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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취임 2개월이 채 되지 않아서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6사단에서 현역으로 복무중인 장남이 후임병 폭행과 성추행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공분을 사고 있는 것이다. 남경필 지사는 SNS에 사과문을 올리고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어 급하게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파문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또한 사건이 보도되기 이틀 전인 지난 15일에 중앙일보에 기고한 칼럼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칼럼에서 남경필 지사는 "아들 둘을 군대에 보내놓고 선임병사에게 매는 맞지 않는지, 전전긍긍했다. 병장이 된 지금은 오히려 가해자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좌불안석이다. 며칠 전 휴가 나온 둘째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걱정 붙들어 매시란다."며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낸 소회를 밝혔다. 논란이 일자 경기도 관계자는 "기고문은 12일에 보낸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기고를 철회하지 않은데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았다.


  사건을 알기 전에 기고문을 송고했다는 남경필 지사측의 해명을 믿고 넘어가자면, 기고를 철회 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남경필 지사 본인에 대한 방어가 적절하게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인용문의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을 보면 군 시스템에 의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아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으로 들린다. 또한 본인이 평소 아들이 군에서 가해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 자식의 인성교육에 무관심하지 않았음을 항변한다. 세 번째 문장에서는 한 발 더 나가 적극적으로 아들의 문제에 신경쓰는 모습이 엿보인다. 특히 문제가 되지 않은 '둘째'를 내세웠다.


  필자는 차기 대권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정치인이 경황이 없어서 기고를 철회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한 자신을 방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철회를 하지 않았거나 더 나가서는 기고문을 일정부분 수정하지 않았을까 의심해본다. 맞기도 전에 방어논리가 3문장으로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복무하던 때에 부모로부터 "선임에게 맞지는 않냐"는 말은 들어봤어도, "후임들을 때리지는 않냐"는 질문은 들어본 적은 없다. 자식이 없어서 모르긴 하지만 부모맘이란게 그런거 아닌가?


  조사 결과 일회성 폭행이 아니라 지속적인 폭행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4월부터 이달 초까지 지속적인 폭행이 있었다고 하니 무려 4개월동안 일어난 일이다. 4개월간 매일 폭행을 했는지, 어느 정도 수위의 폭행이 있었는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상상해보자. 갇힌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는 군의 특성상 매일 맞지 않는다고 해도 매일이 폭행 상태에 놓여있는 스트레스가 가해진다. 계급 때문에 반항도 어렵다. 학교 폭력보다 군내 폭력이 더욱 문제가 되는 이유다.


  윤일병 사망사건으로 군대 내 폭행에 대한 경각심이 일지 않았더라면 이번 사건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폭행은 4개월이 아닌 남경필의 장남이 전역할 때까지로 늘어났을 것이다. 또한 전역후에도 타인에게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행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남경필 지사의 말대로 '사회 지도층'이란 이름으로 살 확률이 높은 인간이니까.


  현대 사회에서 정치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더욱 지켜져야한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근대의 귀족과 달리 국민에게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현주소는 어떤가. 권력을 휘두르는데만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 사병 사회의 정점인 병장만 되도 후임들을 때리는 것이 당연해보인다. 이등병이 조그마한 잘못을 하면 득달같이 혼을 낸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입사원이 잘 못하면 '빠졌다'고 갈구는게 당연한 우리 사회다.


  필자가 경험한 미군은 그 반대였다. 갓 일병 계급을 달고 나간 한미연합훈련에서 지급받은 공포탄 한 발을 실수로 쏜 적이 있었다. 한국군 지휘관이 영창을 보내겠다는 둥 협박을 했다. 돌이켜보면 웃기지도 않은 협박이지만 일병이 뭘 아나. 근심 한 가득 안고 식사를 하러 가던 중 미군 대대장을 만났다. "너가 이번에 오발한 카투사지?"라는 질문에 "죄송하다"고 답했다. 일병 나부랭이가 군기가 빠져서 실수를 했으니 그저 죄송할 수밖에. 그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미안할 것 없다. 그런 것을 훈련하기 위해 공포탄을 지급한 거다. 또한 자네 계급에서는 실수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격려했고, 평소 한국군의 계급과 그에 따르는 대우에만 익숙해있던 필자는 벙찔 수 밖에 없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생각해보길 바란다. 어떤 것이 합리적인지.


  덤.

  남경필 지사는 사퇴하길 바란다. 본인 말대로 '사회 지도층'이라고 생각한다면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사퇴해야 한다. 단지 철없는 아들이 사고친 것 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일 아니다. 같이 벌받는 마음으로 반성한다던데, 반성은 집에서 하시길.


  '남경필 지사 아들 두 명 모두 현역으로 보냈네, 대단하다'는 일부 네티즌들의 반응. 이게 우리 사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현주소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대한민국 만세다 젠장.


참조

[나를 흔든 시 한 줄] 남경필 경기도지사

남경필 '군에 간 두 아들 걱정' 일간지 기고문 논란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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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VS 김영삼

저자
이동형 지음
출판사
왕의서재 | 2011-07-2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한국정치의 양김, 김영삼과 김대중의 관계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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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이 자리에서 노태우는 김대중에게 "김 총재도 이제 고생을 그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힘을 합해 당을 같이 합시다." 생각지도 않은 제안을 받은 김대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제안을 거절한다. "그것은 안됩니다. 나는 국민에게 야당을 하겠다고 선거에 나서서 당선된 사람입니다. 우리 당 65명의 의원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 여소야대를 만들어 준 것은 국민의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국민의 동의도 없이 내 마음대로 여당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나한테 합당을 제의하지 말고, 민주주의만 철저히 하십시오.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됩니다."


 여공들이 김영삼 총재와의 면담을 요청하자, 김영삼은 여공들이 항의 농성 중이던 강당으로 들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은 눈물 겹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경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내 이름 석 자와 신민당의 명예를 걸고 조속히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겠습니다. 경찰이 신민당사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합니다. 나와 서른 명의 신민당원들이 여러분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중도통합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요? 중도통합이란 게 정치학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칙이 섰을 때는 중도통합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이 다를 때 방향이 다를 때 중도통합은 없습니다. 선과 악 사이에 중도통합은 없습니다."

 

 

내용 요약

  김대중·김영삼이냐 김영삼·김대중이냐. 누구 이름을 먼저 하느냐까지도 싸웠던 대한민국 정치의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대 김영삼. 그 두사람의 삶은 닮은 듯 달랐다. 양김 모두 대한민국의 정치 중심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며 라이벌이자 동지로 같은 곳에 서서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있었으나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서부터 자신의 뜻을 관철 시키는 방법까지 판이하게 달랐다. 서로에 대한 평가를 묻는 기자에게 김대중은 "김영삼 씨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고 답하였다. 같은 질문에 김영삼은 "김대중 씨는 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고 화답했다고 하니 두 라이벌의 성격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김영삼은 다들 알다시피 멸치어장을 하는 지역유지인 아버지 김홍조 옹의 영향으로 부족함 없이 자랐다. 당시 거제도 사람 중에 경제적으로 김영삼의 부친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에 김대중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대중의 부친 김운식 옹이 농업 외에도 어업, 대금업, 양조장 등의 부업을 했던것으로 보아 살림살이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겠으나 김대중의 모친 장수금은 김운식의 정실이 아니었다. 이런 것을 고려할 때, 김대중과 김영삼의 유년시절은 꽤 많이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정치 입문도 매우 다르다. 김대중은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벌었다. 사업에 성공한 김대중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며 정치에 입문한다. 김대중의 건국준비위원회 이력은 그를 빨간색으로 칠하는 시작점이 된다. 김대중은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목포시에 출마했는데 낙선했고, 그 후로 민주당 소속으로 4대,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내리 낙선하는 길을 걸었다. 5대 보궐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이 되지만 3일 후 5.16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국회의원 선서조차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반면, 김영삼은 서울대 3학년 시절에 창랑 장택상의 선거운동원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졸업 후 장택상의 비서가 되고, 그해 장택상이 국무총리가 되자, 국무총리 비서관이 되었다. 그 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거제군에 출마해서 부친의 후광과 장인의 지원으로 손쉽게 당선된다. 당시 그의 나이 26세였다. 


  김대중은 낙선을 매우 많이 했다. 국회의원도 네번째 도전에 당선되었고, 대통령선거도 네번째 도전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통령병 환자'라고까지 비아냥댔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단 두번 낙선했다. 3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4대까지 12번의 국회의원 선거 중 전두환 집권 중 열린 11대, 12대를 뺀 10번의 선거에서 민주당 간판을 달고 부산 서구에 도전했던 4대 국회의원 선거를 뺀 9번 당선 되었다. 대통령선거 한번, 국회의원 선거 한번을 뺀 모든 선거에서 당선된 것이니 대통령 선거 포함 6번의 선거에서 한번도 지지 않은 박근혜 씨와 도지사 선거 포함 6번의 선거에서 한번도 지지 않고 아버지 지역구를 지킨 남경필 정도가 이에 맞설 수 있겠다.


  정치 입문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른 양김은 김영삼이 이승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으로 입당하면서 처음으로 같은 정당 소속이 됐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두 사람은 첫번째 대결을 펼쳤는데 당시 당수인 유진오가 김대중을 지명하면서 김대중의 승으로 끝이나는가 했으나 김영삼의 땡깡으로 김대중은 원내총무 인준을 받지 못하고 결국 김영삼이 승리를 가져간다.


  두번째 대결은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펼쳐졌다. 당시 당수 유진산이 김영삼을 지지하여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이 결정되는 듯했다. 경선 전날 밤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문을 정성스럽게 써내려갔다. 같은 시각 김대중은 이희호, 김상현을 대동하여 전당대회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여인숙을 돌아다니며 절하고 읍소하며 대의원들을 설득했다. 전당대회 결과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1등을 하였으나 과반수 득표에 단 20여 표가 모자라 2차 투표로 넘어갔다. 이는 이철승계의 반발로 무효표가 82표나 나왔기 때문이었다. 2차 투표 전 김대중은 이철승계의 수장 조연하와 만나 이철승이 총재가 되도록 지지하고, 이철승계에게 요직의 반을 주겠다는 약속을 김대중의 명함 뒤에 적고 사인하는 것으로 이철승계의 표를 가져왔다. 그 결과, 김대중이 2차 투표에서 김영삼을 이김으로 첫번째 대결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하지만 명함에 쓰여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79년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이철승이 아닌 김영삼의 손을 들어줬다. 훗날 김대중은 이에 대하여 "물론 김영삼은 면회 한 번 편지 한 통 없었고, 사람들이 라이벌이라고 하며 이철승 지지를 호소했지만, 박정희가 김영삼 당선되는 것을 싫어했고 이철승보다 김영삼이 총재가 되는 것이 민주화 투쟁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김영삼을 지지했다"며 이철승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자신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 준 이철승계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명함각서 사건 같은 것들이 김대중을 거짓말쟁이로 공격하는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는 하는데 자신을 향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사사로운 감정을 내려놓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 김대중 대통령 답다는 생각이 든다. 김대중은 왜 거짓말을 하냐는 김영삼의 물음에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약속을 못지킨 것 뿐이지'라고 했다고 한다.


  반면, 김영삼은 전당대회 결과에 승복하고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지 다니며 김대중 지지유세를 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최형우, 깅동영, 조윤형 같은 김영삼의 참모들의 반발에도 끝까지 김대중을 도왔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 관권선거, 돈 선거 등 온갖 부정을 일삼는 박정희에게 김대중은 불과 95만표 차로 졌다. 어마어마한 금품을 살포하고도 겨우 이긴 박정희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선거 이후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반독재 투쟁을 하는 김대중이 너무 미웠다. 그래서 벌어진 일이 바로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김대중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일본으로 가면 '납치 및 살해' 가능성이 있다는 많은 제보편지가 왔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일본행을 감행한다. 도쿄에서 반박정희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그랜드 팔레스 호텔 2212호에 투숙하고 있던 김대중은 회담을 마치고 2211호를 나서던 중 옆방 2210호 그리고 맞은편 2215호에서 쏟아져 나온 괴한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납치당한다. 그들은 김대중을 차에 싣고 고베에서 한시간 가량 떨어진 니시노미항으로 이동하여 준비되어 있던 요트에 김대중을 옮겨 싣고 한참을 달리던 중 용금호라고 하는 대형 선박에 다시 옮겨 싣는다. 김대중의 오른팔과 오른다리에는 30킬로그램 정도의 쇳덩어리를 매어졌고, 던지기만 하면 김대중은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때 김대중을 살려 데려오라는 무전이 날아오는데 이는 주한미국대사 하비브가 사건 직후 CIA를 이용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의 배후가 중정임을 파악하고 박정희를 찾아가 김대중을 죽이면 안된다고 경고하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납치사건으로 정치탄압을 받았다면 김영삼은 YH 무역사건으로 가택연금에 처해진다. YH 사건은 1979년 8월 9일 오전 YH무역이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한 데 항의하는 여공 200여명이 신민당 당사에 몰려와 농성을 벌이는데서 시작된다. 김영삼은 여공들이 항의 농성 중이던 강당으로 들어가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은 눈물 겹게 생각합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내 이름 석 자와 신민당의 명예를 걸고 조속히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겠습니다. 경찰이 신민당사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합니다. 나와 서른 명의 신민당원들이 여러분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2000명이 넘는 엄청난 경찰 병력을 신민당 당사로 투입하여 여공들을 끌어내기 시작한지 딱 23분 만에 상황은 종료됐다. 진압 과정 중 김경숙이라는 여공이 사망했고,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 등의 당원들도 경찰의 폭력에 심하게 부상을 당했고, 김영삼은 상도동 자택에 가택연금 되었다.


  박정희는 YH 사건이 터지자 김영삼의 구속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만 중정부장 김재규가 말린다. 그래서 나온 것이 '김영삼 총재 가처분신청'이다. 이에 김영삼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정권을 욕하고 박정희 하야를 외쳤다. '하야' 소리에 돌아버린 박정희는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시켜 버린다. 이 일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다시 타올랐고 10월 16일 부산대생의 데모로 시작된 사태는 일반시민들까지 합세하게 되고, 박정희가 부산에 계엄을 선포하자 마산 시역에서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바로 '부마항쟁'이다. 결국 부마항쟁을 둘러싼 김재규와 박정희, 차지철의 시각의 차이로 인해 10.26 사태가 벌어진다. 일련의 사건들의 흐름으로 보아 박정희가 죽은게 자신을 국회의원 제명했기 때문이라는 김영삼의 말이 터무니 없는 말은 아니다.


  박정희가 여대생 신재순을 옆에 끼고 심수봉의 노래를 들으며 시바스리갈을 쳐마시다 사망하자 모두 따뜻한 봄바람이 불 것이라 생각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다. 김영삼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상황을 안이하게 인식한데 반해 김대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고 서울의 봄이 온 건 아니다"라며 정치 기류를 곱게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의 자리에 마음을 뺏긴 양김 모두 다음 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양김은 서로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삼은 지난번에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고 주장했고, 김대중은 김영삼으로는 김종필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김대중을 사면복권하면 야당이 분열하게 될 것이라는 전두환의 책략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이 간절히 양김의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결국 두사람은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심재철의 바보 같은 서울역 회군 뒤, 전두환은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공수부대를 광주에 투입한다.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지면 학교 정문 앞에서 모인다는 사전 약속대로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앞으로 모였고, 전남대에 주둔하던 7공수여단은 학생들을 구타하기 시작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다. 5월 19일에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공수부대를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일반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한다. 이에 5월 20일 계엄군은 광주 전역의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선포한다.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M16 소총으로 난사했다. 자국민을 향한 총성은 무려 10분간이나 지속됐다. 5월 27일 새벽 5시 10분, 계엄군이 도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 작전을 완료했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김대중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인 5월 17일 학생들과 재야세력에게 북한의 사주를 받아 활동자금을 건네주고 학생데모를 부추겨 사회를 혼란케 하고 정권을 잡아 북한에 권력을 넘겨주려 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와 '반국가단체결성' 혐의로 연행했다. 이 사실을 끼워 맞추기 위해 당시 대학생이던 이해찬, 설훈, 정동년, 심재철 등을 체포, 고문하고, 허위자백을 강요한다. 구속자들은 모진 고문 끝에 범죄사실을 전부 시인했지만, 재판정에서는 고문에 의한 강요된 진술이었다고 번복했다. 그러나 심재철만은 모든 것을 시인했다. (서울역회군의 주역이자 지금 새누리당 의원으로 국회에서 누드사진 검색하다 걸리고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상하게하는 카톡보내서 논란을 일으킨 그 심재철이다.) 결국 김대중에게는 사형이 선고된다. 1981년 1월 말, 전두환은 레이건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가면서 김대중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해주고, 82년 2월에는 다시 20년 형으로 그리고 그해 연말 형집행정지로 석방해주면서 미국으로 쫓아낸다. 한편 김영삼은 김대중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체포된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때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1980년 8월 13일, 가택연금 중이던 김영삼은 신군부의 강압에 못 이겨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할 것을 선언한다.


  1987년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역사가 꿈틀거릴 조짐이 보이는 사건이 터졌다. 정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문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조한경과 강진규 두 사람만 물고문 했다고 축소 은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6월 9일 연세대 앞에서 데모 중이던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진이 '검열'의 공포 속에서도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렸다. 이 사진의 위력은 엄청났다. 바로 다음날인 6월 10일 6월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는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되었고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다. 결국 6월 항쟁의 결과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로 부터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6.29 선언을 이끌어 내었다.


  1987년 7월 9일 김대중은 드디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공민권이 박탈된 지 7년만에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 6.29 선언 열흘 뒤의 일이다. 양김을 분열시켜 노태우를 당선시키려는 전두환의 책략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양김은 다시 분열했다. 통일민주당 의원총회에서 "80년 서울의 봄 때처럼 분열하게 되면 역사의 죄인, 민족의 반역자가 된다"는 험악한 말도 나오기 시작했으나 단일화는 물 건너가고, 10월 28일 김대중은 분당을 선언,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나간다. 결국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양김은 동시 출마 했고, '보통사람'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된다. 


  이듬해 치뤄진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이 참패하여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가 이루어졌다. 민정당은 125석을 얻어 제1당의 지위는 확보했고, 평민당이 70석으로 제2당이자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어서 민주당이 59석, 공화당이 35석, 무소속이 9석, 한겨레민주당이 1석을 가지고 갔다. '여소야대' 정국에 노태우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5공청문회가 열리고, 전두환이 국회에 끌려나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노태우는 김대중에게 힘을 합쳐 당을 같이하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김대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국민에게 야당을 하겠다고 선거에 나서서 당선된 사람입니다. 우리 당 65명의 의원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 여소야대를 만들어 준 것은 국민의 뜻입니다. 나한테 합당을 제의하지 말고, 민주주의만 철저히 하십시오.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됩니다."


  김대중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노태우는 김영삼에게로 발길을 돌린다. 제안을 받은 김영삼은 장고에 들어간다. 이때 김영삼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대해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87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2위를 했지만 이어지는 총선에서 김대중의 평민당에 제1야당을 내어주자 불안했던 것이다. 게다가 최측근 인사인 서석재가 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에서 후보매수한 혐의로 구속되자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김영삼이 드디어 결심을 하고 3당 합당의 사실을 측근들에게 알리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하지만 김영삼의 생각은 확고했고, 김영삼을 버리느냐 신념과 국민을 버리느냐의 기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김영삼의 3당합당이 선언되는 자리에서 "이의있습니다.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이때 노무현과 같이 김영삼의 설득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찾아 가시밭길을 걸은 사람들이 이기택, 김정길, 박찬종, 장석화, 홍사덕, 이철이었다. 이들은 민자당으로의 합류를 거부하고 민주당에 남았고, 훗날 꼬마 민주당으로 불렸다.


  1992년 대통령 선거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마지막으로 맞붙은 대결이었다. 김대중이나 김영삼이나 누가 되든 군사정권은 막을 내리는 것이다. 국민들은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가 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케케묵은 빨갱이 수법으로 김대중의 얼굴에 붉은색을 칠하면서 첫 단추부터 깨끗한 선거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불공정한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정치에서 심판은 바로 '언론'이다. 그러나 92년 대선은 이 심판들이 일방적으로 김영삼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던 중 '초원복국집' 사건이 터졌다. 선거를 코앞에 둔 12월 11일 정부 기관장들이 부산의 ‘초원복집’이라는 음식점에 모여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지역 감정을 부추기자고 모의한 것이 도청에 의해 드러나 문제가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 '기춘대원군'  김기춘이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부산 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냐 하면 영도다리 빠져죽자.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의 발전에 긍정적"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김영삼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사퇴까지 고려해야 할 정도의 악재여야 하지만 김영삼에게 호재로 작용한다. 오히려 영남인들을 똘똘 뭉치게 만들어 김영삼의 표를 더욱 단단히 해주는 결과가 된 것이다. 조선일보는 대선 당일 사설을 통해 "이번 도청사건은 목적과 관계없이 부도덕한 것이며 앞으로 우리 사회의 관행과 시민생활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파급시킬 것"이라고 관권부정선거를 도청사건으로 물타기 했다. 김영삼은 자신의 연고지인 부산/경남에 전통적 여당의 텃밭인 대구/경북, 거기다가 김종필의 연고인 대전/충남/충북을 바탕으로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김대중은 김영삼의 당선이 확실해지던 12월 18일 자정,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다음날인 12월 19일 기자들을 모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대중은 1995년 치뤄진 제1회 지방선거에서의 민주당의 대승을 밑천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민주당에서는 대선후보로 나갈 수 없다고 판단,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민주당 인사들과 국민은 엄청나게 반발했지만 김대중의 결심은 꺾이지 않았고, 결국 95명의 민주당 의원 중 65명이 새정치국민회의로 옮겼다. 노무현은 이 때도 김대중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야권이 분열된 채로 치뤄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방선거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노무현은 15대 총선에 종로에서 출마해 이명박, 이종찬에 이은 3위로 낙선한다. 이때 노무현을 비롯해 낙선한 민주당 인사들이 강남에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차리고, '통추'를 조직했다. (야권 분열의 결과 이명박이 당선되지만 후에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박탈 당해 미국가서 에리카 누나랑 있을 때 치뤄진 재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다.) 여하튼, 이로 인해 김대중은 엄청난 욕을 먹었다.


  시간이 흘러 1997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통추는 이회창과 손을 잡을 것인지 김대중과 손을 잡을 것인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결국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갔다. 노무현은 김원기, 유인태, 원혜영과 함께 국민회의에 입당했고, 이철, 박계동, 이부영, 제정구는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97년 대선은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의 3자구도가 형성되었다.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에 밀려 2등을 했던 이인제가 이회창이 아들의 병역문제로 지지율이 하락하자 탈당하고 대선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12번의 당적 변경을 통해 현재 새누리당으로 돌아왔지만 '당적변경 한국 기록 보유자' 혹은 '피닉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로인해 보수표가 나뉘었고 이회창 아들의 병역 문제와 IMF, DJP연합, 김대중의 이미지 변신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도 겨우 39만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70대의 노 정객, 네 번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 또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 그러나 김대중은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대한민국이 부도 직전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vs김영삼은 이동형 작가가 인터넷에 연재한 글들을 다듬고 추가해서 출판한 그의 첫번째 저서이다. 이이제이의 태동과도 같은 책이다. 읽기 쉽고 중간중간 삽입된 유머와 야사들로 정치를 매우 재밌게 풀어냈다. 다만 곁가지로 자주 빠져 조금 산만하다는 점이 아쉽다.


  김대중과 김영삼. 양김이라고 불리는 두 사람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표본 그자체다. 다른말로 하자면 '양김의 전쟁이 곧 현대사'이다. 라이벌로서 많은 대결을 하고 서로 돕기도 했다. 하지만 87년 대선에서의 단일화 실패와 김영삼의 3당합당 이후 두 사람은 화합하지 못했다. 92년 대선에서 김영감이 승리하고 승자의 아량으로 김대중을 잡았다면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었겠으나 김영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95년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은 집권을 위해서 김영삼을 매몰차게 몰아붙였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로 상도동 쪽에서 끊임없이 차남 현철 씨의 사면을 부탁했지만, 거절했다. 김영삼의 앙금도 쌓여만 갔다. 두 사람의 앙금은 김대중이 병실에 입원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일 때, 김영삼이 "화해하자"고 말하고 나서야 풀어졌다.


  양김이 화합해서 정치를 할 수 있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본다. 87년에 서로를 인정하고 동전 던지기를 해서라도 단일화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다면 적어도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전재산 29만원으로 골프치고 다니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전두환을 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5.18의 발포책임자를 가려내고 온당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아쉬울 따름이다.


  그런 큰 역사적 가정이 아니라도, 김대중과 김영삼이 조금만 더 일찍, 최소한 서로 의사를 확인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할 때 서로를 인정하고 화해를 했더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생각해본다. 


p.s.

  이 리뷰는 김대중 대통령 서거 5주년을 맞아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행보를 다시 돌아보는 마음으로 적었다. 리뷰를 적으면서 대한민국 정치사의 아픔 구석구석에 김대중 대통령의 흔적이 남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는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정치보복이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김대중 대통령에게 빨간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실제로 빨갱이었다면 IMF로 국력도 바닥을 기던 그 때, 적화통일 되지 않았겠냐는 합리적인 논리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사라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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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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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포스트 LED 불 켜기에서 스위치로 LED 불을 켜고 끄는 것을 알아봤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GPIO를 이용해서 LED를 깜빡이는 방법을 알아보자.


  GPIO를 컨트롤 하는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은 WiringPi 라이브러리를 사용하는 것이다. Git가 설치되어 있으면 WiringPi를 설치하기가 수월하다. Git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면 'sudo apt-get install git-core'를 입력해서 설치한다. Git이 설치되어 있으면 'git clone git://git.drogon.net/wiringPi'를 입력해서 WiringPi를 다운 받는다. 다운 받은 디렉터리에 들어가서 './build'를 입력하면 설치 끝.

 

  제대로 설치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gpio readall'을 입력한다. 아래 사진과 같은 화면이 나온다. 제일 왼쪽행(BCM)은 Broadcom의 BCM2835 칩에서 사용하는 핀번호, wPi는 WiringPi 라이브러리의 핀번호, Name은 GPIO의 이름, Mode는 핀이 입력모드인지 출력모드인지를 알려주고, V는 핀의 값으로 1은 전압이 High상태 0은 Low상태, 그리고 Physical은 라즈베리파이 핀헤더의 번호이다. 예를들어 밑줄 친 열을 보면 11번 헤더핀이 출력모드이고 값은 0인 것을 알 수 있다. 유튜브(http://www.youtube.com/watch?v=Wr49ia3oID4)에 올라온 실험에 따르면, 핀이 입력모드일 때 전압이 0-1.19v는 0, 1.34-3.3v는 1으로 인식된다고 한다.


  라즈베리파이의 GPIO 핀을 이용해서 전압을 넣으면 LED가 켜지고 전압을 없애면 LED가 꺼지는 것으로 매우 단순하다. LED 불 켜기에서와 같이 LED를 저항과 GND에 연결하고 3.3v 에 연결되어 있던 부분을 GPIO핀으로 연결해주면 세팅이 완료 된다. (예제를 그대로 사용하려면 NS-GPIO의 G17 이나 라즈베리파이의 11번째 핀에 연결해야한다.)


  아래 wiringpi.com에 올라와 있는 예제인 'blink.c'의 코드이다. 이것을 복사해서 라즈베리파이에 'blink.c'로 저장하고 'gcc -o blink blink.c -lwiringPi'를 입력해서 컴파일 하고 'sudo ./blink' 명령으로 실행하면 아래 동영상과 같이 LED가 깜빡이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include <wiringPi.h>
int main (void)
{
  wiringPiSetup () ;
  pinMode (0, OUTPUT) ;
  for (;;)
  {
    digitalWrite (0, HIGH) ;
	delay (500) ;
    digitalWrite (0,  LOW) ;
	delay (500) ;
  }
  return 0 ;
}




  다음 포스트에서는 'blink.c' 프로그램의 코드를 살펴보고, 수정해서 LED로 신호등을 만드는 것을 알아보자.


참조

WiringP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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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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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사단 임병장 총기난사 사건, 28사단 윤일병 살인사건 등 군대 내 폭행 문제로 시끄럽다. 엽기적인 사건과 더불어 군대가 이 사건들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고 은폐만 하려는 태도로 일관하여 국민의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그런데 군고위관계자들이 이게 다 노무현 탓이라고 말해 논란이 되고 있다.


  문화일보 기사에 따르면, 14일 군고위관계자들이 노무현 정부에서 군 복무를 줄이는 바람에 현역 판정이 급증했고 그로 인해 부적격자들이 입대하게 되어 병영 내 구타·가혹행위 및 폭력과 자살 등 부조리가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노무현 탓 할건가? 노무현 정권이 끝난지 벌써 7년째다. 노무현 정부의 군복무 단축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으면 시행할 당시 자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리고 노무현 정권이 막을 내리고 MB정부, 박근혜정부로 넘어오면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뭐하고 있었냐는 말이다. 자신들의 잘못은 시인하지도 않고 저렇게 남탓을 하니 무엇이 바뀌겠는가? 


  정말 나쁜건 이 논리가 매우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설득력을 갖는 다는 거다. 게다가 24개월, 26개월, 더 나아가 30개월 이상 군 복무를 한 남자들이 바라보는 군복무일수 감축에 대한 반감을 자극하여 동조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참으로 비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제시된 근거만으로 이것이 문제다라고 할 수 있을까?


  첫째, 가장 문제는 복무일수 감축이 아니라 현역 판정의 증가다. 복무일수 감축으로 현역 판정이 올라갔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현역병 판정의 잣대가 고무줄 처럼 왔다갔다 한다는 점을 자기들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왜 현역 판정이 늘었는가? 군대 갈 수 있는 자원은 줄어드는데 병력의 수를 유지하려다 보니 현역 판정이 느는 것이다. 병력이 정말로 저정도 필요한가? 그것부터 '커밍아웃'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벌써 수십년째 북한보다 몇배 더 많은 국방비를 써가면서 (군장성이라는 사람들 말에 따르면) 북한에 이길 수도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은 그 책임은 도대체 누구한테 있는가? 병력들을 총알받이로 전방 부대에 배치하여 전쟁 발발시 3일 버티면 미군이 와서 도와주는것이 대한민국 육군의 작전이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자라면 알고 있다. 그리고 테니스병, 골프병, 목욕탕병, 비서병, 공관병 등 사실상 국가 안보에 필요없는 곳에 병력을 낭비하고 있으면서 병력이 부족하다고 하면 어떻게 납득할 수 가 있겠는가? 그리고 병력수를 줄이는 것을 그렇게 반대하는 이유가 국가의 안보보다는 별들의 자리 보전에 있는거 아닌가?


  둘째, 현역 판정의 증가가 복무일수 감축의 영향이 있다하더라도 얼마나 그 영향이 있는지 설명하지 않은 채 저런식으로 호도하는 것은 정말 나쁘고 치사한 짓이다. 기사에서 현역 판정률이 복무월수 30개월이던 1986년 51% 에서 복무월수 24개월이던 2003년 86%로 상승, 복무월수 20개월이던 2013년 91%까지 상승했다며 마치 복무월수의 감축으로 현역 판정률이 많이 높아진 것 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현역 판정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인구수 변화다. 1986년에는 징병대상자가 44만5천명으로 2013년 징병대상자 35만4천명보다 약 9만명 많았다. 당시에는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자리가 없어서 현역병으로 갈 수 없었던 거다. 그렇다면 당시에 '아들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던 전두환, 노태우 탓인가? 또한 대한민국이 부유해 지면서 병이나, 신체상의 문제로 현역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의 수도 줄었을 것이고, 중고등학교 중퇴자도 줄었고,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 분명한데 이에 대한 연구 없이 간단히 수치 몇개 내놓고 이게 문제다 라고 하는 것은 술자리나 개인 블로그에 쓸 수는 있는 말이겠지만 군고위관계자들이 하기에는 책임 없는 자세다.


  셋째, 지금 육군에서 일어나는 일이 사실상 걸러져야 할 인물이 입대를 하게 되어 생기는 일인지 조금 더 생각해볼 일이다. 문제가 있는 병력을 병무청에서 지금 하는 신체검사로 완벽하게 걸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로 병과 신체상의 문제만을 기본적으로 검사해서 걸러내는 그런 신체검사로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신체검사를 보완해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무리 보완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는 병력을 다 걸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군에서 생활하는 것을 제대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문제를 예방하고 문제가 일어나도 최소화할 수 있다. 지금 육군의 문제는 사고칠 병사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병력을 관리해야할 장교와 부사관의 자질이 정말 떨어진다는 점에 있다. 사실상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병사로 가기 싫어서 부사관이나 ROTC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 중 상당수가 병력관리 능력이 없음은 물론이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병사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된 간부가 통솔하는 부대는 문제가되는 병사가 들어와도 사고치지 못한다. 사고가 터지면 문제가 된곳만 땜질 하다보니 지금와서 그곳이 곪아 터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지금 대한민국 육군이 문제가 많다는 점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복무일수 감축이 아니더라도 병력의 감소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그렇다고 국민의 저항때문에 복무일수를 늘일 수도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계속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병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간구해야 한다. 정말 병력이 필요한 곳 외에는 병력을 줄이고 감시 카메라 등 첨단 장비와 화기들을 이용하여 병력의 감소에도 군의 전투력 감소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러라고 달아준 별인데 노무현 탓만 하고 있으니 화가 난다. 그리고 진짜 안보를 위한다면 북과 긴장관계를 풀어가면서 신뢰를 쌓아가고 서로 군사력을 줄여가서 결국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에 미래는 없다.


p.s.

  박근혜씨도 지난 대선기간에 군복무기간을 18개월까지 줄이겠다는 공약을 했다. 물론 지키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다 노무현 탓인가?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문화일보] 盧정부 복무 단축해 현역판정 급증.. 부적격자도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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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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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도해도 너무한다. 사람이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할 말이 있는데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가혹한 폭언을 일삼는 수구꼴통들 때문에 가슴이 무너진다. 자식을 먼저 앞세우고 그 진상조사를 제대로 하기위해 자신의 몸을 망쳐가며 단식하고 계신 분에 대해서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했다는 말이 참 가관이다. 안홍준의원은 지난 7일 교육문화체육관광위의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25일째 단식 중인 세월호 유족을 두고 "제대로 단식을 하면 벌써 실려가야 되는 것 아닌가"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또한 "그러니까, 제대로 하면…단식은 죽을 각오로 해야 돼. 병원에 실려가도록… 적당히 해봐야…"라고 말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말로 세월호 유가족들이 쓰러져서 죽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면 세월호 유가족들이 YS처럼 보름달 빵을 먹거나, 니네 처럼 아침햇살 쳐먹은거 아닌지 의심하는건가? 172cm 키에 48kg 까지 살이 빠진, 아파서 제대로 눕지도 못하는 세월호 희생자 유민이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떻게 저런 막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 할 수 없다. 


  자신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안홍준의원은 8일 자신의 트위터에 "의사 출신으로서 단식자들의 건강이 위험하다고 염려돼 한 발언이다. 단식 농성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과거 시민운동 할 때부터의 소신을 말한 것 뿐"이라고 해명 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해명에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자 10일 보도자료를 통해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으신 세월호 유가족 여러분께 고개 숙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당신네 무리에서 매번 하던 이야기다 보니까 이 발언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생각도 못하고 그냥 툭 던진거 아닌가? 이게 논란이 되니까 사과하는 척 하는 거 아니냐 말이다. 그리고 정말로 죄송하다면 국회에서 농성중인 유가족을 찾아가서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것 아닌가? 유가족들 만나서 사죄도 하고 유가족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듣는 척이라도 해야 진정성있는 사과 아닌가. 농성장이 어디 몇시간 거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보도자료 통해서 죄송하다고 전하는 거는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란을 잠재우기 위함 아니냐는 거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지도 벌써 4개월이 다되어 가고, 그간에 변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국가 재난사고의 피해 유가족이 진상조사를 위해서 단식까지 해가면서 국가에 요구해야 하는 상황도 우습거니와 그 유가족들을 모른척 무시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계속 하는 집단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화가난다. 그리고 항상 논란이 되면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단다. 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유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이유는 첫째, 유가족들이 더 지쳐서 포기하거나 죽기를 바라는 것이고 둘째, 국민들을 계속 화나게 만들어서 이 사건에 대해서 피로도를 쌓아가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4개월이 다되어 가는데 첫 단추도 제대로 끼우지 못했다. 시간만 흘러 갔을 뿐, 밝혀진 것도 하나 없고 해경 해체 외에 제대로 책임진 사람도 없다. 진상규명이 안되니 대책 마련이 될리가 만무하다. 이렇게 또 지나가면 제2, 제3의 세월호가 없으란 법이 없다. 그래서 조금 힘들어도 더 관심을 갖고 4개월아닌 4년이라도 제대로 진상규명 해야한다.


참고

[아시아경제] 안홍준, 세월호 유가족 단식 폄훼 발언 사과 "사적으로 물어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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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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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일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 출품작에 대해서 오형국 광주시 행정부시장이 작품 수정 압력을 가하고 전시할 수 없다고 밝혀서 논란이 일었다. '세월 오월'(아래 사진)이라는 작품으로 박근혜씨를 허수아비로 풍자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7시간동안 무엇을 했는지 알 수도 없고, 무능함의 끝을 보여주고, 어느 것 하나 자신이 직접나서서 해결하지 못하는 박근혜씨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풍자로 풀어낸 작품이 무엇이 문제가 되어서 그것도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마저 전시되지 못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세월 오월


  '세월 오월'의 작가인 홍성담 화백은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닌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점에서 국가폭력에 의한 사건인 5·18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해 세월호와 오월을 합성해 제목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홍 화백은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광주정신전을 하면서 이 정도의 패러디조차 하지 못하게 한다면 광주정신전을 하지 말아야 한다"며 광주시의 작품 수정 압력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대해 오형국 행정부시장은 "광주시의 예산 지원으로 개최되는 광주비엔날레에서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광주시가 정부의 예산 삭감 등을 우려해서 박근혜씨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그림을 유보 시킨 것이다. 이 자체로 대한민국에 더 이상 표현의 자유가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에 표현의 자유가 가장 많이 보장되던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을 희화화한 연극 같지도 않은 '환생경제'라는 쓰레기를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공연했었다. 그 내용은 지금 봐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악의적이고 거짓말 투성이였다. 그리고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씨는 그 연극을 보고 활짝 웃고 계셨다. 당신 아버지 박정희 때였으면 거기 있는 모든 사람 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병신되서 나올 정도였지만 그 중 아무도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게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라진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다. 당시 논란이 되자 무엇이라고 했나? '연극은 연극으로 이해해달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박근혜씨는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가? 박정희씨가 반신반인이기에 박근혜씨도 1/4신 이라서 풍자해서는 안되는 건가?


환생경제 박근혜

환생경제 박근혜


  일본 산케이신문의 박근혜씨 7시간 행방불명 사건과 정윤회에 대한 보도를 이유로 자유수호청년단과 독도사랑회 등 시민단체가 각각 지난 6일과 7일 가토 지국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그 후 청와대에서 강경대응하겠다고 밝히자 검찰에서는 가토 지국장을 출국금지 요청 하는 등 신속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산케이신문에서는 이 기사에서 문제가 된 박근혜씨의 7시간 행방불명과 정윤회 관련된 내용은 조선일보 칼럼을 인용 한 것인데 왜 조선일보는 문제 삼지 않고 자신들만 문제 삼느냐고 반발하고 있다. 사실 그 의혹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민들 사이에서 돌아다녔었다. 아니 신문에 소개된 내용보다 훨씬 더 한 추측도 난무한다. (쫄아서 옮기지는 못하겠다.) 게다가 정윤회 관련 의혹이 계속 커진 이유는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동안의 박근혜씨의 행적을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사생활이라며 계속 감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세간의 의혹에 대한 신문사의 기사를 가지고 외교 문제로 까지 키우는 것은 자신에게 향하던 대학생들과 국민들의 비판을 단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하던 아버지 박씨와 매우 흡사하다. 부전여전(父傳女傳). 즉, 애비나 딸이나. 씨바.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아버지 박씨 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아버지 때는 잡아가두고 두들겨 패고 죽이는 것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면, 지금은 돈과 고발이라는 방법으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2004년 당시 박근혜씨가 최고 권력자이던 노무현 대통령을 근거없는 내용으로 비방하는 내용의 연극을 보면서도 어디 끌려가지도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지키주려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신이 죽이고 있는 그 표현의 자유 말이다. 당신이 누렸던 그 표현의 자유를 우리에게도 돌려달라!


p.s.

  7시간 박근혜씨가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또 다른 세간의 이야기를 옮길까 하다가 혹시 잡혀 들어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으로 자기 검열을하고 적었던 것을 지우면서 박근혜 정부하에 살고 있음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씨바.


참고

[노컷뉴스] 박 대통령 허수아비 '묘사' 수정 '압력'…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

[오마이뉴스] '박근혜 패러디'는 불륜, 욕설연극은 로맨스?

[한겨레] 일본 기자 "왜 조선일보는 놔두고 산케이만 문제 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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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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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일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와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주례회의에서 세월호 사고 진상조사 특검 추천권과 세월호 국조특위 청문회와 관련한 합의를 도출했다. 중앙일보는 '반가운 세월호 특별법 타결' 이라는 제목의 사설로 이번 합의를 환영하고 세월호 유가족은 '여야가 밀실 야합한 특별법'이라며 세월호 유가족을 두번죽이는 일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이번 합의가 어느쪽으로 기울어졌는지는 명백한것 같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금까지 한결같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다. 진상규명.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도대체 국가는 무엇을 했으며, 최고 통수권자인 박근혜씨는 무엇을 무슨 보고를 받고 어떤 조치를 내렸으며 그 조치를 받은 각 기관들은 무슨 일을 했길래 302명이 갇혀있는 배에서 어떻게 단 한명의 생존자도 배 밖으로 구조하지 못했는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같은 사고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국가의 재난 시스템을 제대로 정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유가족의 주장을 정부와 여당이 무시하고 계속 여야간 정치 싸움으로 끌고 다녔다. 그러던 중 나온 이번 여야간의 합의는 겨우 붙어 있는 유가족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린 처사였다.


  7.30 재보선에서 야권이 질 때 부터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이렇게 힘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측을 했었기에 크게 실망스럽거나 놀랍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새정치연합에 걸었던 마지막 기대는 접을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다. 새정치연합에서 이번에 세월호 특별법 관련해서 한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 보면 정말 광 팔고 표 구걸 한 것 외에 도대체 뭘 했나 싶다. 유가족들과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필요하고 이것이 사법체계를 흔드는 것이 아님을 그토록 부르짖어도 제1야당의 귀에는 그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협상테이블에 앉으면서 자신의 패 하나를 까고 들어가는게 어디있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협상안이라며 기소권을 포기하고 수사권만 들고 나왔는지 알고 싶다. 기소권 없는 수사권은 마지노선 같은건데 그걸 첫 협상에 들고 나가면 새누리당에서 넙죽 감사합니다 하고 받냐는 말이다.


  그렇게 1라운드에서 깨지고는 특검하자면서 대신에 특검의 추천권을 야당에 주겠다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실책성 발언까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관철 시키지 못하고 결국 추천권을 얻어내지 못한 채 현행 상설특검법에 맞춰 실시하기로 했다. 새정치연합 유은혜 원내대변인은 "새누리당이 특검 추천권 안 주겠다고 하니, 특검 추천권과 조사위 구성 둘 중 하나는 양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것"이라며 "어떤 게 더 진실을 밝히는데 중요한가 생각했을 때 조사할 수 있는 구성이 중요하다 생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증인채택에 대한 합의는 하지도 못했다. 특검 추천권을 받지 못한 것도 어이가 없지만 그렇다면 그것 양보하면서 증인채택 문제 까지도 해결했어야 할텐데 그냥 하나 양보하고 하나 양보 받았다는 식의 말은 납득이 안된다. 지금까지 협상에서 계속 더 많은 양보를 해온게 새정치연합 쪽이라고 새누리당에서 증인채택 문제는 우리가 양보하겠다고 하지 않을 것은 길가던 세살짜리 꼬마아이도 알 것이다. 지금 분위기나 새누리당의 지금까지 행태로 봐서 정호성 청와대 부속실장 증인 채택은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때 가서는 어떤 변명을 국민들과 세월호 유가족분들 앞에 내어 놓을지 참~ 기대가 된다.


  김한길 전 대표가 조중동 신문을 보면서 정치 한다더니 새정치연합 전체가 그런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도대체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대변하겠다는 사람들이 무슨소리를 하는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적어도 새누리당은 자기들에게 표주는 지지자들의 목소리는 대변한다. 도대체 새정치연합은 누구 목소리를 대변하는지 모르겠다. 중도표를 끌어와야한다고 하면서 결국 자신의 지지자들이 투표장에 나가지 않게 만들고 있다. 남경필 도지사가 사회통합부지사를 야당인사로 임명하여 연정을 하겠다는 발표를 한 마당에 차라리 이 분위기로 중도 뿐 아니라 보수표도 긁어올 수 있도록 새누리당과 합당하여 새정치누리당을 만드는 것은 어떤가? 정말 언제까지 새누리당 2중대 역할을 할건가? 정신 못차리면 차라리 당을 깨고 새로 시작하는게 어떨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중앙일보] 반가운 세월호 특별법 타결

[연합뉴스] 세월호 가족 "여야 특별법 합의는 밀실 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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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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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황우여 교육부 장관 겸 사회부총리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 황우여 후보자가 5선 국회의원 출신이자 전 한나라당 대표였던 탓에 많은 언론들이 쉽게 청문회를 넘어 갈 것이라 예측 했다. 실제로 여당 위원들은 물론 야당 위원들도 김명수, 정성근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 때에 비해 그 수위가 낮아진 것이 느껴졌다. '다른 후보자 같으면 큰소리칠 사안임에도 5선 국회의원을 지낸 후보자이기에 그렇게 까지 하지 않고있다'는 유인태 의원의 발언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더해 인사 청문회로 벌써 여러명이 낙마를 했기에 큰 흠이 나오기 전에는 낙마시키기에 야당의 부담이 크다는 점에서 어렵지 않게 청문회를 넘어 갈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우여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를 보고 두가지 점에서 논란이 있었다. 첫째는 청문위원들이 요구한 기초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의 청문회 전략은 최대한 늦게 자료를 내놓아서 청문회를 무력화 시키는 것 같다. 지난 청문회에서도 후보자들이 청문위원들이 요청한 자료를 제출하지 않아서 청문회에서 위원들이 후보자를 검증하는 것을 방해했었다. 그때도 어떻게 국민을 대신해서 후보자들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청문위원들에게 자료를 강제로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없을까 하고 의아했지만, 5선 국회의원으로 수많은 청문회에 청문위원으로 참석했을 황우여 후보자가 저렇게 청문회를 무력화 시키는 것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이번에도 역사관에 관한 문제가 나왔다. 교학사 국사 교과서 문제, 국정 교과서 문제, 아베에게 각하라고 표현한 문제 등이 붉어졌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5.16에 대한 인식이다. '5.16 쿠데타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윤관석 의원의 질의에 황우여 후보는 "장관으로서는 '정변'이라는 현 교과서 기술을 따른다"면서도 "(5.16과 관련해)여러 평가가 있고, 정치인으로서는 산업화 단계에서 국가발전의 기틀이 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본다"는 다소 애매한 답변을 했다. 지난 청문회에서도 이와 똑같은 질의가 있었고 김명수 후보자는 당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표현을 써서 문제가 되었다. 아직도 5.16이 쿠데타인지 혁명인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박근혜씨 때문인가? 5선국회의원에 당대표까지 지냈다는 양반이 쿠데타라는 명백한 사실에 눈치를 보며 답하는 것이 정말 대한민국 사회가 민주주의 국가인지 의심이 된다.


  박근혜씨는 대선 전에 5.16에 대해 "돌아가신 아버지로선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답해서 누리꾼들의 공분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었다. 박근혜 정부 장관들에게 '5.16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청문회의 단골 질문이었다. 이에대해서 크게 세 부류, '교과서를 참고해달라'는 '교과서파', '역사적 평가에 맡겨야 한다'는 유보파, 그리고 '5.16은 쿠데타'라는 소수의 소수파로 나누어진다. 황우여 후보자는 정치인 답게 '교과서에 기술된 것을 존중하지만 여러가지 평가가 존재한다'는 식의 애매한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5.16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5.16이 쿠데타라는 점은 5.16에 대한 평가와 무관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에대해 필자가 최근 읽고 있는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유시민씨는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라고 정리한다.


  똑똑한 황우여 후보자가 이에 대해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된다. 단지 누구 눈치를 보느라 말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눈치를 보고 있는 후보자가 사회부총리로서 정부와 국민사이의 갈등을 해결 할 수 있을지 의심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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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일 이어지는 충격적인 살인 사건 소식에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까지 악날해 질 수있는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28사단 윤일병 구타 살인 사건과 김해 여고생 살인사건이 충격을 주는 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행한 폭력의 잔혹성과 살인을 한 후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고 한 처리 방식, 그리고 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10대 20대의 젊은이라는 점이다.


  윤일병의 경우 전입한지 2주가 지나고부터 약 35일 동안 매일 같이 구타, 가혹행위를 당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이 윤일병을 구타한 이유는 기가막힌다. 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어눌하게 한다는 이유로, 대답을 늦게 한다는 이유로, 또는 말대답을 한다는 이유로, 또는 소리를 내서 먹는다는 이유로, 다리를 전다는 이유로 구타를 했다고한다. 심지어 자신들의 폭행으로 인해 다리를 절고 있는데 그것을 이유로 추가로 폭행했다니 이들의 야만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다. 게다가 폭행 가해자 중 일부는 윤일병이 전입들어오기 전까지 이 사건의 주범인 이모 병장으로 부터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해왔다는 점에서 폭력의 세습, 대물림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윤일병 사망


  또한 폭행 뿐 아니라 가래침을 핥게 하고, 치약을 짜서 먹이는 등의 가혹행위와 오전에 폭행하고 기력을 차리게 하려 수액을 맞힌 후 또 폭행 하고 폭행 중 쓰러지자 맥박을 체크하고 산소 포화도 검사를 한 후에 또 폭행하여 사망에 까지 이르게 하였다는 내용은 정말이지 이게 사람이 한 짓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끔찍하다. 게다가 4월 6일 자신들의 폭행으로 윤일병이 사망하자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만두를 먹다 죽었다"고 입을 맞추어 거짓으로 증언하고 피해자의 수첩을 찢어서 증거를 인멸하려는 등 사람이 할 수 있는 추악한 행동은 모두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김해 여고생 살인 사건은 더욱 충격적이다. 이 범행의 범인들은 피해자 윤모양(15)와 동년배인 15살의 여고생 4명과 20대 3명의 남성이다. 이들은 윤양을 부산의 한 여관에 데려가서 인터넷으로 '조건만남' 대상을 물색해 그에게 성매매를 강요하고 이로 얻은 화대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게다가 자신들의 강요로 몸까지 팔게 된 피해자를 집단으로 구타하고 술을 강제로 먹이고 토하면 토사물을 핥아먹게 시키고, 앉았다 일어서기, 끓는물을 팔에 붓기 등의 학대를 하고 심지어 보도블럭으로 윤양을 때리기도 했다. 이들의 반복되는 구타에 윤모양은 4월 10일 승용차 뒷좌석 바닥에서 급성 심장정지로 숨졌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도 양심과 인간성을 잃은 그들의 만행을 멈추지 못했다. 자신들의 범죄를 숨기기 위하여 야산에 시신을 묻기로 결정하고 피해자의 얼굴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시신을 훼손하여 신원을 알아 볼 수 없도록 하였다. 그들은 시멘트를 반죽해 시신 위에 뿌리고, 돌멩이와 흙으로 시신을 덮어 경남 창녕의 한 야산에 묻었다. 이들 중 일부는 윤양을 살해 한 후 40대 남성을 조건만남으로 꾀어내어 돈을 뺏으려 하였지만 남성이 반항하자 또 한번 살인을 저질렀다.


  유사이래 아니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로 이 땅에서 폭력이 사라진 적은 없다. 하지만 폭력의 연령대가 갈수록 낮아지고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 폭력의 양상이 1대 1이나 집단대 집단이 아닌 다수의 개인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 그 잔혹성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날로 더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힘 없는 개인에 대한 집단의 공격이라는 점이 정말 비열하다. 이렇게 폭력의 잔혹성이 커지는 이유는 개인의 양심과 도덕성이 예전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는 점을 이유로 꼽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런 폭력이 개인에 대한 집단의 폭력이기에 더욱더 잔혹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1대1의 폭행도 문제가 있지만 1대1의 경우 자신도 당할 줄 모른다는 두려움, 폭행으로 인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한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도 도망을 간다던지 주먹을 한번 날려본다던지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할 수 있지만 1대 다의 싸움에서는 방어권 행사 자체가 또다른 폭력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기에 방어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폭력의 강도는 n배로 세어지고 책임감은 1/n로 줄어드는 것이다.


  요즘에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 당연시 되어버린 듯 하다. 약육강식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강한 것이 약한것을 지배하는 것이 옳음'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약한 자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 해버린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지만, 그것이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상대로한 폭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런 폭력의 중심에는 저 희생양이 아니면 저 피해가 나한테 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래서 피해자였던 병사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폭력은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사람 한두명만 있어도 그 힘을 잃을 것이다. 용기있는 한 두사람의 힘이 크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두려움을 매개로 하는 집단의 결속력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쉽다. 이모 병장에게 폭행당해온 가해자들 중 한명만이라도 파국으로 치닫는 이 사건에 제동을 걸었더라면, 친구를 때려죽인 여고생중 한명이라도 이건 너무 심하다고 제동을 걸었다면 두명의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군대판 '악마를 보았다', 수사관도 혀 내둘러"

[서울신문] 김해 여고생 살인사건 "너무 힘들다. 몸에 물 뿌려달라" 요구하자 끓는 물을..경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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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D는 전자회로에서 가장 기본적인 소자중에 하나이다. 사용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아래 그림 같이 +극에 전원을 넣고 -극에 접지를 하면 불이 켜진다. +극과 -극을 알아보려면 기본적으로 긴다리가 + 짧은 다리가 - 극이다. 다리 길이로 +,- 극을 구별할 수 없을 경우에는 헤드에서 작은쪽이 + 큰 쪽이 - 극이다.

LED


  LED를 포함한 전자소자에 최대전압 이상의 전압이 걸리면 소자가 타버릴 수 있다. 예를들어 3.2V LED에 6V의 전압을 가하면 순간 많은 전류가 흐르면서 LED가 번쩍하고 타서 더이상 쓸 수 없게 된다. 이를 조절하기 위해서 적절한 저항을 달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적절한 저항의 크기를 계산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중고등학교 물리시간에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V=IR공식을 이용하여 R=V/I로 계산 하면 된다. 예를들어 동작전압이 1.8~2.4V 이고 동작전류가 20mA 그리고 소스전압이 3.3V 인 경우, V=3.3-2.4, I=20mA 를 식에 대입하면 R=45Ω이고,  V=3.3-1.8, I=20mA를 대입하면 R=75Ω이므로 45~75Ω사이의 저항을 사용하면 된다. 저항을 계산할 때 고려해야 하는 것이 와트인데 저항마다 견딜 수 있는 전력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P=VI=I^2R 이라는 공식을 사용하면 되는데 위의 예를 보면 I=20mA, R=75Ω이므로 P=0.03W이다. 따라서 1/8W 이상되는 저항을 사용하면 문제 없겠다.


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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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은 전자회로 구성의 필수요소라 불릴만큼 특수한 경우 외에는 거의 항상 쓰이는 소자이다. 저항의 목적은 흐르는 전류의 양을 조절하는데 있는데 누구나 한번씩은 들었을 법한 유명한 공식 V=IR에 의하면 전압이 같을 때 저항이 커지면 전류가 적게 흐르고, 저항이 작아지면 전류가 많이 흐른다. 저항을 사게되면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저항값을 적어놓고 쓰기 때문에 저항값을 따로 읽을 필요가 없을 때가 많으나 종종 저항값을 읽어야 할 때가 있다. 테스터기가 있다면 테스터기를 이용하면 쉽게 저항 값을 읽을 수 있지만 없더라도 아래의 저항값 표만 있다면 읽을 수 있다.

저항


  저항값 표로 저항을 읽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저항을 보면 색깔 띠가 있는데 3색 부터 6색 저항 까지 있는데 기본적으로 저항을 읽는 방법은 큰 차이가 없으므로 4색 저항을 읽는 법으로 설명을 하자. 4색 저항의 경우 처음 두 색은 수치, 세번째 색은 승수 네번째 색은 정밀도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위 사진 오른쪽 저항은 갈-빨-갈-금 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를 아래의 표를 참조해서 읽어보면 이 된다. 그리고 네번째 색이 금색이므로 ±5%의 정밀도를 갖는다. 참고로 5색저항은 앞의 세 색이 수치, 네번째 색이 승수 그리고 다섯번째 색이 정밀도를 나타내고, 6색저항은 5색저항과 같고 여섯번째가 온도 계수를 나타낸다.

저항값 표


  위에서 알아 본 바와 같이 표만 있으면 저항값을 읽는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요즘 처럼 다들 스마트폰을 들고다니는 때에 스마트 폰 앱 하나면 쉽게 저항값을 읽을 수 있다. 플레이 스토어에서 저항 읽기로 검색하면 많은 앱이 나오는데 그 중 가장 상위에 있는 저항 계산기를 사용해 봤다. 사용법은 설명할 것이 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띠를 클릭하면 색이 바뀌고 그에 따른 저항 값이 바로바로 계산되어 위에 표시된다.

저항값 읽기 앱 저항값 읽기 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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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포스트 라즈베리파이 GPIO 소개에서 라즈베리파이의 GPIO에 대해서 조금 알아보았다. 아래 사진에 ⑧번이 바로 GPIO인데 핀마다 점퍼 케이블을 사용하면 되지만 좀 더 쉽게 사용하는 방법을 이번 포스트에서 알아보자.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이 엘레파츠에서 판매하고 있는 NS-GPIO-03인데, 라즈베리파이 GPIO를 편하게 쓸 수 있게 만들어주는 보조장치라고 보면 되겠다. 아래사진에서 보이듯 별것 없고 어렵지 않게 만들 수도 있지만 완성도를 생각하면 8천원 주고 사는게 낫다는 생각이다. 아래와 같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오기 때문에 납땜을 해야한다.


  납땜을 해서 완성하면 아래와 같이 라즈베리파이와 빵판에 연결해서 GPIO 핀들을 사용할 수 있다. 엘레파츠에 보면 NS-GPIO 종류도 여러가지가 있으니 그중 맞는걸로 찾아서 구입하면 되겠다.


p.s.

  납땜 할때 케이블 소켓을 먼저 납땜 하고 다리를 납땜하려 했더니 아래 사진처럼 계속 앞으로 넘어져서 다리 납땜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으로든 앞을 받치고 납땜을 해야하는데 필자는 백원짜리 3개 십원짜리 4개로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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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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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도씨

저자
최규석 지음
출판사
창비 | 2009-06-05 출간
카테고리
만화
책소개
민주화운동의 정점, 뜨거운 기억을 담은 6월민주항쟁 '사람도 1...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인상깊은 구절

 



 

내용 요약

  영호는 광주 5.18 희생자들을 향해 폭도라고 멸공을 외치던 반공 소년이었다. 영호의 외할머니는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고 아버지는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장면이 텔레비젼에 나올 때 마다 광분하며 어린 영호에게 "법관이 되어 저런 놈들 싹 잡아넣어버려"라고 한다. 그런 영호가 대학생이 되어 마주한 그날 광주의 진실 앞에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대학에서 만난 데모나 하는 나쁜(?) 선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데모에 참여 하기 시작한 영호는 경찰에 연행된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으로 어머니를 잃은 영호의 어머니는 영호의 연행 사실에 자신의 아들이 빨갱이가 되었다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가 영호가 수감된 구치소에서 만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활동을 하게 된다.


  민주화를 향한 열기가 더해가던 중 "책상을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쓰러졌다"는 박종철 열사의 고문 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가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한다. 6월 10일 영호의 면회를 한사코 거부하던 영호의 아버지는 영호를 만나고 택시를 타고 돌아간다. 택시기사는 영호의 아버지에게 6시에 맞춰 경적 시위를 할 생각인데 함께 하겠느냐고 묻는다. 이에 영호의 아버지가 택시기사와 함께 경적을 누르는 것으로 만화는 막을 내린다.


  이날 무슨일이 일어났을까? 노태우가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87년 6월 10일 학생들과 재야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되었고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6만 명의 경찰 병력이 배치 되었고, 3,467명이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6·10민주항쟁의 3배가 넘는 시민들이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여 사람들이 끝도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시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6월 항쟁의 결과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로 부터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6.29 선언을 이끌어 내었다.




  이 만화는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습지생태보고서』『대한민국 원주민』을 발표하고 네이버 웹툰 『송곳』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최규석 화백이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의 제안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이 만화 하나로 87년 6월에 대해서 전부 알 수 없지만, 그때의 뜨거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6월 항쟁에 대해서 더 공부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만화의 중심 주제이자 가장 감명깊은 장면은 영호가 감옥에서 선생님(누군지는 모르겠다)과 대화 하는 장면이다. 영호는 세상을 바꾸려는 이 싸움에 이길 수 있을 지, 끝은 있기는 할지 고민한다. 이때 선생님은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이에 영호가 "그렇다 해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남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선생님은 "지금이 99도다... 그렇게 믿어야지" 라고 대답한다.


  어제 7.30 재보선이 야권의 참패로 끝났다. 필자가 투표권이 생긴 2004년 9월 이후 10여년 동안 권리를 행사했던 모든 선거에서 필자가 표를 준 사람은 다 낙선했다. 필자의 지역이 새누리당 텃밭인 데다가 지난 대선에서 부정선거로 박근혜씨가 당선된 탓이다. 표를 주지 못하지만 꼭 당선 되길 바랐던 후보들 중에는 10.26 재보선으로 서울시장에 당선된 박원순 서울시장 외에는 당선된 사람이 거의 없다. 정말 이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지, 죽기 전에 새누리당이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을 지, 끝이 없을 것 같은 싸움에 두렵다. 누가보더라도 새누리당의 행태는 용서할 수가 없는데도 국민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 당에 표를 주는 현실 때문에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긴 한건지 의문 스럽다. 그런 필자의 심정 때문인지 "지금이 99도다... 그렇게 믿어야지" 라는 말이 마음에 확 와 닿는다.


  두번째로 마음에 와 닿은 장면은 영호의 아버지가 택시 안에서 경적시위에 함께 하는 것이다. 택시 기사는 회사에서 경적 시위에 참여할까봐 경적을 다 떼버렸다고 말한다. 경적도 없는 택시로 경적 시위에 참여한다는 택시기사의 권유로 영호의 아버지도 경적을 누르는데 함께 한다. 경적을 떼버렸다는 택시기사의 말과는 달리 영호의 아버지가 경적을 누를 때 큰 경적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게 그 택시에서 난 소리든 다른 차들의 소리든 상관없다. 경적을 떼어버린 자동차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국민과 다르지 않다. 나 같은 것 한명이 내는 소리가 무슨 울림이 있겠느냐고 묻는 그런 한사람 한사람이 마치 이 택시와 다를바 없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더라도, 목소리가 작아서 남에게 들리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함께할 때 만화에서 처럼 큰 울림이 있을것이라 믿는다.


p.s.

  필자는 책으로 읽었는데 리뷰를 쓰면서 찾아보니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구글에서 '100도씨 최규석'으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번 재보궐 선거에 상처 입은 야권 지지자들은 꼭 찾아서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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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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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설마 했지만 이렇게까지 한쪽으로 쏠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기동민 후보의 사퇴로 시작된 감동으로 적어도 조금의 희망은 보이는 듯 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글 쓰는 현재 새누리당은 5석을 이미 당선됐고 5곳에서는 확실하다. 동작을이 경합중인데 나경원 후보가 앞서 가고 있으나 표 차이가 조금 줄어가는 형국이라 여전히 미지수다. 새정치민주연합은 4곳에서 당선됐다. 15곳 중 10석 혹은 11석을 새누리당이 가져갔다. 5석이면 선전이라던 안철수 대표의 말이 씨가 된 것일까. 동작을의 향방과 관계 없이 선거에 대한 책임론이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선거에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이번 선거에서 새정치연합의 지도부는 어떠한 정치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치밀하지도 못했으며 유권자들에게 감동을 주기는 커녕 실망만 안겼다. 아니 실제로 선거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서도 세월호 참사라는 정말 유례없는 국가적 참사를 등에 업고도 사실상 패배했던 것 아닌가. 진보 교육감 약진과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새누리당에 한석 이긴 것 때문에 가려져서 그렇지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진짜 말도 안되는 참패 당했던거 아닌가.


  6.4 지방선거에서 민심을 읽었다면 반새누리, 세월호만 붙잡아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 하는데 공천 잡음 외에는 별다른 이슈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한채 계속 끌려 다녔다. 대한민국 선거에서 새누리 나빠요 외치는 것으로 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여러번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전략이 부재한 현실이 정말 안타깝다.


  물론 기울어진 축구장에서 불평등한 게임을 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도 알겠다. 저쪽 지지자들은 아무리 무능하고 부정한 것이 밝혀져도 얼굴에 철면피 깔고 어차피 정치인은 똑같은 도둑놈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 지껄이면서 1번에 표주는데 야권 지지자들은 이것도 따지고 저것도 따지고 조그마한 흠에도 투표를 포기해버리는 상황에서 새누리당이 선거를 진흙탕으로 끌고 들어가면 뒤집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도 이해가 된다. 게다가 언론은 중립을 지키지 않고 온갖 부정 선거를 다 저지르는 판에서 이기는 것이 어렵겠지. 하지만 주어진 환경 탓하기 전에 그 환경에서라도 무엇인가 보여주려 했는지, 어떤 감동을 안겨 줬는지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비판하는 것 아닌가.


  이번 선거에서 권은희 당선자를 전략공천이라는 이름으로 광주 광산을에서 꽂으며 여러사람의 마음에 상처 주고, 그를 위해서 기동민 후보를 동작을에 전략공천 하면서 20년 지기 허동준의 가슴에 대못을 박게 만들고, 지지자들의 거센 단일화 요구도 기동민 후보 혼자서 감당하게 한거 아닌가. 그나마 기동민 후보의 결단으로 유권자들의 상처받아 아픈마음 달랬지만 지금 결과로 봐서는 그마저도 유권자들의 마음의 상처를 다 아물게 하지 못했다고 봐야한다.


  선거는 남의 편을 내 편으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편에게 투표할 마음이 생길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묻지마 투표를 하는 저쪽에 비해서 야권이 불리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몇배는 더 잘해야 하는 거다. 어차피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당신들이 우클릭한다고 야권에 표 줄 사람들 아니다. 제발 당신들한테 표 줄 사람들을 봐라.


p.s

  글 쓰는 사이에 동작을도 개표가 끝났다. 9백여표차로 나경원 당선. 1.2%차이 낙선. 아쉽다. 사표가 얼마나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단일화가 투표용지 인쇄 전에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너무 아쉽다. 11:4. 전라도 3석에 수원정 1석으로 안철수 대표가 마지노선으로 삼았던 5석도 못 챙겼다. 참패다. 씨바. 선거는 끝났다. 끝났다고 그냥 놓고 쉴 수도 없다. 세월호 특별법도 있고 의료 민영화도 막아야 한다. 싫든 좋든 당신들이 최후의 보루인걸 어떻하나. 야당의 선명성을 보여달라. 지지자들에게 당신들을 뽑아야할 이유를 보여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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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경원 후보가 이길 것이라고 예상되어지던 동작을에서 정말 아름다운 그림의 야권 단일화 이후 노회찬 바람이 매섭게 몰아친다. 필자는 동작구는 커녕 서울 근처에도 살고 있지 않아서 직접 보고 느끼지는 못하지만 SNS여론이나 관련 기사 그리고 나경원 캠프의 대응을 보면 이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나경원 후보를 보면 객관적으로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있다. 이걸 부인하진 말자. 인간적인 매력이 마이너스라 그렇지 외모만 보자면 국회의원중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대학교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기 힘든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판사로 재직 후, 이회창 전총재 정책특보로 정계에 입문 17대(비례), 18대(서울 중구) 내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승승장구 하던 말그대로 엄친딸이었다.


  17대 대선당시 BBK 동영상이 나왔을 때 '주어가 없다'는 말도안되는 논리로 쉴드를 쳐서 '주어경원'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18대에 서울 중구에서 46.07% 득표율을 얻어 27.6%를 얻은 정범구 전의원에 압도적인 승리를 한 것을 보아 그때까지만 해도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밝은 만큼 어두움도 큰 법이랄까. 정말 승승장구하던 그녀에게 큰 시련이 다가온다. 2011년 10월 26일, 친구 5세훈의 서울시장 사퇴에서 시작된 그 바람이 친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출마한 그녀의 정치 인생을 국쌍의 자리에 등극 시킬 줄이야. 이는 친구 5세훈의 절친 김어준 때문이다.


  당시 폭발적 인기를 구가하던 나꼼수가 박원순 당시 후보를 서포트 하면서 나경원의 알려지지 않은 지난 행적이 다 까발려졌다. 나꼼수의 정봉주 17대 의원은 2005년 자신의 부친 나채성씨가 설립한 사학법인인 홍신학원의 학교들을 정부 감사 대상에서 제외시켜달라는 청탁을 했다고 폭로했다. 이어 사학법인의 비리에 대한 연이은 제보를 보도 하자 자신과 아버지 학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하였으나 10년째 이사로 등재되어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그녀가 국회의원 신분으로 2004년 일본 자위대 행사장을 찾은 사실이 알려져 비난여론이 높아지자 나 의원이 보좌관을 통해 2005년 자신을 비판한 시민 김아무개씨를 고발했고, 이 사건의 처리가 늦어지자 남편 김재호씨를 통해 검사에게 기소 청탁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자신도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사람이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위해 카메라 앞에 중증장애 남학생을 발가벗겨 목욕시킨 것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진정한 국쌍의 자리에 등극하고 서울 시장 선거에서는 46.2%를 받아 53.4%를 받은 박원순 시장에게 크게 졌다.


나경원 장애아 목욕


  2014년 7월 그녀가 동작을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동안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파동과 야권 단일화의 불협화음으로 나경원이 쉽게 이길 것이라는 예측때문인지 매우 조용한 선거를 치루고 있었다. 하지만 노회찬 후보와 기동민 후보의 아름다운 결단, 그리고 천호선 후보, 이정미 후보의 결단으로 야권에 거대한 바람이 불어오자 결국은 네거티브를 꺼내들었다. 세월호특별법 통과 서명운동을 빙자해 불법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다며 선거관리위원회와 검찰에 고발한 상태이다.


  나 후보 측에 따르면 지난 24일 야권단일화 이후 정의당의 상징색인 노란색으로 제작된 유세차와 피켓, 깃발 등을 든 사람들이 ‘4대강 훼손을 잊지 않겠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통과 촉구’ 등을 주제로 한 서명활동 및 시위를 빙자해 노 후보의 선거운동원들과 함께 불법, 편법 선거운동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런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실제로 그런일이 있었다면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지나가면서 보고 가만히 있었겠는가? 지나가는 유권자를 보고 새누리당 지지자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이상 이런 비상식적인 선거운동을 큰 리스크를 짊어지고 하겠는가?


  게다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던 시민들에 대해 나경원 새누리당 동작을 후보 캠프 선거운동원들이 세월호 영상차량 위에 올라타는 등 노골적인 방해를 벌인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이 과정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대한 나 후보에 대한 입장을 묻는 시민 김태섭씨의 팔을 꺽는 등의 폭행과 폭언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구낀 놈이 성낸다고, 나경원 캠프에서는 김씨에 대해서 선거 운동 방해로 고발했다. 


나경원 선거운동원 세월호 차량점거


  나경원 후보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변호사 수임료 탈세 의혹, 호남 출신 공무원 인사 불이익, 친일재산환수법 반대 등 여러가지 의혹들이 있으나 너무 많으니 넘어가자. 이렇게 흠결많은 후보가 당선이 될까? 야권연대도 됐으니까 노회찬 후보가 쉽게 나경원을 물리칠 것인가? 우선 노회찬 후보가 이길 가능성이 꽤 있어 보인다.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 야권연대를 두고 정의당 해산하라는 식의 병적인 반응을 보이고 나경원 캠프측에서 자살골을 넣고 있는 것을 보니 X줄이 타는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 매우 아쉽지만 그래도 저들의 반응을 보니 이길 것도 같다. 그러나 선거는 결국 많이 한 쪽이 이긴다. 여론조사 백 날 해봤자 당일에 투표 안하면 끝이다. 분위기로 선거에 이기는 것도 아니다. 투표권 있는 사람은 내일 꼭 투표하시라. 31일 아침에 웃으며 일어날수 있도록!


p.s.

  나경원 후보 이름으로 발송된 문자 메시지이다. 또 한번 도와달라고 한다. 제발 속지말자. 그리고 야권 단일화 갖고 계속 야합이네 어쩌네 하는데 야합은 1990년 노태우, YS, JP가 손잡고 당신이 속한 그당 만든게 야합이야. 어따대고 야합이래.


나경원 살려주세요


참조

[미디어오늘] 나경원 운동원들 세월호 영상차량 올라타고 시민 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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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어느덧 100여일이 지나갔다. 박근혜씨는 국민들이 보는 카메라 앞에서 세월호 전과 후로 완전히 달라진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처음으로 울었다. 새누리당도 한번만 도와달라며 자신들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읍소하였다. 그러나 무엇이 바뀌었나?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던 정홍원 총리는 문창극 사태로 인한 유임 결정으로 그간 정 총리의 의전에 소홀하던 총리실 공무원들을 두려움에 떨게하며 돌아왔다. 세월호 참사의 컨트롤 타워가 청와대가 아니라는 발언으로 유가족과 상다수의 국민들의 공분을 샀던 김기춘 실장도 여전히 청와대에 있다. 세월호 특별법은 여전히 새누리당의 발목잡기로 한발짝 나가지도 못하고, 진상조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아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제대로 조사해서 알려달라는 유가족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유가족들을 자식들을 앞세워 보상이나 받으려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매도한다. 아무것도 바뀌어지지 않은 이런 상황에서 저들은 또 '가만히 있어라'는 말을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세월호 참사에서 수많은 학생들과 승객들이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에서 나오지 못해서 배안에 갇힌 채로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이유는 선장의 '가만히 있어라'는 방송 때문이었다. 선장의 말을 믿고 배 안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어린 영혼들은 선장의 말을 믿은 죄로 살아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해경이 구조하러 왔을 때라도 선내 방송으로 탈출 명령을 내렸다면 희생을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배 안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들은 마지막 명령은 '가만히 있어라'였다.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 김광진 의원이 녹취록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자신의 말을 섞은 것을 빌미로 새누리당은 국정조사를 파행으로 끌고 갔다. 이 과정에서 조원진 의원과 일부 야당 의원들이 언쟁을 벌이자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싸우지 말라"며 "나갈 거면 그냥 나가라"고 항의했다. 이 때 조원진 의원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 "당신 누구야"라고 '종이질'을 하며 물었고, 이에 "유가족 입니다"라고 답하자, 조 의원은 "유가족이면 좀 가만히 있어라"고 고성을 질렀다. 여당 간사가 유가족에게 "가만히 있어라"고 소리치는 판국이니 국정조사가 제대로 될리 만무하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약속한 16일은 물론 세월호 유가족들이 마지노선으로 제시한 세월호 참사 100일이 되던 24일도 훌쩍 넘어버린 지금까지 세월호 특별법을 통과시키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 100일을 맞아 유가족들은 사고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의미로 전날 안산 합동 분향소를 출발하여 서울광장까지 51km 도보 행진을 했다. 유가족들은 장맛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가운데서 1박 2일간 식사도 하지 않고 서울광장까지 걸었다. 세월호 유가족 180여명을 포함한 주최측 추산 3만여명, 경찰추산 7천여명의 시민들이 서울광장에서 '네 눈물을 기억하라'는 추모 음악회와 시낭송을 마쳤다. 그 후 서울광장에서 광화문광장까지 시민들과 함께 행진하는 것으로 추모제를 마무리하려는 유족들과 시민들을 향해서 경찰들은 또 다시 "가만히 있어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가만히 있어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찰 병력으로 담을 쌓아서 광화문 광장까지 1km 남짓의 행진을 못하도록 막았다.


  세월호 이전과 다른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하던 이들이 어디 있는가? 그들은 여전히 "가만히 있어라" 하면서 선거를 앞두고 다시 한번 도와달라며 읍소하고 있다. 지금 저들의 말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대한민국은 세월호 처럼 침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는 세월호 참사의 몇배가 될지 모른다. 가만히 있지 말라. 자신의 지역구에 재보궐선거가 있다면 투표하라! 선거 때만 도와달라며 고개 숙이고, 선거 지나면 "(국민이면) 가만히 있어라"는 저들을 심판해달라!!


참조

[서울신문] 조원진 막말, “(세월호)유가족이면 좀 가만히 있어라”…세월호 특위 파행 끝 가까스로 재개

[연합뉴스] 세월호참사 100일…'특별법 촉구' 빗속 51㎞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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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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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영 · 심상정 · 기동민 · 허동준 노회찬 선거대책 위원회 참여', '문재인, 노회찬 지지', '정세균 · 천정배 동작을 유세' 뉴스를 접하고 비로소 야권지지자들이 원하던 그림이 선거판에 그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의 전략공천(대체 무슨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문에 이른 패배감에 젖어있던 필자를 비롯한 야권지지자들에게 희망의 빛줄기가 비치는 듯 하다.


어밴던즈2014


  뉴스를 접하고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어벤져스(Avengers)'였다. 노회찬 · 심상정 · 문재인 · 정동영 등 쟁쟁한 이름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지역구에 이런 인물들이 함께 선거 운동을 한다니. 언론의 '역대급'이란 수사가 빈 말은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랑 일본이랑 사이가 안좋아도 외계인이 침공하면 힘을 합해야 하지않겠습니까"라는 노회찬 후보의 예전 발언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어밴던드(Abandoned : 버려진)'였다. 인물들의 면면이 버려진 자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는 이번 7.30 재보선을 앞두고 광주 광산을에 권은희씨를 전략공천 하면서, 그 지역에서 출마를 준비하던 기동민씨를 서울 동작을로 끌어올렸다. 그 때문에 기동민씨는 동작을 전 지역위원장이자 20년 지기인 허동준씨와 얼굴을 붉히게 됐다. 경선을 요구하던 허동준씨는 그렇게 버려졌다. 노회찬 후보로 단일화 되어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여론이 기동민 후보를 압박할 때, 지도부는 '당대당 연합은 없다'며 모든 책임을 기동민 후보에게 떠넘겼다. 이렇게 기동민씨도 버려졌다.


  이에 앞서 천정배 전 장관은 공천에서 배제되었다. 광주 광산을에 출마 의사를 밝혔지만 이른바 중진 배제론의 벽에 부딪혔다. 경선을 통한 후보 공천을 주장했지만, 전략공천(다시 말하지만 무슨 전략이냐)으로 권은희씨가 후보가 되면서 천정배 전 장관은 버려졌다.


  정동영 상임고문에 대해서도 빼놓을 수 없다. 필자는 정동영 상임고문을 싫어했었다. 우선 열린 우리당 분당 때문이었다. 그가 싫어서 17대 대선에선 사표(死票)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권영길 후보에게 표를 줬다. 노인 폄하발언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끝에 17대 대선에서 완패한 뒤에는 그것 때문에 욕했다. 표도 주지 않아놓고. 최근 몇 년간 그의 행보를 보면서 그에 대한 시각이 많이 변했다. 국민이 정치인을 필요로하는 자리에 늘 앞장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아직 그를 용서하지 못한 것 같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는 당연하단 듯 배제되었다.


  문재인. 아, 문재인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그 분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차기 대권 유력후보로 버려졌다는 느낌은 안들 지 모르나 안철수 대표의 집중적 견제를 받고 있는 상황은 분명해 보인다.


  심상정, 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정치의 아이콘들이지만 실상은 비주류였다. 특히 노회찬 후보의 경우 19대 총선에서 승리, 당당히 재선에 성공하지만 이른바 '삼성 X파일' 공개로 인해 9개월 만에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런 그들이 '동작을'을 구하러 왔다. 그들이 '동작을'을 구할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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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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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4일째 아침이 밝았다. 새누리당의 반대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늦어지는 가운데 세월호 유족들의 단식도 보름째에 들어간다. 단식이 길어지면서 건강 악화로 병원에 실려가는 유족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러다 더 나쁜 소식이 들려오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뉴스를 보며 "칼은 나눠 먹으면 산다"는 영화 '와일드 카드'의 대사가 떠올랐다.


  참사가 일어난 것도 벌써 100일이 넘어간다. 인간 같지 않은 자들은 이제 그만하자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으면 또 그런 참사가 일어날 수 있고, 내가 다음 희생자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게다가 이번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다음번에 '특별법' 제정을 통한 진상규명은 더 어려워 질 수 있다. 분명 또 '전례가 없다'는 핑계를 댈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최근 사회의 움직임을 보면 희망과 동시에 절망감도 느낀다.  종교계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다행이다. 25일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가 광화문 광장을 찾았다. 26일에는 한국교회교단장협의회 소속 교단장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북노회는 이윤상 목사를 광화문 광장에 파송하기도 했다.


  지난 24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 시낭송 그리고 음악회'에는 3만여명(경찰추산 7000여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추모제에 참가한 필자의 느낌으로 3만명이란 숫자에 의문이 들긴 하지만, 주최측의 말대로 3만명이 모였다고 생각하자. 평일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물론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26일과 27일에 광화문 광장에 찾아 갔다. 26일에는 2000여명(경찰 추산 900여명)이 모여 촛불을 밝혔지만, 27일에는 단 스무명 남짓이 자리했다. 우리의 문제로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닌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잊혀지는 건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지금 이 시각에도 유족들의 단식 농성은 광화문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제 우리가 칼을 나눠먹을 때다. 어떤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글을 쓰고, 공유하며 잊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유족들의 옆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 한 끼 단식 참여도 좋은 방법이다. 어떤 방법도 좋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월호 참사를 유족들의 문제로 받아들이기보다 내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는데 있다.


  덤. 대선에서의 부정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국정원과 군 등 국가기관이 대선에 관여했다. 304명의 국민이 서해에서 주검으로 떠올랐다. 54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선배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행동했고 부정한 정권을 심판했다. 50년 후 이 땅에 살 우리 후배들에게 우리는 어떤 선배로 기억될 것인가. 결정할 때다.


참고

세월호 단식 유족들 건강 악화로 줄줄이 병원行

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 세월호 가족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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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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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처구니 없는 뉴스가 또 나왔다. 군 간부들이 술에 취해 사병 한 명을 집단 구타, 중상을 입힌 사건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중·동부전선 육군 모사단 포병부대 K모(35) 상사와 S모(23) 중사, J모 여군 하사 등 일행은 지난 19일 오후 10시 16분께 강원 화천읍내 신협앞 삼거리 도로변에서 인근 사단소속 Y모(21)병장을 집단으로 폭행했다. 폭행의 이유는 자신의 일행과 어깨를 부딪쳤다는 것. 또한 이들이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쓰러진 Y병장의 안면을 짓밟는 등 무자비한 폭행을 계속 했다는 점이 알려져 공분을 사고 있다.


  만약 어깨를 부딪친 사람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었어도 폭행을 저질렀을까? 또는 부딪친 군인의 계급이 병장이 아닌 위관급, 혹은 영관급 장교였다면 어땠을까? 마치 조선시대 상놈이 감히 양반 앞을 가로 막았다고 폭행하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보인다. 생각할수록 화가난다. 간부는 지휘체계상 상사이긴 하지만 상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뉴스를 보고 떠오른 사람이 한 명 있다. 필자의 군생활 내내 부대에 함께 있던 황OO 상사. 필자가 지근거리에서 겪은 유일한 한국군 간부였다. 165cm 정도의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으로, 병사들보다 짧고 단정한 스포츠 머리를 고수하던 황상사. 씨름 대회에서 들배지기로 거구의 흑인병사를 넘어뜨린 작은 거인. 병사들의 지지를 받고, 미군들이 엄지를 치켜들던 군인이었지만 남들보다 진급이 느렸던 사람이었다.


  물론 거구의 흑인을 들배지기로 넘어뜨린 장면은 압권이었지만, 필자가 황상사를 존경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황상사는 이등병들에게도 존칭을 쓰던 지휘관이었다. 개인적으로 만날 땐, 농담도 하고 이놈 저놈 하고 부르기도 했지만 공적인 자리에선 'OO야' 대신 이름 뒤에 계급을 붙여 존대했다. 후임들과 함께 있을 때는 조그마한 지적도 함부로 하지 않고, 따로 불러 지적하는 등 인격을 존중해주던 간부였다. 전역을 앞둔 병사들에게는 'OO씨'라고 부르며 깎듯이 대했다. 군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을 그리 존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일 정도로 병사들을 존중했었다.


  황상사가 병사들을 그리 존중했던 것은 병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황상사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직업으로 군인의 길을 선택했지만, 여러분들은 국가를 위해 대가를 받지 않고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월급쟁이 간부들보다 의무를 다하는 병사들이 더 존중받을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간부들이 모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병을 집단 폭행하는 말도 안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상사 같은 간부, 많지 않다. 윗사람 신경을 써야 진급을 한다. 필자는 늦은 나이에 상사가 된 황상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역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씁쓸하다.

 

  덤. 쓰고 보니 황상사가 내 상상속 인물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만큼 믿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필자는 군생활 동안 선임들로부터 단 한차례의 폭행을 당한 적이 없다. 물리적 폭행 뿐만 아니라 언어적 폭행도 없었다. 물론 후임을 폭행한 적도 단 한차례도 없다. 윗물이 맑은 덕이었다.


軍 왜 이러나..간부들 술에 취해 사병 집단폭행 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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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민란의 시대 (2014)

6.6
감독
윤종빈
출연
하정우, 강동원, 이경영, 이성민, 조진웅
정보
액션 | 한국 | 137 분 | 2014-07-23
글쓴이 평점  


 

명대사

조윤

- 지 아비에게 금수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자란 놈인데.. 무슨 짓이든 못 하겠습니까.

- 더러운 땅에 하얀 연꽃이 피는 연유는 신의 뜻인가 연꽃의 의지인가.

-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생을 걸어본 자가 있거든 나서거라. 그 자의 칼은 받겠다.


도치

- 윗전부터 아래 것들까지는 도적질 안 하는 놈이 없어라.. 안 하면 빙신이랑께.


대호

-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할 바를 알지 못하니 슬프지 아니한가.

- 우리는 모두 이땅의 하늘아래 한 형제요 한 자매다. 그러나 세상은 어느덧 힘있는 자가 약한 자를 핍박하고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니우리는 그러한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땡추

- 이번 장의 최종 목적은 그들에게 빼앗긴 땅과 쌀을 다시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택기

- 뭉치면 백성이고, 흩어지면 도적이요!!

 


 

내용 요약

  때는 양반과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던 조선 철종 13년. 나주 대부호 조원숙(송영창 분)과 기생(박고은 분)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난 조윤(강동원 분)은 정실 최씨부인(박명신 분)이 아들을 낳자 찬밥신세가 되고 만다. 그는 무관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났지만 조선시대 서얼차대법에 따라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그의 분노는 자신보다 힘이 없는 백성들을 향한다. 그는 나주 목사 송영길(주진모 분)에게 뇌물을 주고 구휼미를 받은 대상의 명부를 얻어내 그들이 힘들 때 곡식을 빌려 주고 그 빚을 갚지 못하면 땅을 빼앗고 소작농으로 삼는 방법으로 백성들을 착취하여 막대한 부를 챙긴다.


조윤(강동원)


  쇠백정 돌무치(하정우 분)는 조대감댁에 고기를 대는 일을 업으로 하여 살아간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어머니(김해숙 분)와 여동생 곡지(한예린 분)와 함께 성 밖에서 살아간다. 그러던 중 민란에 의해 동생 조서인(이다윗)의 임신한 처(김꽃비 분)를 죽이라는 조윤의 사주를 받고 살인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실패의 댓가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목숨 그리고 없어지지 않을 머리의 상처다. 우여곡절 끝에 '지리산 추설'이라 불리는 군도에 들어가게 되어 도치로 다시 태어나 조윤에 대한 복수를 꿈 꾼다.


도치(하정우)


  군도 '지리산 추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지리산에 모여 살며 부자들의 재물을 도적질 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한다. 나주에서 조윤의 수탈이 심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되어 '백성의 적' 조윤을 처단하고 그들에게 빼앗긴 땅과 쌀을 다시 백성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큰 장을 보러 나선다.


지리산 추설



 

  영화 군도의 중심에는 조선시대 사회의 부조리가 존재한다. 조윤은 백성을 수탈하는 악인인 동시에 기생의 아들로 서얼차별을 받아 자신의 무관으로서의 능력을 옳은 일에 사용하지 못하는 자다.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생을 걸어본 자가 있거든 나서거라. 그 자의 칼은 받겠다"는 그의 말에 서자로서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웠던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군도 '지리산 추설'은 이곳 저곳에서 부조리에 반대하여 세상과 등진사람들이 모여있다. 무리의 정신적 지주 땡추(이경영 분)와 의적단의 두목 대호 (이성민 분) 힘센 천보(마동석 분), 전략가 태기(조진웅 분), 명궁 마향(윤지혜 분) 등은 상사의 부당한 요구에 반대하거나 과거시험의 부정으로 매번 낙방하고, 신분제 틀에서 양반들에게 수탈을 당하는 등의 이유로 세상과 등지고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배우들이다. 하정우는 2대8 가르마에서 부터 스킨헤드까지 어떤 머리라도 소화 할 수 있는 배우임을 강동원은 김수현 못지 않게 한복이 잘어울리는 배우임을 증명했다. 거칠고 두꺼운 목탄으로 그린듯한 하정우의 터프함과 매우 예리한 샤프로 그린듯한 강동원의 섬세함의 대결은 매우 강렬하다. 또한 이경영, 이성민, 조진웅, 마동석 등 대한민국에서 내노라는 조연배우들의 연기는 이 영화의 빈곳을 가득 채워준다.


  감독은 137분 동안 지루할 틈이 없을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영상과 이야기로 영화를 이끌어 간다. 자칫 너무 진지해질 수도, 너무 가벼워 질 수도 있는 영화를 절묘하게 선을 지켜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야기의 긴장감이 커지는 곳마다 숨어있는 유머들은 민란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만들어준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상에 서부영화에서나 나오는 배경음악의 의외의 조합은 신선하고 재미있다. 또한 '액션 활극'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박진감 넘치는 액션은 그 자체만으로도 볼만하다.


  필자는 이 영화가 너무 노골적인 코메디도, 너무 진지한 역사극도 하닌 그 중간 애매한 곳에 위치하여 절묘하게 어우러진 것이 좋았는데 양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개봉 첫날에 55만, 셋째날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한 이 영화가 어떤 역사를 쓸 것인지. 매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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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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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민 후보가 사전투표일 하루 전인 24일 정의당 노회찬 후보에게 양보하고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틀 전 노회찬 후보의 24일 까지 단일화 되지 않으면 사퇴하고 기동민 후보를 돕겠다는 사퇴 협박(?)과 야권에 대한 지지자들의 실망이 크게 다가왔는지 이날 기자회견에서 후보직을 사퇴하겠으며 노회찬 후보와 함께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아무래도 자신으로 단일화 되면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수많은 정치 비평가들의 평가와 여론이 그가 결심하는데 큰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기동민 후보도 주변의 평도 좋고 지금까지 김근태 의원의 보좌관, 김대중 대통령 청와대 행정관, 박원순 서울시장 정무부시장 등 모두 존경받기에 부족함 없는 분들의 곁에서 많은 일들을 아주 잘 해왔다고 한다. 이번에 광주에서 출마 준비를 하던 중 이해하기 힘든 공천으로 이렇게 올라와서 20년 지기와 사이도 서먹해지고 후보직에서 사퇴까지 하게 되니 마음이 좋지 않겠다. 게다가 사퇴에 관한 결정마저 손 놓고 기동민 후보에게 모든 책임을 넘겨버린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에 대한 원망이 어찌 없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모두 자기가 지고 가겠다고 노회찬 후보를 당선시키는데 힘을 쏟겠다고 하는 그를 볼 때 고맙고 미안하다. 


  정말로 힘든 결단이었을 텐데 그런 힘든 결정을 혼자서 짊어지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혹자는 정치를 유권자들의 마음에 빚을 쌓아가는 일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게 국민들의 마음에 빚을 계속 쌓아서 결국 대통령까지 당선된것 아닌가. 기동민 후보의 힘겨운 결단을 유권자들이 기억해 줄 것이라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번 시련을 넘어서 더 큰 정치인이 되시길 바란다. 정말 고맙고, 다시 한번 미안하다.


p.s.

  사실 기동민 후보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사퇴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 외에 따로 적을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글자 적는 것은 몇일 전 기동민 후보가 사퇴해야한다는 뉘앙스의 글을 올린 것에 대한 책임감과 예의로 이 글을 포스팅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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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상의료본부는 의료민영화 입법 예고 마지막 날인 어제(22일)부터 현재까지 의료민영화 반대 100만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아직 서명하지 못하신 분들은 여기에서 할 수 있다. SNS를 통해 빠르게 전파되며 단 하루만인 23일 정오 기준으로 85만 명이 서명을 할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에도 박근혜 정부가 성난 민심을 모른체 넘어갈지, 지켜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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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아: 돈과 마음의 전쟁

저자
우석훈 지음
출판사
김영사 | 2012-11-2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경제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 정부를 장악한 모피아, 그들에 맞서...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인상깊은 구절

"큰 돈은 늘 작은 돈을 이길 것 같지만, 그게 매번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의장님의 돈, 대통령의 마음, 제가 보기에는 이 둘 중에 마음이 이깁니다."

요구르트를 손에 든 할머니가 대통령 앞에 섰다. 그녀는 요구르트와 함께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대통령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씨오, 대통령님. 돈이 없어서 대통령 관둔다고 딸이 그럽디다. 그러면 몹써요. 내 돈이라도 받으씨오." 대통령은 걸음을 멈추고 할머니가 건넨 돈을 받았다. 할머니는 그걸로 성에 안 찼는지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서 건넸다.

 


 

내용 요약

  한국은행에서 팀장을 하던 오지환은 모피아의 수장인 이현도 전 경제부총리의 추천으로 청와대에 경제 특보라는 자리를 신설하며 들어간다. 오지환이 청와대에 들어간 후 이현도의 청와대 공격이 시작된다. 이현도는 미국 펜타곤의 무기자금을 자본으로 한국 공기업 채권을 야금야금 사들여서 이를 인질 삼아 대통령의 경제권을 찬탈하는 경제쿠데타를 감행한다.


  이로 인해 경제분야에는 식물대통령이 된 대통령은 오지환 특보와 함께 경제권을 모피아로 부터 되찾아오는 방법을 모색한다. 오지환 특보는 이현도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케이맨 제도에 학익 홀딩스라는 회사와 100개의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고 스위스의 UBS, 중국의 인민은행, 프랑스의 BNP에서 100억을 빌려 방어 자금을 모은다. 이현도는 젊은 모피아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대한민국 경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맛게 요리하기 위해 마지막 결전을 치룬다. 


  오지환과 청와대 팀은 각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방어를 하였으나 공적자금과 연기금으로 원화를 공격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빌린 돈은 바닥이 나버린 상태에서 오지환은 국민들에게 하루만 돈을 빌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국민들이 돈을 모아줘서 그 돈으로 모피아의 공격을 막아낸다.



  모피아는 자신을 스스로 C급 경제학자라고 소개하는 우석훈 박사의 장편 소설이다. 경제학자가 쓴 소설이라니. 다큐멘터리와 영화로 제작하려던 시도가 있었지만 현실적 문제(돈)로 인해서 소설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지고 대선에서는 이긴 이후 여소야대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경제학자가 쓴 경제 소설이라 딱딱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달리 재밌고 사건들이 긴장감 넘치고 박진감 있게 전개되어 읽는데 지루하지 않았다. 몇몇 경제 관련 용어나 이야기가 나오지만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 나오는것은 아니어서 필자와 같이 경제에 문외한인 독자들이 읽기에도 부담이 없었다. 하지만 일부 설정들, 예를 들어 모피아 수장인 이현도가 청와대에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오지환을 소개시켜주는 것이나 펜타곤에서 일하는 1조원대 자산가인 김수진 변호사 등은 현실적 설정이라고 하기에는 부담스러웠으나 소설이니 그러려니 하자.


  이 소설의 결말은 조금 유치하다. 시민들의 마음을 모아서 거대 세력에 맞서는 모습은 흡사 드래곤볼의 원기옥을 연상케한다. 대통령이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걸어서 마포대교를 건너 국회로 간다. 이때 만난 할머니는 대통령에게 쓰라고 만원짜리 지폐 몇장과 금반지를 내어놓는다. 이런 소설에서만 있을 법한 내용을 읽다가 필자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씨바. 대한민국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국가 부도사태를 만들고 재벌과 부유층에서는 "이대로 영원히"를 외칠 때, 잘못한 거라고는 열심히 살아온거 밖에 없는 죄없는 서민들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장롱 속에 있던 금반지, 금목걸이 등을 국가에 내어 놓았다. 다시 그런 국가위기 사태가 온다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소설의 결말처럼 현실도 해피엔딩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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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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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동작을 보궐선거에 출마한 노회찬 정의당 후보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새정치 민주연합 기동민 후보에게 야권연대를 제안했다. 선거까지 열흘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최후통첩이다. 노회찬 후보는 "24일까지 응하지 않으면 노회찬이 사퇴하고 기동민 후보를 지지한다"라고 밝혔다. 이전까지 무조건 완주하겠다던 모습에서 한 발 물러난 모습이다. "선민후당(先民後黨), 국민을 위함이 먼저이고 당의 이해는 그다음일 수밖에 없다"라며 불리해보이는 조건을 수용했다. 이로써 어느 후보로든 야권단일화는 성사되었다. 

 

  새정치 민주연합 때문에 꼬인 야권 단일화 문제가 노회찬 후보의 결단으로 한 매듭 풀리는 모양새다. 꼬인 줄을 풀 때, 첫 매듭을 푸는 일이 가장 힘이 든다. 이제 남은 매듭은 새정치 민주연합의 몫으로 남았다. 결자해지 하길 바란다.


 

  사진 = 노회찬 후보 트위터

   

  이제 누가 야권 단일 후보가 되느냐는 문제 밖에 남지 않았다. 답은 아주 쉽고, 원론적인 물음에서 찾을 수 있다. '왜 야권 단일화를 해야하는가'는 질문이다. 당연히 선거에서 '부패한 여당을 이기기 위해서'일 것이다.  21일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회찬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나설경우 나경원 후보가 42.7%, 노회찬 후보 41.9%로 불과 0.8%포인트 차 오차범위 내의 접전을 벌였다. 야권 단일후보로 기동민 후보가 나설 경우 나경원 후보가 46.5%로 38.4%의 지지율을 얻은 기동민 후보에 크게 앞섰다.


  이제 기동민 후보와 새정치 민주연합의 결단만이 남았다. 이게 웬떡이냐 하고 버텼다간 선거 이후 패배의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한다. 물론 노회찬이 야권 단일후보가 된다고 100%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새정치 민주연합이 24일까지 버텨서 결국 기동민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나선다면 100% 패배를 장담한다. 그런 방식으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덤. 선민후당(先民後黨), 역시 노회찬.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새정치 민주연합에 국민이 바라는 모습이 이런거다. 새정치 민주연합 제발 정신 차리자. 민주·진보 세력의 맏형다운 모습을 보이길 바란다.


노회찬 "24일까지 단일화 안되면 후보직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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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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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밤부터 대한민국이 유병언 사망소식으로 떠들썩 하다. 300명이 넘는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로, 지난 몇달간 현상금 5억원이라는 역대급 몸 값으로 많은 국민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충격적이다. 게다가 시신을 수습한지도 40여일이 지났다고 하니 그의 뒤를 쫓던 수많은 경찰과 검찰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던 국민들은 허탈할 수밖에 없다.

유병언 부자 수배전단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충격적이어서일까? 그 소식을 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믿지 않고 그의 죽음에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한다. 일명 음모론. 첫째, 발견되었다는 시신이 정말 유병언이 맞나 하는 점이다.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경찰 내부에서도 변사자가 유병언이라는데 이견이 있다고 한다. 기사에서 한 경찰은 "수년간 사체를 봐왔던 경험으로 미뤄볼 때 이번 변사체는 절대로 유씨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길어봐야 20일이 되지 않는 기간내에 부패한 것으로 보기에는 부패의 정도가 심하고,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유병언의 유품 중에 막걸리 등 술이 나오고, 근처에 배회하던 노숙자 한명이 최근 보이지 않는다는 주변의 증언을 그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게다가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인데 유병언의 별장에서 50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유병언일 가능성은 생각지도 않고 일반 변사자로 처리했다가 40여일이나 지나서 변사자가 유병언인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발표를 하니 국민들의 의심이 짙어지는것도 당연하다.


  둘째, 발견된 변사자가 유병언이 맞다고 해도 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타살 여부를 확인중이나 타살 혐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경찰의 발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유병언이 잡히는 것을 두려워한 정관계 인사들이 사람을 시켜서 제거를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한다. 표창원 전 교수는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발견된 변사체가 유병언이 맞다는 가정하에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죠. 하지만 시신 발견 상태 위치 등을 봐서는 자살도 타살도 아니고... 유병언의 발목에 어떤 부상이 발생해서 멀리 가지 못했다. 그리고 혼자 남겨졌다. 그대로 자연적으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예측 했다. 


  안타깝게도 필자에게는, 그리고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에게는 이 두가지 의문의 답에 접근할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 사건의 진실 보다는 경찰을 포함한 정부의 발표를 믿지 못하는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 더 눈길이 간다.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정부 및 국가 기관의 발표를 믿지 못하고 일명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음모론이 널리 퍼지는 데는 여러가지 사회적인 요인이 작용한다. 첫째, 정보 수용자들의 정보 해석능력의 발달이다. 예전에는 TV나 신문에서 하는 말은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5.18이 북의 배후조정을 받은 폭동이라는 새빨간 거짓말에도 국민들 대다수가 넘어가버렸다. 그런데 국민 전체의 교육수준이 향상되면서 각자가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이 향상되어 TV나 신문에서 나오는 말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자극적인 정보에 노출된 사람들이 더 자극적인 정보를 받아들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등에서만 볼 수 있던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행각들이 2014년 대한민국에서는 실제로도 일어난다. 예전에는 자식이 부모를 죽였다는 뉴스를 듣고 설마 그런일이 있을수가 있나 했지만 영화 '공공의 적' 이후 실제로 그런 패륜 범죄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고 있다. 감각기에서 자극의 변화를 느끼기 위해서는 처음 자극에 대해 일정 비율 이상으로 자극을 받아야 된다는 베버의 법칙에 따라 자극적인 뉴스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뉴스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셋째, 정보통신의 발달이다. 정보통신이 발달하면서 위정자들이 정보를 독식하고 통제하는 것이 예전처럼 쉽지 않아졌다. 또한 트위터 등 SNS의 발달으로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가 빛의 속도 만큼 빨라졌고 그 파급효과는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끼리만 소통하려는 대한민국의 트위터 소비 행태를 봤을 때, 동굴안에서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리 듯 한가지 이야기가 나오면 그 이야기에 살이 붙여지고 거기에 옷도 입혀지는 과정을 통해 어마어마한 크기의 음모론이 탄생할 수도 있게 되는 거다.


  위의 조건들이 다 갖춰지더라도 마지막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음모론은 힘을 잃게 된다. 바로 깨어진 신뢰다. 대한민국 사회에 음모론이 넘쳐나고 그것을 국가 기관의 발표보다 더 신뢰하게 되는 바탕에는 대한민국 국민의 국가에 대한 신뢰가,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뢰가 깨어진 가장 큰 책임은 집권당인 새누리당과 정부 및 권력기관에 있다. 그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를 몰아내기위해 했던 수많은 거짓말들과 거짓 선동, 총풍, 북풍을 일으켜서 자신의 이용을 위해 사용한 것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깨버렸다. 민간인 사찰, 국정원 대선 불법 개입 등 국정을 농간 한 사건들에 대해서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면죄부를 준 사법기관들 때문에 민주주의의 최후에 보루 마져 무너진 상황에서 더 이상 국가에 대한 신뢰가 남아있을리 만무하다.


  경찰과 국가기관이 유병언 사건에 대해 발표한 내용이 진실이라한들 국민들이 이를 믿을지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건 역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서 사람들 저마다의 진실로 남겨질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해결하려면 세월호 참사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을 부여하는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서 유가족들과 국민들 앞에 한치도 숨기지 않고 수사과정을 투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한겨레] 변사체 유병언 맞나…경찰 내부서도 반론 ‘논란’

[CBS 김현정의 뉴스쇼] 표창원 "유병언 맞더라도 국민들이 믿을지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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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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