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레기는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수준 낮은 어뷰징 기사, 짜깁기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들을 통칭한다. 더 나아가 기본적인 팩트 체크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취재기자들도 기레기라 불리기도 한다. 심지어 기사의 정확성과 상관없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기자를 조롱하는 언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나는 전직 기레기다. 어뷰징은 하지 않았다. 어뷰징을 할 만큼 큰 언론사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취재도 하지 않았다. 기레기로 일하던 6개월간 취재 건수는 단 세 . 그나마도 전화 통화로 팩트 체크한 것이 한 번, 기사는 쓰지 않고 취재 연습차 한 번, 선배 취재에 동행 한 것이 한 번.


  내가 담당한 일은 여러 언론사 기사들을 짜깁기해 새로워 보이는 위클리 기사를 생산하는 일, 연합뉴스를 긁어 문장을 조금 손봐 데일리 기사를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일이었다. 또 한가지, 선배 기사를 고치는 일도 종종했다. 선배는 기사를 쓰고 나면 내게 문장 확인을 부탁했다. 기본적인 문장력이 되지 않았던 선배는 부장에게 혼나는 것이 일상이었고, 내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사전 검열을 부탁한 것이다. 큰 틀에서 세 가지 다 교정 교열이라고 할 수 있으니,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한 셈이다.


  이 글은 기레기가 창궐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전직 기레기의 경험을 통해 기레기는 무엇을 먹고 사는지 확인하고, 기레기를 욕하는 우리가 먹이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려고 한다.




 

소형 보수신문의 먹거리


  20139, 대학교를 수료한 상태에서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으로부터 취업 자리를 소개받았다. 아마 제 앞가림하기 힘들어 보이는 제자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셨을 것이다. 학과 선배가 광고영업을 하고 있는 신문사라는 간단한 설명만 듣고 이력서를 넣었다. 그렇게 면접 날짜가 잡혔고, 사무실에 들어간 순간 몸이 굳었다. 어쩌면 건물 앞에 서 있는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상을 보고 발길을 돌렸어야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신 나는 사진을 찍어 조롱 섞인 문자를 친구에게 보냈던 것 같다.


  사무실에 쌓인 신문 1면 제목이 무려 좌빨 본색’. 내란음모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을 쓰고 수감되는 이석기 전의원의 일그러진 표정이 내 얼굴 위로 겹쳐졌는지도 모르겠다. 빨갱이 소굴이라고 오해받는 학과의 학생회장을 하며 학내 투쟁을 지휘하기도, 대규모 집회에 참가하기도 하며 교류하던 소위 운동권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소설 빨치산의 딸로 알려진 선생이 내게 이 회사를 소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 사회생활을 이런 곳에서 시작해도 되는가따위의 고민을 하는 통에 면접에선 한문으로 내 이름을 쓰라는 간단한 문제에도 답하지 못했다.


  면접을 마치고 나온 내게 선배는 이념같은 건 신경 쓰지 말자고 했다. 선생은 회사에 다니며 소설 쓸 생각이나 하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기레기가 됐다.


  출근을 하면 연합뉴스에서 기사를 받아(후불 계약을 했으나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으니 갈취해가 더 적확한 표현) 개작한 후 회사 홈페이지에 올렸다. 어뷰징을 위한 복붙은 하지 않았다. 어뷰징도 어느 정도 규모(포털에 등록된 업체)는 되야 한다.


  기자들은 기사 클릭 수를 확인 할 수 있다. 이 회사의 기사 클릭 건수는 두 자리를 넘었던 기억이 잘 없다. 그나마도 기사를 올리고 확인할 때마다 카운트가 되고, 발행인이 확인하고, 회사에서 내세우는 기사의 경우에는 기자가 F5 버튼을 눌러 세자리 수를 만드는 정도다. 외부인들은 아들이 살아 있는지 궁금한 내 아버지 외엔 아무도 안 들어온다고 보는게 맞을 거다. 기본적으로 인건비, 사무실 운영비, 인쇄비를 벌어야 신문사를 운영할 수 있다. 이 신문의 판매가는 1000, 매주 2만부 정도를 찍어냈지만 시중에서 이 신문을 사봤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온라인 광고 수입조차 올리지 않는 이 신문사는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1. 폐지 값

  반은 농담이다. 아니, 반만 농담이다. 지난 신문들이 창고에 가득 있었다. 찍어낸 순간부터 폐지 이외의 효용가치가 없는 이 신문이 문자 그대로 폐지가 되어 쌓여있는 것이다. 회사가 문 닫기 전, 창고에서 이 폐지들을 꺼내 차에 싣는다고 땀 흘려 일했다. 그 날이 내가 이 회사에서 한 일 중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고, 회사가 유일하게 정직하게 돈을 번 날이었다. 그날 번 돈으로 우린 퇴직 회식을 했다.

 

2. 지면 광고

  거대 언론사들이 하는 짓거리를 어설프게 따라한다. 기업을 까는 기사, 빠는 기사, 기사로 위장한 광고까지. 하지만 취재력이 메이저 언론사에 나온 뉴스를 베끼는 수준이기에, 광고 수입이라는 게 떼쓰는 아이 사탕 주는 정도일 수밖에 없다.


  기억나는 일이 있다. 한 번은 경기도 모 대학교 총장의 추문에 대해 기사가 나간 적이 있다. 한 여성이 젊은 시절 총장에게 성적 학대와 폭행을 당했다며 주장했고, 1인 시위를 하는 현장에 취재를 나가는 선배를 따라 나갔다. 나와는 다르게 선배들은 매주 취재를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선배의 취재란 것도 별다를 것이 없었다. 여성이 온라인에서 주장한 것을 육성으로 들었고, 크로스 체크 같은 건 없었다.


  기사가 나가고 대학교 측에서 연락이 왔다. 기사를 내려주는 조건으로 광고를 고려해보겠다는 전화였나 보다. 국장의 지시에 따라 기사를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장이 누가 기사 내렸냐며 소리를 질렀다.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인데 좀 달리 보였다. “광고비 입금도 되기 전에 기사 내려버리면 뭐가 되냐는 말을 듣기 전까지 잠시. 무튼 선배는 특종비 명목으로 소정의 상금을 받았고, 회사는 광고를 받지 못했다.

 

3. 연맹의 후원

  내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사실상 유일한 이유는 연맹이란 단체 덕분이었다. 관변단체 중 하나인 연맹은 회사 설립에 제법 큰 돈을 출자했다. 사무실 역시 연맹에서 빌렸는데, 임대료를 냈는지는 모르겠다. 2만부의 폐지는 전국의 연맹 지부로 뿌려졌다. 어떤 사람들이 몇 부나 읽었는지, 폐지를 팔아 회식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안타까운 점은 이 연맹이란 단체에 국가보조금이란 이름으로 막대한 세금이 지원된다는 점이다. 횡령 등의 비리 문제가 끊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회사가 반쯤 문을 닫고 전 직원이 퇴직을 하게 된 것도 연맹의 지원이 중단 되면서부터였는데, 길고 긴 무직자 생활이 시작됐지만 자연보호의 측면에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매주 발행되는 폐지란 참. 현재 이 회사는 이름을 바꾸고 2~3개월에 한 번 신문을 발행한다. 연맹에 필요한 이슈가 터지는 경우에 발행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소형 진보언론의 먹거리


  퇴직을 하니 홀가분했다. 당시 대표가 새로운 신문을 창간한다며 일자리를 제안해왔다. 수개월 옆에서 봐온 입장에서 전혀 공정하지 않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의 신문사였다. 한 번 선택은 실수라고 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선택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망하지 않은 것을 보니 제안을 받았으면 아마 나는 계속 기레기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실업수당을 받으며 연명할 수 있었기에 거절했다. 일자리가 그리 없을 줄을, 실업수당이 아닌 부모님 등골을 빼먹으며 연명할 줄을 그때는 몰랐다.


  201312월 조그마한 신문사의 면접을 봤다. 진보적 논조의 소규모 언론사였다. 멋들어진 홈페이지는 아니었지만 정치·사회보다 노동·인권, 통일, 참살이 등의 카테고리가 전면에 배치된 점이 인상적이었다. 사무실은 홈페이지보다 더 초라했다. 석유 곤로 위에 놓은 양은 냄비에서 물이 끓고 있었다. 석유 곤로 때문인지 벽지는 누렇게 변색 되었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면접을 봤던 국장의 인상이 좋았다. 언론인으로의 곤조가 말투와 얼굴에 배어있었다. 사무실에 국장 외에 편집기자 한 명 밖에 없었는데, 다른 기자들은 어디 있냐는 질문에 국장은 기자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은 건 무려 4개월이 지난 후였다. 조금 이상했지만 기뻤다. 언론사가 아닌 회사에 더 나은 조건으로 입사가 거의 결정된 상황이었지만, 이 조그마한 언론사를 선택한 것은 아마 과잉수정 오류였을 것이다. 기레기였던 지난날에 대한 참회의 마음도 조금 있었다. 1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기레기가 아니었다. 매주 1천부 정도의 신문을 발행했지만 무가지였다. 그렇다면 이 회사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1. 후원

  하루는 국장이 취재 나가기 전에 점심이나 먹고 나가라고 했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점심시간 전에 기사 마감을 하고 취재를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식대로 10만원을 받았는데, 한 달치일 거라고 당시엔 생각도 못했다. 취재를 나갈 때면 국장은 밥은 꼭 맛있는 걸 사먹어야 한다. 건강해야 일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한 달에 취재나가는 24일 점심 저녁을 괜찮은 음식을 사먹기에 10만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반주를 한잔 하고 알딸딸해진 국장은 내가 후원 계좌를 열면 1억 모으는 건 일도 아니다라고 허세 가득한 말을 했다. “후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런데 손 벌리기 싫어서 안한다따위의 이야기를 늘어놨다. 하지만 나는 후원계좌를 여는 일을 보지 못하고 퇴사했다.

 

2. 광고

  광고 가격까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광고 수입을 통해 내 월급이 입금 된 것은 확실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외에 수입이 떠오르지 않는다. 10년간 직원들 월급 밀린 적이 없다니 분명 적자는 아닐 텐데. 그렇다고 광고지면이 많은 것도 아니라 아직도 신기할 따름이다.

 

3. (혹은 보지 못한 선후배들)

  첫 날, 정장에 구두를 신고 출근했다. (그 전에는 취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보니 구두가 불편한 줄 몰랐다. 발이 퉁퉁 부어 다음날부터는 등산화만 신고 다녔다.) 탐방 기사를 써오란 지시를 받고 취재를 나갔다. 지시 사항은 딱 한 가지, ‘이화동 벽화마을’. 사진기자는커녕 사진기, 노트북 하나 지급되는 것이 없어 형에게 빌린 DSLR15인치 노트북을 들고 취재를 다녔다. 회사에 있는 데스크탑은 윈도우 xp가 버거워 보였고, 요즘은 찾기도 힘든 CRT 모니터가 연결돼 있었다. 불편해도 개인물품으로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취재를 하고 돌아와서 기사를 작성하는데 이상하다. 편집기자와 국장 외에 선배 기자들이 없다. 알고 보니 우리 회사에 소속된 취재기자는 나 혼자였다. 이후 나는 필명을 하나 만들었다. 너무 많은 기사가 내 이름으로 올라가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내 기사 외에 나머지는 국장의 인맥으로 받는 외고 기사들이었다. (그들도 필명으로 활동했다.) 퇴직 후에 내게도 외고를 쓰라고 연락한 것을 보면 아마 퇴직한 (일면식 없는) 선배들이 용돈 벌이를 하는 모양이다.


  일 자체에는 자부심을 느꼈다. 한달 동안 100여개의 기사를 작성했는데, 단 하나도 남의 글을 베껴 쓰지 않았다. 거의 매일 광화문에 나가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참여연대·환경운동 연합의 활동가를 만나고, 민노총·전교조 소속 조합원을 인터뷰 하며 메이저 언론에서 깊이 다루지 않는 이야기를 기사로 써냈다. 매주 수요집회에 나갔고, 동자동 쪽방촌을 찾아 소외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회의를 느낀 건 4.24 총파업 결의대회를 취재하면서였다. 최저임금 1만원 시대의 구호가 내게 와닿지 않았다. 오전 8시 반에 출근해서 전날 취재한 메인기사(A4 4~6장 분량)를 마감하고 집회 현장 취재하러 출발, 스케치 기사 (1) 마감, 이후엔 또 다음날 메인 기사 인터뷰. 8시 퇴근은 기본에 일정이 맞지 않은 경우 12시 퇴근. 광화문 스케치 기사 (1) 마감 하고 인터뷰 녹취록 작성. 그나마도 주말 중 하루는 취재, 하루는 기사 마감.


  식비로 10만원을 지급 받았을 뿐 교통비, 전화비 등 기본적인 취재비용도 모두 120만원이라는 알량한 월급에 포함돼 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 속도가 늦다며 “1장짜리 기사는 5~10분이면 써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국장 입장에서는 내 탓이겠지만, 계산을 해보니 최저임금이 되지 않았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정신승리를 하려는데 내 자신이 역겹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들의 노동은 가치가 없어서 돈이라도 받아야 하는 건가?


  고민을 하던 중 월급을 받았다. 현금으로. 그래도 무려 1년을 놀고 나서 번 돈이라 그런지 노동 의욕이 샘솟는 듯 했다. 우편함에 꽂힌 익숙한 봉투 하나를 보기 전까지. 건강보험 지로용지였다. 찾아보니 수습 혹은 인턴의 경우에도 4대 보험 가입은 법적 의무였다. 돌아보니 정신없이 취재하고 기사 작성을 하던 나는 정작 중요한 근로 계약서 한 장 작성한 적이 없었다. 다음날 출근해 지급받았던 사무실 열쇠를 책상에 놓고 나왔다.


  회사는 양심 있는 언론인 척 하며 기자의 노동력을 먹고 있었다. 난 기레기가 되지 않는 대신 먹이가 된 것이다. 어쩌면 면접 이후 출근까지 4개월 동안 누군가 먹이 역할을 하다 그만뒀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만둔 이후 누군가도 그러겠지. 요즘처럼 대졸 무직자들이 넘치는 세상은 커다란 뷔페일 테니. 수구 언론사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계속 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3개월으로 정했던 수습기간을 줄여준다는 언질을 받기도 했으니. 홈페이지 전면에 내세운 노동·인권이라는 카테고리를 보며 든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전문지는 무엇을 먹고 사나?


  전문지에서 근무한 경험은 없다. 면접을 한 번 봤을 뿐이다. 이달 초에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구직사이트에 올려놓은 이력서를 보고 연락했다며, 면접을 보자고 했다. 전문지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락 온 전문지가 다루는 영역은 신문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뚱맞은 곳이라 고사할 마음이었다. 하지만 오랜 무직 생활에 지쳐 조건이라도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업계 1위라는 대표의 말에 신빙성이 느껴질 정도로 신문은 광고로 가득했다. 24면의 주간 신문의 12면이 광고였으니. 이건 광고지야 신문이야 싶었다. 대표의 첫 질문은 광고 영업 할 생각은 없어요?”였다. 기억나는 또 하나의 질문은 희망연봉을 조금 낮추면 안되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경력 5년은 돼야 맞춰 줄 수 있을 것 같은데였다. 참고로 희망연봉은 2200이었다. 네고는 불가하단 말에 대표는 광고 영업 할 생각은 없어요?” 또 물었다. 아마 광고 영업을 하면 그 값을 맞춰 줄 수 있는가 싶다. 역시 신문에서 기사보다 광고가 중요한 세상이다.

 

기레기는 왜 양산되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아무도 기사를 사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사를 생산하는 사람들이다. 기사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진보 보수를 가르지 않고 누구도 기사를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 기업을 까거나 빠는 기사를 쓰고 그 신문을 들고 기업들을 돌아다니며 광고 영업을 한다. 한 번의 클릭을 더 유도하기 위해 자극적인 기사를 쓴다.


  언론사들이 어뷰징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적은 비용을 들여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양질의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기레기를 욕하는 그대들에게 묻고 싶다. 양질의 기사를 소비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돈을 소비하느냐고. 자전거를 받기 위해, 현금 몇 만원을 받기 위해 조중동을 소비하던 천박함이, 인터넷의 발달 이후로 기사는 공짜라는 인식으로 치환되어 기사보다 광고가 우선인 기레기들을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 더 나은 언론 환경을 원한다면 기사를 사주길, 후원해주길 당부한다.


  두 번째로 우리 의식 수준을 돌이켜보자. 유명 연예인 비키니, . 이런 제목을 보면 나도 모르게 클릭하고 있진 않은가? 블로그를 운영하다 보면 유입 로그를 확인하게 된다. 424 총파업과 관련해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인터뷰 글을 올린적이 있다. 민중총궐기 이후로 한상균 위원장 관련해 유입 수가 증가했다. 그런데 들어오는 유입 키워드를 보면 한상균 월급’, ‘한상균 자식따위가 많다. 엄마부대봉사단 주옥순 대표의 블로그 탐방기에는 주옥순 자식따위의 키워드로 유입된다. 왜 민주노총이 파업을 했는지, 주옥순 씨의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보다 신상 털이식의 개인 정보에 관심이 많은 듯 보인다. 국민은 그들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진다고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수준이 올라가지 않으면 언론의 수준도 올라가지 않는다.


  기레기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레기라고 욕하고 조롱하고 넘어가는 것으로는 기레기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쓰레기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사와 기레기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자. 이에 앞서 어뷰징 기사를 클릭하지 말자. 먹이가 사라지면 기레기는 자멸할 것이다. 더 나아가 좋은 언론을, 기자를 키우길 원한다면 열심히 쓴 기사를 소비하는데 드는 돈을 아까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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