 시간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언론이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지만 국민들도 깨우칠 수 있다. 우리는 그 시계를 움직이게 하려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다.”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데,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다. 언론이 제대로 서있다면 지금처럼 정부에서 추모기간에 배·보상 이야기를 했겠나. 빨리 진상규명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면 온전히 내 딸 도언이만을 위해 울 수 있으니까. 기도할 수 있으니까.”

 

  엄마는 지금 울 수가 없다. 밖에서는 절대 울지 않는다. 울면 지치니까, 지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도언이 방에서 소리 죽여 운다. 엄마는 진상이 규명되고 도언이만을 위해 울 시간이 오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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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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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광화문의 날씨는 흐렸다. 봄바람 같지 않게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다.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 연합예배 준비 위원회의 주관으로 부활절 예배가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약 8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해 예수의 부활과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렸다.


  예배가 마칠 즈음 세월호 유가족 250여명과 함께 도보행진을 한 시민들이 세월호 광장으로 들어섰다. 광화문 광장에서 기다리던 시민들은 상복을 입고, 영정사진을 든 유가족들을 박수로 맞았다. 지나가는 유가족들의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건네고, 포옹하며 위로했다. 유가족 중 일부는 오랜 도보행진에 물집이 잡힌 탓에 걸음을 절기도 했다.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 앞에 자리를 잡고 촛불문화제를 진행했다.


4월 5일. 안산~광화문 1박2일 도보행진을 마친 유가족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딸 예은이의 영정사진을 안고 시민들 앞에 나섰다. 그는 쉰 목소리로 예은이의 꿈이 가수였다. 노래하고 즐기는 자리는 아니지만 많은 분들 앞에 예은이와 함께 서고 싶었다흐린 날씨에도 세월호 광장을 가득 채워준 많은 시민분들께 감사하다. 하지만 더 많은 분들이 나서주셔야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며 더 많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촉구했다.


  전명선 4.16가족협위회 대책위원장은 국민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설 수 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어 세월호 진상규명이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첫 걸음이라며 진상규명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진상규명의 의지를 밝혔다.


  이번 12일 도보행진에 함께한 시민 안승혜씨는 오는 동안 비가 오락가락 했다. 영정사진에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맞을까, 꼭 안고 가는 유가족들을 보며 눈물이 흘렀다우리는 세월호 유가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살고 있다. 더 많은 빚을 지기 싫어 함께 걸었다고 세월호 유가족의 12일 도보행진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무대에 오른 세월호 가족들은 정부에 욕을 하기도 했다. 유경근 위원장은 이제껏 욕을 참았다. 할 말이 많아도 참았다. 참고 또 참으면 국가가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하지만 우리가 속았다. 앞으로는 해야 할 말들을 가감 없이 하겠다고 밝혔다.


4월 5일. 안산~광화문 1박2일 도보행진을 마친 유가족들


  광장 옆에는 119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한 시민이 구급차에 다가가 치료를 요구했다. 12일의 도보행진 동안 8개의 발가락에 물집이 잡힌 것. 본인을 트위터리안 서패후라고 소개한 시민은 군대 간 아들과 고등학교 2학년 딸을 키우는 평택에 사는 평범한 엄마다. 내 자식도 언제든지 이런 가고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엄마로서 아이들을 위해 안전사회를 건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2일간의 도보행진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한편, 세월호 유가족들은 6일 세종시 청사로 내려가 해수부에 항의 방문 할 예정이다. 오는 11일에는 집중 촛불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유경근 위원장은 “11일에는 오늘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야 한다며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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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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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일 광화문 광장에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삭발식이 거행됐다. 이미 아이들과 함께 죽은 목숨, 기꺼이 내던질 각오가 되어있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단원고 희생자 이재욱 학생의 엄마 홍영미씨도 이날 길었던 머리를 다 밀어버렸다. 싹둑 잘린 머리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단원고 이재욱 군의 엄마를 만나봤다.


단원고 故이재욱 군의 엄마 홍영미씨


  재욱이 엄마는 아직 삭발한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화장실 갔을 때 살짝 봤다.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조금 다르더라. 내 머리가 뒤통수가 납작하다. 재욱이도 뒤통수가 납작하다며 낯선 모습 속에서도 아들을 찾았다.


우리 재욱이는…

  엄마가 기억하는 아들 재욱이는 밝고 자유롭고 건강한 아이였다. 재욱이는 워낙 활발해 이런 저런 활동도 많이 했다. 1학년 때는 2학년이었던 누나와 함께 학생회 활동을 했다. 재욱이가 학생회에 들어갔던 이유는 축제를 멋지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 홍보부장을 맡아 제 역할을 충실히 했고, 덕분에 그 해 단원고 축제는 어느 때보다 성공적으로 마쳤다.

 

  대외 활동도 활발했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코스프레 축제에도 3년간 친구들과 함께 쫓아다녔다. 파쿠르 전국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했다. 파쿠르는 주변 환경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극복하는 훈련으로 스턴트맨처럼 벽을 타고 뛰어넘기도 한다. 재욱이는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이면 동아리 모임에 나가 비디오를 찍기도 했다. 홍씨는 사고가 났을 때 동아리 친구들이 많이 찾아와줬다며 분향소에 찾아와 함께 힘들어하고 울어준 아들의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재욱이는 또 애인처럼 살가운 아들이었다. 엉덩이나 팔뚝 같은 데가 튼튼했는데, 엉덩이를 팡팡 때리에이엄마!” 하면서도 엄마와의 그런 스킨십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도 가끔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재욱이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엄마는 속상하다. “재욱이 사이즈만한 인형을 만들까하는 생각도 해봤다며 농담을 해본다.

 

  재욱이는 누나랑 방을 같이 썼다. 나이를 먹어가며 방이 필요해져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지만, 이사를 하게 됐을 때는 이미 사고가 난 이후. 엄마는 재욱이의 방을 꾸몄다. 방에는 평소 사용하던 물건들로 가득하다. 이사를 할 때면 의례 물건들을 버리지만 엄마는 아들의 물건을 작은 것 하나까지 놔두고 올 수가 없었다. 책상도, 옷장도 그대로 뒀다. 모든 게 다 그대로인데 재욱이만 없다. 엄마는 재욱이의 향취를 느낄 수 있을까 가끔 옷장을 열어본다.

 

지옥 같았던 지난 1

  지난 1년 재욱이네 가족의 삶은 지옥 같았다. 운동을 좋아해 건강에 자신이 있던 재욱이 엄마는 건강을 잃었다. 위도 아프고, 소화도 잘 안 된다. 물만 먹어도 살이 붙는다. 순환이 안돼서 그렇다. 세포 활성화가 잘되면서 노폐물들이 땀으로 배출이 돼야하는데 안되면서 결국 피부병이 생기는 단계까지 왔다. 아픈 몸을 이끌고라도 농성장에 나오는 것이 엄마는 좋다.

 

  엄마는 사고 당일의 기억은 떠올리기도 싫다. 그날은 몹시 추웠다. 몸도 추웠지만 마음까지 추웠다. 으슬으슬하고 세포가 떨렸다. 심장이 멎고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심정이었다. 재욱이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엄마니까. 그 순간부터 무너지고 엄마도 같이 죽었다. 그리고 삶의 목표를 잃었다.

 

  사고가 난 직후에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힘들었다. 재욱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정해야하니까. 잊기 위해 잠을 자고, 잊지 못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던 날들이 이어졌다. 재욱이가 좋아하던 치킨·피자를 시켜 먹을 때, 같이 갔던 음식점 앞을 지나갈 때면 잘 먹던 모습이 자꾸 떠오르다. 하루에 수십번은 냉장고 문을 여닫던 아이. 길을 가다 재욱이 또래의 아이가 보이면 가슴이 미어진다. 재욱이와 닮은 곳 하나 없는 그 모습에서도 재욱이가 떠오른다.


  사고 당시에 단원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누나는 상실감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재욱이 뿐만 아니라 250명의 후배를 한 번에 잃었다. 학생회, 동아리에서 친하게 지냈던 후배들도 다 잃었다. 한 달쯤 지나고 나서야 마음을 추슬렀다. 동생의 삶을 대신 살아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예전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절망감을 벗어나야했다. 현재는 어엿한 대학생.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누나로 살기 위해 목표했던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휴대폰 바탕화면에는 교복을 입은 재욱이가 누나와 함께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다. 엄마는 수시로 재욱이의 사진을 본다. 딸아이였다면 더 많은 사진이 남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학생증 사진이 다른 사진들보다 잘 나왔다. 이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사용될 줄 당시엔 누구도 몰랐다. 재욱이의 명예주민등록증에도 이 사진이 사용됐다. 고등학교 2학년 생일이 지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수 있지만, 재욱이는 주민등록증을 받아보지 못하고 떠났다.

 

재욱이의 첫 생일

  지난해 1219. 사고가 난 후 맞은 재욱이의 첫 생일. 먼저 경험한 주변 엄마들이 많이 걱정했다. 거의 매일 아이들의 생일이 돌아온다. 생일을 맞는 엄마들은 미친다. 첫 생일이니까. 아이 장례도 장례지만 첫 생일이 너무 힘들다고 먼저 경험한 엄마들이 위로했다. 평소 꿋꿋한 성격이기에 잘 견딜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1주일 전부터 이유 없이 아팠다. 재욱이 생일을 양력으로 챙겼는지, 음력으로 챙겼는지도 헷갈렸다. 가족들은 양력으로 챙겼다고 하는데, 자꾸 음력으로 챙겼던 것만 같았다. 불과 1년 전에 챙긴 생일인데. 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생일날 아침엔 미역국, 생선구이, 피자 등 재욱이가 좋아하던 것으로 상을 차렸다. 생일상을 가족끼리 함께 나눠 먹고, 납골당·분향소에 들러 다시 상을 차렸다. 재욱이 친구들도 찾아왔다. 재욱이랑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닌,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아이들이었다. 재욱이도 단원고에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독수리 5인방 엄마 아빠들도 재욱이의 생일을 함께 챙겨줬다. 독수리 5인방이란 재욱이랑 1학년 때 친했던 친구들 부모의 모임. 아이들은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라졌지만 똘똘 뭉쳐서 잘 다녔다. 그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애들 장례를 치르고 나서 5인방 부모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누구보다 서로의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주 모인다.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많은 위안을 받는다. 그렇게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다. 아이들 때문에 맺어진 부모들의 인연이 지금은 살아가는 동력이 됐다.

 

바라는 건 오로지 진상규명

  지난 1년간 세월호와 관련돼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가족들이 바라는 건 진상규명과 참사 이전과는 다른 안전한 대한민국 건설. 재욱이 엄마는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 이 두 가지만 옳은 방향으로 결정이 됐으면 삭발까지 할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모든 것들이 유가족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건지고, 장례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애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했는지 알아야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 움직이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경우를 목격하고 경험했다. 시간만 끌고 있지 진상규명은 하나도 되지 않고 있었다. 재판은 그 동안에 진행되고 있고.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될 거라고 믿었다.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부와 정치권은 차일피일 미뤘다. 언론들은 세월호 사건을 정치적 사건처럼 보도했다. 세월호 가족의 목적이 더 많은 돈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악질적인 기사들도 넘쳐났다. 여야는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하다 결국에는 반쪽짜리 특별법을 만들었다. 반쪽짜리 특별법을 가지고라도 어느 정도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정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안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진상규명이 될 거라는 기대의 조그마한 불씨마저 꺼뜨린 거다. 사고 후 현재까지의 상황이 완전한 속임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래서 엄마는 머리를 박박 깎았다.

 

  재욱이 엄마는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죽었다. 지금 내가 움직이는 것은 그 아이들을 살려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라고 밝혔다. “육신을 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해도 정신은 살려낼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이 과정이 아이들을 살리는 과정이다. 그러니 우리가 세월호를 어떻게 인양하지 않을 수 있겠나. 썩어가는 대한민국을 눈 뜨고 지켜볼 수는 없다. 양심이 회복되고 정부, 정치, 국민의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다. 지금껏 방관하며 살아와서 이런 꼴이 됐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지구는 계속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언론이 변해야 사회도 변해 

  삭발식날, 광화문광장은 기자들로 발 딛을 틈이 없었다. 이에 대해 재욱이 엄마는 우리 목소리를 한껏 냈다. 이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왔다는 게 조금은 위안이 됐다. 그 전에는 아무리 외쳐도 철옹성이었다. 평소에는 농성장에 찾아오는 기자들이 별로 없다. 오늘 많은 언론사에서 취재를 오는 것은 좋다. 하지만 제대로 보도가 될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며 언론행태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언론이 중요하다. 416일날도 언론만 제대로 보도 했더라면 살릴 수 있었다. ‘전원 구조 오보’, 책임 진 사람이 하나라도 있나? 세월호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왜곡한다. 마치 우리가 보상금을 때문에 이러는 것처럼 보도한다. 언론은 양심선언을 해야할 때다. 언론히 변해야 우리 사회도 변할 수 있다. 그러면 4.16 이후에 멈춰있던 시간도 흘러갈 수 있다”라며 언론의 각성을 촉구했다.


  삭발식이 끝나갈 무렵 내리던 비는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거세게 내렸다재욱이 엄마는 개인적으로 비 오는 것을 좋아한다재욱이가 옛날에 친한 친구들끼리 비가 쏟아질 때 맨몸으로 뛰어나가 개구쟁이 짓을 하며 동영상 촬영을 한 적이 있다그런 상황들을 알고 있으니까 비가 오는 것이 반갑다하늘나라에서 또 모여서 신나게 놀고 있겠구나 싶다실제로 세월호 100, 200, 300일 등 큰 행사 때마다 비가 왔다아이들이 응원을 해주는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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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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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4월이다. 기억하기 괴로운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되어간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시간은 고장난 시계 같다. 사계절의 변화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지난한 싸움 끝에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반쪽짜리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나마도 제정됐다는 사실에 진상규명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시키는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이 입법예고 됐다. 유가족들이 416시간 집중농성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농성중인 광화문 세월호 광장의 풍경을 담아봤다.



  오후 다섯시 경의 광화문 광장, 4월이 되었다고 제법 봄 날씨 같다. 바람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도 이전처럼 외투를 단속하지 않는다. 교복을 입은 중고생들이 세종대왕상 앞에서 셀카봉을 들고 활짝 웃는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사진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의경들은 일사분란하게 이동한다. 그 분주한 사이에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부시행령 폐기하라”, “세월호 선체 인양하라”, “실종자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세요”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멈춰있다.


“시행령안을 폐기하라”

  세월호 유가족들은 지난달 30일 416시간 집중농성을 선언하고 항의행동에 나섰다. 다시 농성을 시작하게 된 배경은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의 입법예고. 유가족들은 “정부의 시행령안은 반쪽짜리나마 만들어진 세월호 특별법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시행령안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나섰다. 장완익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위원은 “특별법의 취지를 완전히 무시한 시행령안에 놀랐다. 법률가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기가 막힌 시행령안이다. 정부가 새로운 입법행위를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독립성 훼손과 위원회 조직 축소

  박주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시행령안은 여당 추천 상임위원인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무처장 밑에 기획조정실장과 또 기획총괄담당관을 편성, 파견 공무원이 맡게 한다. 진상규명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조사1과장 역시 파견된 공무원이 맡게 돼 있다. 정부로부터 파견된 공무원들이 여당이 추천한 사무처장을 보조케 해서 위원회 전체의 업무를 종합 조정하고 각 소위원회의 임무를 기획 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잠재적 조사 대상인 정부부처와 여당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위원회 조직 축소에 대해 “특별법에 따르면 120명 내의 직원을 둘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시행령안은 합리적 이유 없이 출범시 인원을 90명으로 한정했다. 비율 또한 파견 공무원이 다수를 차지한다. 특별조사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입장은 단호하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말도 안 되는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이 전면 폐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시행령안의 폐기를 요구했다. 


매주 수요일 7시,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을 기억하는 미사’가 열린다.


해가 저문 광화문 광장

  해가 지면서 관광객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엔 유가족들이 우두커니 남았다. 저녁 일곱시에는 한국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가 진행하는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을 기억하는 미사’가 열렸다. 지난해 12월 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시작된 이 미사는 세월호 광장으로 옮겨 매주 수요일 7시에 열리고 있다. 세월호 광장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시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그 시각 광화문 바로 앞, 유가족이 자리한 곳엔 촛불이 하나 둘씩 켜졌다. 유가족의 주위를 촛불이 둥글게 감싸 유가족들을 비추고 있다. 바닥에 세워뒀는데 바람이 불어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자세히 보니 다 마신 음료수병, 자양강장제병 따위가 촛불이 흔들리지 않게 받치고 있었다. 문득 이 장면이 바람직한 사회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뜻있는 사람들이 빛을 비추고, 그 빛이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모습.


세월호 유가족들의 주위를 촛불이 밝히고 있다.


  그 곳에서 성빈이 아빠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내 딸은 뭐든 잘 하는 아이였다.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럽지만 전교 1등 하는 딸이었다. 상장도 장학금도 많이 받았다. 판사나 외교관의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며 딸의 핸드폰에서 딸의 사진과 상장, 장학증서를 보여줬다. 눈에 그리움이 그렁그렁 맺혔다. 건강은 어떠냐고 묻자 “여기 몸 성한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런데 아플 수도 없다. 여기서 아파서 쓰러지면 안 된다. 아직 진상규명이 전혀 되지 않았고, 내 딸이 왜 그렇게 죽었는지 모르는데, 아프면 안 된다”고 다짐하듯 대답했다.


  사고 직후의 상황에 대해 “처음에 유족들은 사고 현장에 접근하지 못했다. 계속 못 가게 막았다. 해수부 장관에게 항의해서 해경 순시선을 타고 현장에 갔다. 현장에서 돌아오니 아내한테 연락이 왔다. 사망자 명단에 딸 이름이 올랐다고. 이후 병원에서 애들 신원 확인해주시던 단원고 선생으로부터 우리 딸이 아니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포 중앙병원으로 향했다. 내 딸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성빈이는 29일에 물에서 나왔다. 다른 아이들보다 빠른 편이었다”라던 성빈이 아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신 찾아가면서 나와 줘서 고맙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을 거다. 우리는 나왔으니까 다행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나온 것이 다행인 일인가 싶다”라고 어렵게 말을 이었다. “1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 물속에 있으니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은 오죽하겠나. 세월호 선체는 꼭 인양돼야 한다. 이런 기사나 좀 써라. 여기서 과거 얘기 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없다. 그 때 생각을 돌아보면 울화만 치밀고, 애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말을 끝으로 성빈이 아빠는 자리로 돌아갔다.


  유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동석했다. 유가족들은 자신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 누구의 엄마이고 아빠일 뿐이었다. 해가 저물고 나니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매트를 깔고 담요를 나눠 덮고 있어도 한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인터뷰를 중단한 것이 마음이 쓰였던지, 성빈 아빠는 가지고 있던 핫팩 하나를 건넸다.


  유가족들 사이에서는 삭발식이 화제다. 집행부를 포함해 최소 20명 이상이 삭발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한다.(실제로는 2차에 걸쳐 70여명이 삭발에 동참했다) “00이 엄마는 두상이 예쁘니까 꼭 해야겠다”, “머리숱 적은 00이 아빠는 하나 안하나 별 차이가 없다”등 서로 농담을 주고 받지만 그 속에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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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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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누군가는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20144월을 잔인하단 단어로 다 형용할 수 있을까? 세월호 1주년. 걷다보니 어느새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손에 들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 겨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광화문에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봄을 돌려주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목도리 하나는 둘러줄 수는 있지 않을까?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이하 세월호 가족협의회)330일 광화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세월호 선체 인양과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제정안의 철회를 요구했다. 기자회견 이후 청와대 항의 방문을 시도했지만 다수의 경찰 병력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경찰에 막힌 청와대 항의방문

  세월호 가족협의회는 항의 방문하기 위해 청와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세종대왕상 앞에서 지키고 있던 경찰 병력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마치 세종대왕이 앞길을 막고 있는 듯 보였다. 괜히 세종대왕에 화가 났다. 가족협의회 일부는 경찰 병력이 막지 않는 곳을 뚫고 광화문 앞까지 나아갔다. 그 이상은 넘어갈 수 없었다.


  50여명 남짓의 유가족들을 막겠다고 나선 병력은 세 배는 족히 되어보였다. 병력이 디귿자로 가족협의회를 감쌌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바쁜 걸음을 재촉했으며, 또 누군가는 잠시 서있었다. 외국인들은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광화문으로 나아가려던 한 시민과 경찰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50대 남성으로 보이는 그는 왜 자꾸 따라오냐? 경찰이면 다냐? 움직일 자유가 내게 있는 것 아니냐며 경찰에 따져 물었다. 경찰은 당신이 자꾸 넘어가려 하니까 그러지라며 대꾸했다. 따라오지 말라는 남성을 경찰은 결국 세종대왕상까지 따라갔다. 그를 따라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경찰이 광화문 가는 길을 막기에 뒤돌아서 농성장으로 가려했다. 그 순간 경찰 여섯 명이 따라 오더라.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울분을 토하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재근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은 대통령께 면담을 요청하기 위한 청와대 항의 방문일 뿐 가두시위나 행진이 아니라고 행사의 성격을 확실히 규정했다. 그런 연유로 경찰이 막아선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 공동상황실장은 경찰이 계속 막더라도 그 자리에 앉아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또 청와대로 가기 위해 날마다 항의행동을 계속할 것이라며 의지를 밝혔다.


  이 공동상황실장은 가족들이 왜 또 광장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는지 (국민들이) 잘 모르고 계신 것 같다. 특조위 조사권을 무력화 시키는 시행령 폐기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광장으로 나오게 됐다고 세월호 가족협의회가 광장으로 다시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대통령 면담을 요청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힘이 절실하다. 411일부터 추모주간을 선포, 촛불집회(11)대규모 추모문화제(16)범국민 대회(18) 뿐만 아니라 1주기를 맞아 전국에서 다양한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국민들의 참여를 부탁했다. 끝으로 우여곡절 끝에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됐는데, 특별법이 제대로 시행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며 언론이 더욱 관심을 갖고 올바르게 보도할 것을 촉구했다.

 

그래도 아직 희망 갖는다

  시민단체 간사인 조은씨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민들에 유인물을 건네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면 광화문 농성장에 찾아와 일을 돕는다고 밝힌 그는 시행령 제정안 철회와 세월호 선체 인양 등 문제들이 하루 속히 해결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반대 주장을 가질 수는 있지만, 농성장에 찾아와 유가족들에게 욕을 하는 분들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며 관용의 정신을 요구했다. “하지만 몇 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유인물도 잘 받아 주시고, 다른 유인물과 달리 길바닥에 버리는 분들도 많지 않다그런 모습을 볼 때 아직 우리 사회에 희망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바닥에 나뒹구는 유인물이 없었다.



가족협의회는 왜?

  세월호 가족협의회는 왜 다시 광화문 농성장으로 나왔을까? 가족협의회는 지난 327일 해양수산부가 입법예고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제정안은 특별조사위원들이 제안한 시행령안을 완전히 묵살한 전혀 새로운 안이라고 소리 높였다.


  이들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을 정부가 조사한 것에 대한 검증 수준으로 축소 위원장과 위원들의 위상과 역할을 약화 사무처의 인력과 예산을 축소하고 위원회 사무처의 주요 직책을 정부 파견 고위 공무원이 장악했다며 조사대상이 되는 기관의 공무원들이 특조위를 사실상 통제하는 법안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세월호 특별법과 특조위의 조사권을 무력화시키는 시행령이라며 즉각 철회를 요구했다.


  세월호 가족협의회는 또한 특별법을 무력화하는 이런 초법적이고 불법적인 시행령안을 일개 부처인 해양수산부가 단독으로 마련했을 리 없다청와대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독립적 국가기구의 시행령이 아니라 청와대가 작성한 진상규명 통제령이며 간섭령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박근혜 정부가 특별법 시행령 논의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세월호 인양 약속에 대해서도 손바닥 뒤집듯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며 세월호 선체에 대한 온전하고 조속한 인양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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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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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31일은 세월호가 침몰한 349일째 되는 날이었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의 딸 예은양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지도 349. 그의 시계는 아직도 2014416일에 멈춰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해 그는 오늘도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차가운 바닥에 앉아있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을 만난 건 광화문, 저녁 일곱 시가 넘어갈 무렵이었다. 낮에 한차례 비가 내린 탓에 조금 쌀쌀한 날씨였다.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덤덤히 이렇게 지낸다는 유 위원장. 그 앞에 어둠이 내려앉은 광화문 광장이 펼쳐져 있다. 광장의 돌바닥에 그대로 앉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찬기운이 올라오는 그 자리에 앉은 모습이 묘하게도 편해보였다. 1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 했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건강은 괜찮은가.

  건강이야 당연히 안 좋다. 계속 밖에서 생활하다보니 여기저기 아픈데도 생기고. 그래도 몸 아픈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세월호 사고가 벌써 1주기를 맞는다.

  1, 저희한테는 그런 감각이 없다. 시간이란 감각을 잃은 지 오래 돼서, 그게 1년인지 10년인지 그냥 똑같은 날들의 반복일 뿐이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입장에선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하다. 1년이란 시간이 원래 어느 정도의 길이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 416일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세월호 유가족들은 2014415일까지 삶을 살았던 거고, 416일부터는 살아있지 않다. 참사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고통 속에 갇혀있다.

 

예은이는 어떤 딸이었나.

  그냥 내 딸이다. 어떤 딸이었냐 따지기 전에 그냥 내 딸이다. 내 목숨보다도 귀한 내 딸. 그것뿐이다. 가수가 되는 것이 예은이의 꿈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에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한테 예쁜 모습을 남겨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프로필 사진을 포함해서 예은이 사진이 핸드폰에 잔뜩 있다. 그런데 안 본다. 못 보겠다.

 

사고 이후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가.

  아내는 지금 광화문 광장에 같이 나와 있다. 나보다 더 힘들거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엄마니까.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니까. 그 고통을 가늠할 수도 없다. 예은이한테 쌍둥이 언니가 있다. 우리 하은이(쌍둥이 언니)는 말로 표현은 잘 하지 않아도 엄마 아빠보다도 더 많이 힘들거다. 쌍둥이는 항상 티격태격 한다. 그러다가도 가장 친한 친구처럼 서로를 의지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함께 있었으니 세상 누구보다도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1년이 지났지만 하은이는 아직 적응을 잘 못하는 것 같다. 새벽마다 운다. 보고싶다고. 나도 아내도 같이 운다.

 

하은이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하은이가 부쩍 더 열심히 공부하고, 매사에 열심이다. 표현하지 않아도 아빠 눈에는 마음이 다 보인다. ‘예은이 몫까지 해야지, 예은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언니가 돼야지하는 다짐이. 그렇게라도 집중하면 그 시간동안 동생 예은이를, 아픈 기억을 잊을 수 있으니까. 1년간 스스로 이겨내기 위해서 무던히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대견하고, 고맙다.

 

세월호 이후 1, 언제 가장 힘들었나?

  지난 1년간 많은 일이 있었다.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게 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이를 찾으려고 팽목항에서 진도앞 바다에서 헤맸던 일들, 그때 목격했던 말도 안되는 일들, 예은이를 다시 찾았을 때 그 얼굴, 차가운 손의 감촉도 다 생생하다. 돌아와서 미안한 아빠지만 부끄러운 아빠는 되지 말자고 다짐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내자고 달려들었을 때 그 다짐은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특별법 만드는 과정에서 단식하고 농성하고 도보행진 하고 별 짓을 다 했는데 그 과정도 다 기억이 난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무엇을 했고, 무슨 어려움이 있었고, 무엇 때문에 울었고. 그런데 아쉬운 건 이 1년이란 시간동안 숱하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어느 하나도 우리를 웃게 해준 일이 없다. 우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준 일은 없었다. 언제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 할 수가 없다. 매일같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니까. 오늘도 마찬가지고.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의 항의는 어떻게 해결되었나?

  해결이 된 건 없다.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지금 이렇게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자리를 잡았는데 내려올 이유가 있나. 우리는 농성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 면담 요청을 하고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농성을 할 계획이었다. 전혀 납득되지 않는 이유로 막히게 되면서 청운동까지 가게 됐고, 12일간 농성을 하다 내려왔다. 해결이 된 게 아니고 자진해서 내려온 것이다.

 

아직 아홉 분의 실종자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선체 인양도 아직 되지 않았다.

  선체 인양에 대한 국민의 여론은 여전히 관심이 많다. 어제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62%의 국민이 비용에 관계없이 선체 인양을 해야 한다고 뜻을 보여주셨다. 이건 정말 놀라운 수치다. 정부나 여당은 세월호 인양에 대한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가능한 한 인양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려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가 넘는 국민들이 인양을 지지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시신일지언정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서 가족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다. 그것을 미루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의 정부이기를 부정하는 것 밖에 안된다.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비용도 정부에서 주장하는 것만큼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세월호 인양을 통해 아홉 분의 실종자들이 하루 속히 가족분들의 품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호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책임지는 안전한 사회 건설. 이것이 세월호 특별법의 목적이다. 이번에 세월호 선체를 인양하고, 아홉 분의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를 정상적으로 풀어가면 정부에 대한 신뢰, 안전에 대한 믿음이 쌓일 것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정부에서 왜 놓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부는 왜 선체 인양을 하지 않는다고 보는가?

  단정적으로 말을 할 수 없다. 여태까지 정부는 인양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물론 인양을 하겠다는 말을 한 적도 없다. 그러니 왜 인양을 안 하는지 거기에 대해 뭐라 이야기 할 뚜렷한 근거가 없다. 그냥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다. 인양을 할 경우에 무언가 이 정부에 부담이 되는 거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세계 경제10대국인 대한민국에서 세월호 한 척 인양하지 못한다는 것은 납득이 되질 않는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4월 2일 삭발식에 앞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광화문 농성장에 시민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세월호가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다. 얼마 전 여론조사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관심도를 물어봤을 때 관심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70%가 넘었다. 참사 직후에 거리로 광장으로 나와주셨던 뜨거운 행동으로 보여준 열기는 식었다고 볼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국민이 1년 내내 거리로 나올 수 있나? 더 중요한 건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을 국민들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국민들을 만날 때마다 느낀다. 관심이 식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변화했을 뿐이다. 1주기를 앞두고 국민들이 저희에게 보여준 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까지 돕겠다고 성원해준다.

  참사 이후 안전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는데, 세월호 사고이후 대한민국이 안전해졌다고 생각하느냐는 여론조사에 80%가 넘는 사람들이 안전해지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안전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겪고 나서 안전 문제를 여실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새정치 민주연합을 비롯한 야당에 대해.

  새정치 민주연합은 사실 1년간 노력 많이 했다.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의 편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항상 애를 써준 의원들도 많다. 문제는 항상 아쉬운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정치 구조에서 야당의 현실적 어려움을 부정할 순 없지만, 너무 쉽게 타협해주고 양보해준 것 같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못하는 모습이 아쉽다. 협상의 한계를 너무 쉽게 인정하는 것 같다.

  정의당의 경우에는 워낙 소수 정당이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그 정도의 소수 정당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본다. 특히 세월호 사고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서 배제됐기 때문에 정의당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적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애쓴 분들께는 감사하다.

 

새누리당에 대해 묻겠다.

  새누리당에도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의원들이 있다. 야당보다 그 비율이 낮지만. 새누리당의 경우에는 당차원에서의 결집력, 결정된 사항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좋다. 문제는 그 방향이 우리 가족들의 생각과 정반대 방향이라는 점에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런 모습들이 피해자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세월호 사고를 단순 교통사고로 표현하고, 피해자 가족들이 정치투쟁을 하는 것처럼 몰아간다. 국민을 편가른다. 정부여당에 우호적이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여당이 결정해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 아쉬운 건 우리니까.

 

팽목항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 중인 이호진씨 부녀의 근황이 궁금하다.

  직접 연락한 지는 꽤 됐고, 다른 가족들을 통해 소식은 전해 듣고 있다. 근황이야 뻔하다. 도보행진을 해본 사람의 입장에서 그 고통이 눈앞에 선하다. 더욱이 삼보일배 도보행진을 하는데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중단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으면 좋겠다. 지금 속도로 하면 올 가을이나 돼야 도착한다. 같은 가족의 입장으로 가족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향후 계획을 말해달라.

  지금 당장은 416시간 집중 행동 농성을 하고 있다. 목적은 두 가지다. 우선 말도 안 되는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이 전면 폐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폐기만이 목표다. 두 번째로는 정부가 세월호를 인양하겠다는 입장을 1주기 이전에 밝히는 것이다. 진상조사 된 것도 없는데 최소한 그 약속은 받고 1주기를 맞아야하지 않겠나.

 

어떤 문제가 해결 돼야 집에 돌아갈 수 있나?

  난 돌아갈 집이 없다. 내 집에는 예은이가 있어야 한다. 예은이가 없는 집은 건물일 뿐이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좀 덜 미안한 엄마 아빠가 되어 예은이를 만나러 가는 것이 목표다.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예은이한테 갈 수 있는 것. 지금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 왜 예은이가, 우리 아이들이 거기서 죽어야했는지. 그 진실을 밝혀야 예은이를 만날 수 있다.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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