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VS 김영삼

저자
이동형 지음
출판사
왕의서재 | 2011-07-2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한국정치의 양김, 김영삼과 김대중의 관계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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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이 자리에서 노태우는 김대중에게 "김 총재도 이제 고생을 그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힘을 합해 당을 같이 합시다." 생각지도 않은 제안을 받은 김대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제안을 거절한다. "그것은 안됩니다. 나는 국민에게 야당을 하겠다고 선거에 나서서 당선된 사람입니다. 우리 당 65명의 의원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 여소야대를 만들어 준 것은 국민의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국민의 동의도 없이 내 마음대로 여당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나한테 합당을 제의하지 말고, 민주주의만 철저히 하십시오.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됩니다."


 여공들이 김영삼 총재와의 면담을 요청하자, 김영삼은 여공들이 항의 농성 중이던 강당으로 들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은 눈물 겹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경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내 이름 석 자와 신민당의 명예를 걸고 조속히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겠습니다. 경찰이 신민당사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합니다. 나와 서른 명의 신민당원들이 여러분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중도통합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요? 중도통합이란 게 정치학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칙이 섰을 때는 중도통합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이 다를 때 방향이 다를 때 중도통합은 없습니다. 선과 악 사이에 중도통합은 없습니다."

 

 

내용 요약

  김대중·김영삼이냐 김영삼·김대중이냐. 누구 이름을 먼저 하느냐까지도 싸웠던 대한민국 정치의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대 김영삼. 그 두사람의 삶은 닮은 듯 달랐다. 양김 모두 대한민국의 정치 중심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며 라이벌이자 동지로 같은 곳에 서서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있었으나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서부터 자신의 뜻을 관철 시키는 방법까지 판이하게 달랐다. 서로에 대한 평가를 묻는 기자에게 김대중은 "김영삼 씨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고 답하였다. 같은 질문에 김영삼은 "김대중 씨는 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고 화답했다고 하니 두 라이벌의 성격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김영삼은 다들 알다시피 멸치어장을 하는 지역유지인 아버지 김홍조 옹의 영향으로 부족함 없이 자랐다. 당시 거제도 사람 중에 경제적으로 김영삼의 부친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에 김대중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대중의 부친 김운식 옹이 농업 외에도 어업, 대금업, 양조장 등의 부업을 했던것으로 보아 살림살이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겠으나 김대중의 모친 장수금은 김운식의 정실이 아니었다. 이런 것을 고려할 때, 김대중과 김영삼의 유년시절은 꽤 많이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정치 입문도 매우 다르다. 김대중은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벌었다. 사업에 성공한 김대중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며 정치에 입문한다. 김대중의 건국준비위원회 이력은 그를 빨간색으로 칠하는 시작점이 된다. 김대중은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목포시에 출마했는데 낙선했고, 그 후로 민주당 소속으로 4대,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내리 낙선하는 길을 걸었다. 5대 보궐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이 되지만 3일 후 5.16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국회의원 선서조차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반면, 김영삼은 서울대 3학년 시절에 창랑 장택상의 선거운동원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졸업 후 장택상의 비서가 되고, 그해 장택상이 국무총리가 되자, 국무총리 비서관이 되었다. 그 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거제군에 출마해서 부친의 후광과 장인의 지원으로 손쉽게 당선된다. 당시 그의 나이 26세였다. 


  김대중은 낙선을 매우 많이 했다. 국회의원도 네번째 도전에 당선되었고, 대통령선거도 네번째 도전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통령병 환자'라고까지 비아냥댔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단 두번 낙선했다. 3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4대까지 12번의 국회의원 선거 중 전두환 집권 중 열린 11대, 12대를 뺀 10번의 선거에서 민주당 간판을 달고 부산 서구에 도전했던 4대 국회의원 선거를 뺀 9번 당선 되었다. 대통령선거 한번, 국회의원 선거 한번을 뺀 모든 선거에서 당선된 것이니 대통령 선거 포함 6번의 선거에서 한번도 지지 않은 박근혜 씨와 도지사 선거 포함 6번의 선거에서 한번도 지지 않고 아버지 지역구를 지킨 남경필 정도가 이에 맞설 수 있겠다.


  정치 입문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른 양김은 김영삼이 이승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으로 입당하면서 처음으로 같은 정당 소속이 됐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두 사람은 첫번째 대결을 펼쳤는데 당시 당수인 유진오가 김대중을 지명하면서 김대중의 승으로 끝이나는가 했으나 김영삼의 땡깡으로 김대중은 원내총무 인준을 받지 못하고 결국 김영삼이 승리를 가져간다.


  두번째 대결은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펼쳐졌다. 당시 당수 유진산이 김영삼을 지지하여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이 결정되는 듯했다. 경선 전날 밤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문을 정성스럽게 써내려갔다. 같은 시각 김대중은 이희호, 김상현을 대동하여 전당대회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여인숙을 돌아다니며 절하고 읍소하며 대의원들을 설득했다. 전당대회 결과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1등을 하였으나 과반수 득표에 단 20여 표가 모자라 2차 투표로 넘어갔다. 이는 이철승계의 반발로 무효표가 82표나 나왔기 때문이었다. 2차 투표 전 김대중은 이철승계의 수장 조연하와 만나 이철승이 총재가 되도록 지지하고, 이철승계에게 요직의 반을 주겠다는 약속을 김대중의 명함 뒤에 적고 사인하는 것으로 이철승계의 표를 가져왔다. 그 결과, 김대중이 2차 투표에서 김영삼을 이김으로 첫번째 대결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하지만 명함에 쓰여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79년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이철승이 아닌 김영삼의 손을 들어줬다. 훗날 김대중은 이에 대하여 "물론 김영삼은 면회 한 번 편지 한 통 없었고, 사람들이 라이벌이라고 하며 이철승 지지를 호소했지만, 박정희가 김영삼 당선되는 것을 싫어했고 이철승보다 김영삼이 총재가 되는 것이 민주화 투쟁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김영삼을 지지했다"며 이철승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자신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 준 이철승계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명함각서 사건 같은 것들이 김대중을 거짓말쟁이로 공격하는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는 하는데 자신을 향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사사로운 감정을 내려놓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 김대중 대통령 답다는 생각이 든다. 김대중은 왜 거짓말을 하냐는 김영삼의 물음에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약속을 못지킨 것 뿐이지'라고 했다고 한다.


  반면, 김영삼은 전당대회 결과에 승복하고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지 다니며 김대중 지지유세를 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최형우, 깅동영, 조윤형 같은 김영삼의 참모들의 반발에도 끝까지 김대중을 도왔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 관권선거, 돈 선거 등 온갖 부정을 일삼는 박정희에게 김대중은 불과 95만표 차로 졌다. 어마어마한 금품을 살포하고도 겨우 이긴 박정희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선거 이후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반독재 투쟁을 하는 김대중이 너무 미웠다. 그래서 벌어진 일이 바로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김대중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일본으로 가면 '납치 및 살해' 가능성이 있다는 많은 제보편지가 왔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일본행을 감행한다. 도쿄에서 반박정희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그랜드 팔레스 호텔 2212호에 투숙하고 있던 김대중은 회담을 마치고 2211호를 나서던 중 옆방 2210호 그리고 맞은편 2215호에서 쏟아져 나온 괴한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납치당한다. 그들은 김대중을 차에 싣고 고베에서 한시간 가량 떨어진 니시노미항으로 이동하여 준비되어 있던 요트에 김대중을 옮겨 싣고 한참을 달리던 중 용금호라고 하는 대형 선박에 다시 옮겨 싣는다. 김대중의 오른팔과 오른다리에는 30킬로그램 정도의 쇳덩어리를 매어졌고, 던지기만 하면 김대중은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때 김대중을 살려 데려오라는 무전이 날아오는데 이는 주한미국대사 하비브가 사건 직후 CIA를 이용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의 배후가 중정임을 파악하고 박정희를 찾아가 김대중을 죽이면 안된다고 경고하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납치사건으로 정치탄압을 받았다면 김영삼은 YH 무역사건으로 가택연금에 처해진다. YH 사건은 1979년 8월 9일 오전 YH무역이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한 데 항의하는 여공 200여명이 신민당 당사에 몰려와 농성을 벌이는데서 시작된다. 김영삼은 여공들이 항의 농성 중이던 강당으로 들어가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은 눈물 겹게 생각합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내 이름 석 자와 신민당의 명예를 걸고 조속히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겠습니다. 경찰이 신민당사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합니다. 나와 서른 명의 신민당원들이 여러분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2000명이 넘는 엄청난 경찰 병력을 신민당 당사로 투입하여 여공들을 끌어내기 시작한지 딱 23분 만에 상황은 종료됐다. 진압 과정 중 김경숙이라는 여공이 사망했고,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 등의 당원들도 경찰의 폭력에 심하게 부상을 당했고, 김영삼은 상도동 자택에 가택연금 되었다.


  박정희는 YH 사건이 터지자 김영삼의 구속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만 중정부장 김재규가 말린다. 그래서 나온 것이 '김영삼 총재 가처분신청'이다. 이에 김영삼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정권을 욕하고 박정희 하야를 외쳤다. '하야' 소리에 돌아버린 박정희는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시켜 버린다. 이 일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다시 타올랐고 10월 16일 부산대생의 데모로 시작된 사태는 일반시민들까지 합세하게 되고, 박정희가 부산에 계엄을 선포하자 마산 시역에서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바로 '부마항쟁'이다. 결국 부마항쟁을 둘러싼 김재규와 박정희, 차지철의 시각의 차이로 인해 10.26 사태가 벌어진다. 일련의 사건들의 흐름으로 보아 박정희가 죽은게 자신을 국회의원 제명했기 때문이라는 김영삼의 말이 터무니 없는 말은 아니다.


  박정희가 여대생 신재순을 옆에 끼고 심수봉의 노래를 들으며 시바스리갈을 쳐마시다 사망하자 모두 따뜻한 봄바람이 불 것이라 생각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다. 김영삼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상황을 안이하게 인식한데 반해 김대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고 서울의 봄이 온 건 아니다"라며 정치 기류를 곱게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의 자리에 마음을 뺏긴 양김 모두 다음 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양김은 서로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삼은 지난번에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고 주장했고, 김대중은 김영삼으로는 김종필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김대중을 사면복권하면 야당이 분열하게 될 것이라는 전두환의 책략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이 간절히 양김의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결국 두사람은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심재철의 바보 같은 서울역 회군 뒤, 전두환은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공수부대를 광주에 투입한다.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지면 학교 정문 앞에서 모인다는 사전 약속대로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앞으로 모였고, 전남대에 주둔하던 7공수여단은 학생들을 구타하기 시작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다. 5월 19일에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공수부대를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일반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한다. 이에 5월 20일 계엄군은 광주 전역의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선포한다.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M16 소총으로 난사했다. 자국민을 향한 총성은 무려 10분간이나 지속됐다. 5월 27일 새벽 5시 10분, 계엄군이 도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 작전을 완료했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김대중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인 5월 17일 학생들과 재야세력에게 북한의 사주를 받아 활동자금을 건네주고 학생데모를 부추겨 사회를 혼란케 하고 정권을 잡아 북한에 권력을 넘겨주려 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와 '반국가단체결성' 혐의로 연행했다. 이 사실을 끼워 맞추기 위해 당시 대학생이던 이해찬, 설훈, 정동년, 심재철 등을 체포, 고문하고, 허위자백을 강요한다. 구속자들은 모진 고문 끝에 범죄사실을 전부 시인했지만, 재판정에서는 고문에 의한 강요된 진술이었다고 번복했다. 그러나 심재철만은 모든 것을 시인했다. (서울역회군의 주역이자 지금 새누리당 의원으로 국회에서 누드사진 검색하다 걸리고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상하게하는 카톡보내서 논란을 일으킨 그 심재철이다.) 결국 김대중에게는 사형이 선고된다. 1981년 1월 말, 전두환은 레이건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가면서 김대중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해주고, 82년 2월에는 다시 20년 형으로 그리고 그해 연말 형집행정지로 석방해주면서 미국으로 쫓아낸다. 한편 김영삼은 김대중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체포된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때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1980년 8월 13일, 가택연금 중이던 김영삼은 신군부의 강압에 못 이겨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할 것을 선언한다.


  1987년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역사가 꿈틀거릴 조짐이 보이는 사건이 터졌다. 정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문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조한경과 강진규 두 사람만 물고문 했다고 축소 은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6월 9일 연세대 앞에서 데모 중이던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진이 '검열'의 공포 속에서도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렸다. 이 사진의 위력은 엄청났다. 바로 다음날인 6월 10일 6월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는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되었고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다. 결국 6월 항쟁의 결과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로 부터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6.29 선언을 이끌어 내었다.


  1987년 7월 9일 김대중은 드디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공민권이 박탈된 지 7년만에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 6.29 선언 열흘 뒤의 일이다. 양김을 분열시켜 노태우를 당선시키려는 전두환의 책략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양김은 다시 분열했다. 통일민주당 의원총회에서 "80년 서울의 봄 때처럼 분열하게 되면 역사의 죄인, 민족의 반역자가 된다"는 험악한 말도 나오기 시작했으나 단일화는 물 건너가고, 10월 28일 김대중은 분당을 선언,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나간다. 결국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양김은 동시 출마 했고, '보통사람'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된다. 


  이듬해 치뤄진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이 참패하여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가 이루어졌다. 민정당은 125석을 얻어 제1당의 지위는 확보했고, 평민당이 70석으로 제2당이자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어서 민주당이 59석, 공화당이 35석, 무소속이 9석, 한겨레민주당이 1석을 가지고 갔다. '여소야대' 정국에 노태우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5공청문회가 열리고, 전두환이 국회에 끌려나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노태우는 김대중에게 힘을 합쳐 당을 같이하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김대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국민에게 야당을 하겠다고 선거에 나서서 당선된 사람입니다. 우리 당 65명의 의원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 여소야대를 만들어 준 것은 국민의 뜻입니다. 나한테 합당을 제의하지 말고, 민주주의만 철저히 하십시오.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됩니다."


  김대중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노태우는 김영삼에게로 발길을 돌린다. 제안을 받은 김영삼은 장고에 들어간다. 이때 김영삼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대해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87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2위를 했지만 이어지는 총선에서 김대중의 평민당에 제1야당을 내어주자 불안했던 것이다. 게다가 최측근 인사인 서석재가 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에서 후보매수한 혐의로 구속되자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김영삼이 드디어 결심을 하고 3당 합당의 사실을 측근들에게 알리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하지만 김영삼의 생각은 확고했고, 김영삼을 버리느냐 신념과 국민을 버리느냐의 기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김영삼의 3당합당이 선언되는 자리에서 "이의있습니다.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이때 노무현과 같이 김영삼의 설득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찾아 가시밭길을 걸은 사람들이 이기택, 김정길, 박찬종, 장석화, 홍사덕, 이철이었다. 이들은 민자당으로의 합류를 거부하고 민주당에 남았고, 훗날 꼬마 민주당으로 불렸다.


  1992년 대통령 선거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마지막으로 맞붙은 대결이었다. 김대중이나 김영삼이나 누가 되든 군사정권은 막을 내리는 것이다. 국민들은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가 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케케묵은 빨갱이 수법으로 김대중의 얼굴에 붉은색을 칠하면서 첫 단추부터 깨끗한 선거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불공정한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정치에서 심판은 바로 '언론'이다. 그러나 92년 대선은 이 심판들이 일방적으로 김영삼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던 중 '초원복국집' 사건이 터졌다. 선거를 코앞에 둔 12월 11일 정부 기관장들이 부산의 ‘초원복집’이라는 음식점에 모여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지역 감정을 부추기자고 모의한 것이 도청에 의해 드러나 문제가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 '기춘대원군'  김기춘이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부산 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냐 하면 영도다리 빠져죽자.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의 발전에 긍정적"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김영삼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사퇴까지 고려해야 할 정도의 악재여야 하지만 김영삼에게 호재로 작용한다. 오히려 영남인들을 똘똘 뭉치게 만들어 김영삼의 표를 더욱 단단히 해주는 결과가 된 것이다. 조선일보는 대선 당일 사설을 통해 "이번 도청사건은 목적과 관계없이 부도덕한 것이며 앞으로 우리 사회의 관행과 시민생활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파급시킬 것"이라고 관권부정선거를 도청사건으로 물타기 했다. 김영삼은 자신의 연고지인 부산/경남에 전통적 여당의 텃밭인 대구/경북, 거기다가 김종필의 연고인 대전/충남/충북을 바탕으로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김대중은 김영삼의 당선이 확실해지던 12월 18일 자정,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다음날인 12월 19일 기자들을 모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대중은 1995년 치뤄진 제1회 지방선거에서의 민주당의 대승을 밑천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민주당에서는 대선후보로 나갈 수 없다고 판단,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민주당 인사들과 국민은 엄청나게 반발했지만 김대중의 결심은 꺾이지 않았고, 결국 95명의 민주당 의원 중 65명이 새정치국민회의로 옮겼다. 노무현은 이 때도 김대중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야권이 분열된 채로 치뤄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방선거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노무현은 15대 총선에 종로에서 출마해 이명박, 이종찬에 이은 3위로 낙선한다. 이때 노무현을 비롯해 낙선한 민주당 인사들이 강남에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차리고, '통추'를 조직했다. (야권 분열의 결과 이명박이 당선되지만 후에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박탈 당해 미국가서 에리카 누나랑 있을 때 치뤄진 재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다.) 여하튼, 이로 인해 김대중은 엄청난 욕을 먹었다.


  시간이 흘러 1997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통추는 이회창과 손을 잡을 것인지 김대중과 손을 잡을 것인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결국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갔다. 노무현은 김원기, 유인태, 원혜영과 함께 국민회의에 입당했고, 이철, 박계동, 이부영, 제정구는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97년 대선은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의 3자구도가 형성되었다.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에 밀려 2등을 했던 이인제가 이회창이 아들의 병역문제로 지지율이 하락하자 탈당하고 대선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12번의 당적 변경을 통해 현재 새누리당으로 돌아왔지만 '당적변경 한국 기록 보유자' 혹은 '피닉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로인해 보수표가 나뉘었고 이회창 아들의 병역 문제와 IMF, DJP연합, 김대중의 이미지 변신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도 겨우 39만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70대의 노 정객, 네 번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 또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 그러나 김대중은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대한민국이 부도 직전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vs김영삼은 이동형 작가가 인터넷에 연재한 글들을 다듬고 추가해서 출판한 그의 첫번째 저서이다. 이이제이의 태동과도 같은 책이다. 읽기 쉽고 중간중간 삽입된 유머와 야사들로 정치를 매우 재밌게 풀어냈다. 다만 곁가지로 자주 빠져 조금 산만하다는 점이 아쉽다.


  김대중과 김영삼. 양김이라고 불리는 두 사람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표본 그자체다. 다른말로 하자면 '양김의 전쟁이 곧 현대사'이다. 라이벌로서 많은 대결을 하고 서로 돕기도 했다. 하지만 87년 대선에서의 단일화 실패와 김영삼의 3당합당 이후 두 사람은 화합하지 못했다. 92년 대선에서 김영감이 승리하고 승자의 아량으로 김대중을 잡았다면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었겠으나 김영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95년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은 집권을 위해서 김영삼을 매몰차게 몰아붙였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로 상도동 쪽에서 끊임없이 차남 현철 씨의 사면을 부탁했지만, 거절했다. 김영삼의 앙금도 쌓여만 갔다. 두 사람의 앙금은 김대중이 병실에 입원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일 때, 김영삼이 "화해하자"고 말하고 나서야 풀어졌다.


  양김이 화합해서 정치를 할 수 있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본다. 87년에 서로를 인정하고 동전 던지기를 해서라도 단일화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다면 적어도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전재산 29만원으로 골프치고 다니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전두환을 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5.18의 발포책임자를 가려내고 온당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아쉬울 따름이다.


  그런 큰 역사적 가정이 아니라도, 김대중과 김영삼이 조금만 더 일찍, 최소한 서로 의사를 확인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할 때 서로를 인정하고 화해를 했더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생각해본다. 


p.s.

  이 리뷰는 김대중 대통령 서거 5주년을 맞아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행보를 다시 돌아보는 마음으로 적었다. 리뷰를 적으면서 대한민국 정치사의 아픔 구석구석에 김대중 대통령의 흔적이 남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는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정치보복이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김대중 대통령에게 빨간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실제로 빨갱이었다면 IMF로 국력도 바닥을 기던 그 때, 적화통일 되지 않았겠냐는 합리적인 논리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사라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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