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자고로 화려한 볼거리를, 배꼽 빠지는 웃음을, 아랫도리 뻐근한 노출신을, 눈물 쏙 빼는 신파를, 때론 가슴 웅장해지는 국뽕 한 스푼을.
어쨌든 내 시간을 죽여줘야 제맛.
138분의 불쾌한 경험. 단 한 장면도 웃을 수 없으며, 일말의 카타르시스 조차 허락하지 않는 결말.
영화가 재미 없으면 접근성이라도 높아야지. 마케팅을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얼마 안 되는 개봉관은 그마저도 아침 이른 시간이나 밤늦은 시간. 대중의 외면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관람한 영화관에서는 밤 9시 20분 회차가 유일했으며, 관람객은 나 포함 넷이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이 자연의 섭리 아니던가.
이런 영화가 입소문을 타고 있다고? 별점이 9.6점이라고? 사회를 변화시킬 영화라고?
호들갑 떨지 말라. 노오력 하지 않은 패배자들의 투정일 뿐. 당신의 피, 땀, 눈물은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경쟁에서 도태될지 모르지만, 그래서 뭐?
어차피 당신들과는 상관 없는 일 아닌가. 당신이 다음 소희가 될 일은 없을 테니.
그러니 제발 행동하려 하지 말라. 시간, 돈 들여 영화 보러 가지 말고, 주변에 추천하지 말고, 블로그에 리뷰하지 말고, 상영관을 더 확보해 달라고 항의하지 말라.
그저 가만히 있으라.
그럼, 이제 리뷰 시작.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될 예정이지만, 어차피 영화를 보지도 않을 당신들에게 경고 따윈.
전반부는 소희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실업계 고등학생 소희는 연습실에 혼자 남아 반복 연습할 정도로 춤을 좋아하는 소녀. 인터넷 방송을 하는 친구에게 시비를 거는 건장한 남성들에게 직설적으로 따져 물을 정도로 당찬 소녀다.
애견 미용학과에 재학중인 소희에게 현장실습의 기회(?)가 주어진다. 담임 선생이 대기업 일자리라며 온갖 생색을 낸 이 직장은 대기업 하청 콜센터. 표준계약서와 다른 부당한 이면계약서를 내밀며 사인하라고 할 때, 그런 부분들을 감독하고 알려줘야 했던 선생은 그 자리에 없었다. 학생들이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현장이 어떤지 확인하지 않고 업체 평가서에는 모두 좋은 점수를 준다.
소희가 배정된 팀은 해지 방어팀. 상품 해지를 요구하는 고객들에게 위약금, 추가 혜택 등을 제시하며 최대한 해지를 막는 업무를 하는 팀이다. 첫 업무 교육으로 사수에게 들려온 콜을 옆에서 듣게 된 소희가 마주한 것은 문자 그대로의 쌍욕. 모니터를 하다 뛰쳐 나온 이준호 팀장은 놀란 소희를 다독이는 것 말고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개인적으로 이준호 팀장의 캐릭터가 좋았던 건, 그가 슈퍼히어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 부장 같은 환타지 속 어른이 아닌 때로는 현실에 순응하고, 때로는 불합리한 일을 다그치고 강요하는 그저 그런 현실의 어른. 그럼에도 개선하려는 한 걸음을 걷는 어른. 그 역시 을의 위치에서 고객에게 항상 죄송했지만, 성희롱 하는 등 선 넘는 고객에게 욕을 하고 전화를 끊은 소희를 나무라지 않고, 심한 욕을 하는 고객에게 대신 언성을 높여 싸워주는. 인센티브 지급을 막거나 지연하는 회사를 대변하는 한편, 부당함을 회사에 투서하는.
그런 이준호 팀장이 어느 아침 자신의 차 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회사 내 불합리한 문제를 고발하는 유서 한 장과 함께. 이준호 팀장이 자살한 당일, 본사 직원들과 함께 등장한 이보람 팀장. 그녀는 어수선한 직원들에게 당장 콜을 받을 것을 종용한다. 다른 센터에 폐를 끼치는 행위라며. 이어 하나 둘 들리는
사랑합니다, 고객님
이준호 팀장의 유서는 그대로 묻힌다. 도박, 여자 문제 등 거짓 루머, 그리고 그 역시도 관리자로 불합리한 행위에 가담한 가해자라는 이유로. 회사는 직원들이 이준호 팀장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막고, 얄팍한 성과금을 내밀며 유서 내용에 대해 함구하겠다는 각서에 사인을 받는다. 소희는 유일하게 장례식장을 찾은 직원이었고, 각서에 사인한 마지막 사람이었다.
새로 부임한 이보람 팀장은 이준호 팀장과 여러모로 달랐다. 부당한 고객에게 맞서주지도, 대신 사과하지도 않는다. 메신저를 통해 압박을 할 뿐. 모든 것이 숫자로 평가되며 그 숫자가 진열되는 곳. 그 곳에서 이보람 팀장은 이준호 팀장보다 능숙하고, 능력 있는 관리자였다. 벽면에 붙은 숫자로 타 센터와 비교하고, 센터 내 동료들을 비교하며 성과를 올렸다.
소희는 이보람 팀장의 체제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식사 시간을 아끼고, 퇴근 시간을 늦췄다.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낸 고객의 해지 요청에도 이를 악물고 새로운 상품을 소개할 정도로 일에 능숙(?)해졌다. 이준호 팀장의 사망 후 바닥을 찍던 성과는 어느새 1등까지 올랐다. 동료들의 시샘과 팀장의 교묘한 이간질로 다툼이 있었지만, 인센티브라는 이름의 숫자가 모든 걸 견뎌내게 했다.
그런데 월급통장에 찍힌 숫자는 회사의 약속과 달랐다. 소희는 고객의 해지 요구에 무조건 응하는 방식으로 태업한다.
해지 안내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따져 묻는 소희에게 팀장은 한 두달 지연되어 지급될 거라 달래지만 소희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팀장은 소희의 가정형편을 들먹이는 등 모욕적인 언사를 했고, 욱한 마음에 소희는 주먹을 내질러 3일 무급휴가 징계를 받게 된다.
소희는 그 3일 동안 노력한다. 살아갈 방법을, 이유를 찾으려. 먼저 실습에서 복귀해 자퇴까지 한 친구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부모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관심 없는 선생에게. 현장실습을 종료하길 원한다고. 이해를 구하지만 누구에게서도 답을 얻지 못한 소희는, 현장실습이 아닌 삶을 종료하기로 결심한다.
후반부는 유진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만에 현장에 배치된 유진은 변사 사건 하나를 맡게 된다. 바로 저수지에 빠져 죽은 소희의 자살 사건이다. 자살로 사건을 종결하려던 유진은 소희가 일 했던 콜센터에서 얼마 전 이준호 팀장이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건의 실체에 다가간다. 그리고 묻는다. 소희의 죽음이 누구의 책임이냐고.
학생들을 값싼 노동력 정도로만 취급했던 업체에, 불법파견업체가 되어버린 학교에, 감독할 의무는 포기한 채 학생을 취업율이라는 숫자로 치환한 교육청에. 성과라는 숫자에 미쳐버린 사회에.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누구 하나 내 탓이라는 사람이 없어.
장학사는 유진에게 말한다. 정성평가를 할 수가 없다고. 정량평가를 통해 수치화 된 것만이 평가 대상이 된다고. 그래야 교육부에서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고. 이제 교육부를 쳐들어 갈거냐 조소한다.
소희의 남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온다. 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그는 욱하는 성질 때문에 징계를 받았고, 택배 일을 하고 있다. 곧 다시 현장실습 현장으로 복귀할 거라는 그에게 유진은 당부한다.
또 욱하면 누구한테라도 말해. 나한테라도 해. 괜찮아.
아래는 콜센터 노동자들의 현실을 심층적으로 들려준 팟캐스트 방송.
485a. 콜센터 건강노트(1):누가 칼들고 담배피우라고 협박했습니다 /김관욱
https://podbbang.page.link/bG8FPnHG4MhJNaeN9
485b. 콜센터 건강노트(2):붉은진드기 인생 /김관욱
https://podbbang.page.link/EMZ85bFa1ofujAQr7
485c. 콜센터 건강노트(3):Keep ya head up /김관욱
https://podbbang.page.link/vWqb3aeRCwUfp4Dx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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