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도 1년이 지났다. 추모하기도 부족한 시간, 유가족들은 거리로 나왔다. 풍찬노숙을 하고, 도보행진을 하고, 삭발을 했다. 단원고 학생 희생자 김시연양의 어머니 윤경희씨를 만났다. 삭발한 머리가 까슬까슬하게 자라있었다. 시연 엄마는 우리는 자식 잃은 부모들이다. 그런데 내 자식이 왜 죽었는지, 춥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왜 그렇게 죽어가야 했는지 아직도 밝혀진 것이 없다며 먼저 입을 뗐다.


시연이 엄마 윤경희 씨


쇼하고 있네

  참사가 나던 날, 엄마는 소식을 듣고 바로 팽목항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세 시 쯤이었다. 먼저 진도체육관에 도착해있던 가족들이 팽목항은 접근이 금지돼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팽목항에 가보니 통제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180명의 학생이 구조돼서 오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만 흘러가고, 아이들은 오지 않았다.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경찰들에게 물어도, 119 구조대에 물어도 확실한 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해경은 구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며 세월호 관계자들과 해경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밀기에 급급했다. 사고 현장에 있었던 분이 배는 이미 완전히 침몰해서 꼬리만 나와 있다고 했다. 팽목항에서 진행되는 구조에 대해서 쇼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사비를 털어 민간어선을 빌렸다. 남편과 사촌오빠(사촌오빠네 딸 예지양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됐다), 몇몇 단원고 학생 부모들이 함께 현장으로 가기로 했다. 기자 한 명이 동승하겠다고 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겠다고 약속했다. 헬기 1, 10여척이 세월호 주변에 있었다. 구조 활동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도 기름이 유출되면 배 안의 아이들이 위험할 수 있다며 기름 방제 작업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TV에서는 수백 척의 배와 헬기가 총동원돼 활발하게 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고 떠들고 있었다. 동승했던 기자는 뭍으로 나온 뒤 사라졌다.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팽목항에 나와 있던 언론에 현장 상황을 알렸다. 하지만 구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진실은 다 편집하고 유가족들이 울고 소리치는 모습만 보도했다. 이튿날부터는 한국 언론과는 인터뷰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유가족들은 카메라를 부순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안전사회 건설은 시연이가 준 숙제

  시연이는 6일만에 나왔다.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복구한 휴대폰에서 동영상 3개와 사진들 세월호 참사에 관한 기사를 캡쳐한 것들이 나왔다. 기울어지는 세월호 안의 광경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끈 없고, 지퍼 없는 다 떨어진 구명조끼를 입은 아이들의 모습이 공개됐다. 엄마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는 안전사회를 만드는 것이 시연이가 남겨준 숙제라고 생각했다.


  “그 숙제를 푸는 일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고, 시연이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일이다. 진상규명을 하고, 세월호를 인양하고, 안전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내놓을 수 있다.”


  진상규명을 해야,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진단을 해야 고칠 수 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아직도 왜 침몰했는지, 왜 구조에 실패했는지, 밝혀진 것이 없다. 수많은 의문만을 남겼다. 반쪽짜리 특별법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완벽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는 진상이 규명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지난 3월말, 조사를 받아야 할 해수부와 해경의 공무원들이 특별조사위원회에 참여하게 하는 특별법 시행령안이 나왔다. 언제든 만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은 만나주지 않았다. 진상 규명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없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다.


  아직 9명의 실종자가 돌아오지 못했다. 시연이 엄마는 모든 희생자들이 유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난해 11, 정부는 선체인양을 해야만 시신을 수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양도 수색 방법의 하나라고 실종자 가족들을 설득했다. 유품을 건져내면, 시궁창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속에 실종자 가족들의 아이가, 가족이 아직도 있다.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그 곳에 가족을 더 두고 싶은 가족이 있겠나. 하지만 끝까지 찾아내겠다는 약속을 믿고 실종자 가족들은 더 이상의 수색을 중단했다.


  시민들 중엔 박대통령이 해준다고 했다. 시끄럽게 하지마라고 호통을 치고 가시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 선체 인양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지겹다고 한다. 몰라서 그런거다. 아무 것도 밝혀진 것 없고, 인양은 결정되지 않았다. 세월호는 아직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다.


  정부여당은 슬그머니 돈 이야기를 꺼냈다. 인양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보상금 액수를 이야기 하면서 가족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를 돈 문제 때문인 것처럼 호도했다. 그래도 인양에 대해 찬성하는 국민의 여론이 높았다. 그제서야 기술 검토중이라고 발표했다. 사고가 일어난 지 1년이고, 실종자 수색작업을 중단한 것이 5개월 전 일이다. 아직 기술 검토하고 있다는 발표를 엄마는 믿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어서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도, 세월호 선체 인양도, 세월호 이후의 안전사회 건설도 다 물거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거리로 나왔다. 풍찬노숙을 해도 언론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삭발을 결심했다. 안산 분향소에서 광화문까지 12일 도보행진을 했다. 1주기 추모제에 대통령은 오지 않았다. 짧은 담화만 남기고 남미 순방길에 올랐다. 경찰은 차벽을 치고 유가족을 고립시켰다. 유가족과 시민들을 향해 캡사이신을 뿌려댔다.


  엄마는 그래도 지칠 수가 없다. 또 다른 유가족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지칠 수가 없다. “유가족들을 거리로 내모는 국가가 어디 있나. 우리처럼 아픈 유가족들이 우리 사회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으면, 이런 고통은 우리만으로 끝났으면하는 바람이다.

 

시연이는 엄마의 모든 첫 경험

  시연이를 낳았을 때 엄마는 불과 스물 한 살이었다. 엄마에겐 첫 딸이었고, 할머니에겐 첫 손녀였다. 그래서 시연이는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컸다. 엄마는 시연이 덕분에 많은 첫 경험을 했다. 시연이가 처음 기던 날,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준 날, 삐뚤빼뚤 서툰 글씨의 편지를 받던 날. 엄마는 그 모든 경험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시연이는 고등학교 2학년 나이에도 집에 들어오면 아기 같은 면이 있었다. 한창 친구들과 놀다 녹초가 된 몸으로 들어오면 팔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어리광을 부렸다. 아침이면 엄마에게 머리를 맡겼다. 엄마는 매일 시연이 머리를 말리고, 빗질하고 고데기로 말아줬다. 돌아보면 귀찮아서 엄마에게 맡겼다기보다는 엄마의 손길을 좋아했던 것 같다.


  집에서는 아기 같던 시연이는 밖에서는 리더십 있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반장을 도맡아했다. 단원고에 들어가고 난 뒤에는 연극부에 들어갔다. 2학년 때는 연극부 부장을 맡기도 했다. 후배들 오디션을 보고 난 후 설레던 시연이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시연이는 원래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어렸을 때는 아빠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하더니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기타를 배웠다. 1학년 때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음향감독을 맡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미디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학원에도 다니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착실히 준비했다.


  수학여행 가기 전 날까지도 음악 편집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출 곡이었다. 다들 수학여행 가서 입을 옷, 먹을 간식을 챙기던 그 시간까지도 음악 편집에 몰두해있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지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열심히 편집해서 갔던 음악을 틀어보지도 못하고 사고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시계, 4시 16분에 멈춰있다

 

시연이가 남겨준 선물

  지난해 926, 돌아온 시연이의 생일. 엄마는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시연이의 이름으로 음반이 출시된 것. 이 앨범에 실린 ! 이 돼지야는 시연이가 작사·작곡한 곡이다. 서촌갤러리 장영승 대표가 생전에 스마트폰으로 녹화한 영상을 보고 음반을 기획하게 됐다. 시연이의 목소리를 분리하고 새롭게 편곡된 반주를 입히는 작업은 작곡가 윤일상 씨가 맡았다.


  수익금 같은 것엔 일절 욕심이 나지 않았다. 수익금은 전액 세월호 참사 실종자 가족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엄마는 그저 시연이의 꿈이 이뤄진 것, 그리고 언제든 시연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했다.


  큰 선물을 받았지만 엄마는 시연이의 생일을 조용하게 보냈다. 시연이가 좋아하는 호박죽, 미역국 등으로 간소한 생일상을 차렸다. 납골당에 찾아갔다. 엄마는 납골당에 가면 꼭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차가운 유골함이라도 만지고 싶다. 유골함을 껴안고 이야기를 나누고, 뽀뽀도 한다. 음반으로 나온 노래를 들려주고 또 들려줬다.


  시연이는 엄마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고 갔다. 사진도, 동영상도 많이 남겼다. 시연이의 방에는 온통 낙서 투성이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시연이네 방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 때부터 방 구석 구석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아하기도 했는데, 낙서 내용을 보니 정말 재미있었다. 벽에도, 책상에도 아이들의 재기발랄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엄마는 그런 흔적들들 곳곳에 남겨준 시연이가 고맙다.

 

남겨진 가족들의 지난 1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되면 엄마는 너무 아프다. 여지없이 밝아오는 아침 햇살이 야속하다. 안방 문을 열면 바로 맞은편에 시연이의 방이 보인다. 아직도 침대에서 자고 있을 것 같은데, 학교 갈 준비하자고 깨워야 할 것 같은데, 시연이의 침대는 비어있다.


  단원고가 집에서 멀고, 교통편이 좋지 않아 엄마는 항상 시연이의 등굣길을 함께 했다. 학교까지 운전해주는 그 길이 엄마와 시연이의 드라이브였다. 시연이는 조수석에 앉아 재잘재잘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고가 난 뒤, 등교 시간이 되면 엄마는 바보가 됐다. 열 달 동안 그렇게 멍하게 있었다.


  동생 이연이는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이 아팠다. 엄마 아빠가 출근하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던 언니가 그렇게 갔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팠을 것이다. 엄마도 너무 아파 이연이를 잘 보살피지 못했다. 친척들이 정성으로 보살폈지만,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스트레스로 인해 장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 장기간 통원치료를 하고, 입원을 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아프다.


  이연이는 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언니가 들어가고 싶었던 학교였다. 이연이가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 엄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침이면 이연이를 깨우고, 젖은 머리를 말려준다. 빗질을 하다 또 시연이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이연이가 속상할까봐,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한다. 시연이 곁으로 가고 싶단 생각도 많이 했다. 이연이가 없었더라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울음을 참고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몇 번이고 세수를 한다.

 

사고 이전 나는 이기적이었다

  엄마는 세월호 광장에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용기를 얻는다. 처음에 유가족들 외에 다른 사람과 잠깐 대화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불쌍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누군가 수군대는 것만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서명 용지를 내미는 것도 낯설었다. 누가 욕이라도 하고 지나가면 서럽고 비참했다.


  사고 나기 전에 엄마는 이기적으로 살았다. 우리 가족만 행복하게, 안전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고가 난 이후 서로 돕는 삶에 대해, 함께 사는 사회에 대해 배우고 있다. 이 세상에 고마운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희생자 가족들보다 더 열심히 서명 받는 자원봉사자들, 간담회에 와서 귀기울여주는 시민들을 보며 지난날의 이기적인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 엄마는 세월호 문제가 해결이 된 후에는 받은 만큼 사랑을, 관심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세월호 참사가 난 지도 1년이 지났다. 1년이란 것, 지난해 416일에 시간이 멈춘 유가족들에게는 숫자에 불과하다. 엄마는 하루 빨리 세월호 선체를 인양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규명되길 바란다. 그런 이후에라야 시연이를 추모하며 마음껏 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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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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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 앞바다. 지난해 416, 국민 전체를 충격 속에 빠뜨린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난 그 바다 속에는 아직 사람이 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홉 분의 실종자들. 그들은 오늘도 외치고 있다. ‘세월호에 아직 사람이 있다’, ‘유가족이 되고 싶다. 광화문 광장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단원고 2학년 2반 허다윤 양의 아버지 허흥환 씨를 만났다.


다윤이 아빠 허흥환 씨



"유가족이 되고 싶다"

  다윤이 아빠는 유가족이 되고 싶다. 세상 천지에 유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냐만,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은 그렇다. 다만 뼛조각 하나라도 찾았으면. 다윤이가 어둡고 추운 물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하루 빨리 찾아서 밝고 좋은 곳에 보내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아빠로서 최소한의 도리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이 막막하다.


  “아흔이 다 된 내 어머니는 오십 넘은 아들과 통화를 하면 아직도 밥 먹었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묻는다. 그런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는 자식을 버리지 못한다. 속을 썩이면 혼을 낼 수야 있지만, 그 순간 뿐이다. 부모는 자신이 죽어야만 비로소 자식의 손을 놓을 수 있다. 하루빨리 다윤이를 찾아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싶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친구들이 다윤이를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음주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도 1. 하지만 아빠에게 그 시간은 의미가 없다. 시간은 흘러간다는데. 사계절이 한 차례 흘렀다는데. 낙엽이 지고, 눈 내리는 겨울 지나 또 봄이라는데. 아빠의 시계는 아직 지난해 416일에 머물러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팽목항으로 달려갔던 때와 현재가 변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

오히려 현재가 더 참담하다. 당시에는 진도 체육관에서 기다리다 구조작업이 진행되면 바지선으로 바로 달려갔다. 다윤이의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희망도 사라졌다. 지난해 11, 수색 종료 후 5개월이 지났지만 공식적인 인양 발표는 없다. 아빠는 거리로 나섰다.


다윤이는…

  다윤이는 어려서 많이 아팠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를 했다. 아빠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여유도 없이 다윤이를 안고 병원으로 한 달음에 달려갔다. 병원에서는 열없는 경기라고 했다. 흔치 않은 병이라고. 서울대병원에 다니며 3년 동안 치료하고 나서는 괜찮아졌다. 그렇게 나았는가 싶었는데, 또 아팠다. 가게에서 놀다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고 난 뒤, 쓰러진 것. 아빠는 그 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다윤이의 온 몸이 굳어서 못 움직이더라. 5분정도 정신없이 아이의 팔 다리를 주물렀다이후 2년간 또 병원을 다녀야만 했다. 다른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 시기. 다윤이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아팠다. 그런 아픈 시절을 지나, 이제 겨우 건강해졌는데. 이제는 아프지 않고, 행복할 날들만 앞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떠난 다윤이가 아빠는 너무 아프다.


  아프면 빨리 성숙해진다고들 한다. 다윤이가 그랬다. 악의가 없고, 순한 아이. 말 한마디를 해도, 오랜 시간 생각하고 건네던 속 깊은 딸.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진솔하게 사람을 대할 줄 알았던 다윤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먼저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진 아이였다. 방학이나 연휴면 보육원 같은 곳에 봉사를 많이 다녔다. 어린 애들을 좋아했고, 아픈 아이들을 먼저 살필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다윤이의 장래희망은 유치원 선생님. 다윤이에게 딱 어울리는 꿈이었다.


  다윤이는 부모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엄마 아빠한테도 내가 속을 안 썩여서 너무 좋지?”라며 해맑게 웃던 아이. 어려서는 너무 많이 아파서, 속 썩일 시간도 없었다. 아빠는 속을 썩여도 좋으니 옆에만 있었으면한다.


집안 걱정에 가지 않으려 했던 수학여행

  마지막이 된 그 날의 수학여행. 다윤이는 수학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보름 전부터 출발하는 당일까지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을 생각하고, 아픈 엄마를 먼저 걱정했다. 다윤이 엄마는 뇌종양 신경섬유종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다윤이가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에도 병상에 누워 있었다.


  아빠는 그런 다윤이가 안쓰러웠다.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수학여행. 학교 친구들 전체가 갔다 오는데, 다윤이만 친구들과의 추억을 만들지 못할까봐. 수학여행을 다녀오면 한동안 그 이야기로 꽃을 피울건데, 다윤이가 친구들의 대화에 낄 수 없겠다는 걱정도 됐다. 아빠는 이 기회에 공부하느라 받은 스트레스도 풀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라고 다윤이를 설득했다. 착한 딸 다윤이는 이모가 마련해 준 돈으로 어렵게 수학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아빠는 가지 않겠다던 다윤이를 자신이 설득했다는 것이 아직도 한으로 남아있다.


  아빠는 다윤이와 함께 여행을 다니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다윤이는 아팠고, 아빠는 바빴다. 직장 생활하느라 바빴던 아빠는 가족끼리 제대로 놀러 가본 적이 없었다. 사고 나기 한 해전 여름, 부산에 사는 이모네에 놀러 갔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이었다. 마지막 가족여행일 줄 알았더라면,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걸, 더 많은 사진을 남겨 둘 걸. 아빠는 다윤이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아쉽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다윤이

  다윤이의 생일은 101. 그날도 아빠는 진도 체육관에서 다윤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많은 희생자들이 나온 시점, 그래도 아직 수색작업을 한참 열심히 할 때였다. 부모 생일이나 애들 생일에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단원고 황지현 양도 생일에 돌아왔다. 아빠도 생일엔 나오겠지조그마한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그 전날 태풍이 부는 바람에 바지선이 철수했다. 결국 다윤이 생일에는 수색작업도 할 수 없었다. 아빠는 다윤이 생일에 팽목 등대를 찾아갔다. 손에는 조그마한 케익 하나를 들고.


  지난해 11, 실종자 가족들은 초주검이 됐다. 수색 중단.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정부에서는 인양도 수색의 방법이라고 실종자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인양은 결정되지 않고 있다. 아빠는 화가 난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양을 검토하겠다는 말을 했는데, 검토는 5개월 전에 시작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은 공식 발표를 하고 인양작업을 시작해야할 시점이다. 바다에서 작업을 하는 건 4~7월이 시기적으로 좋다고 한다. 8, 9월 되면 바람 불고 태풍 불고. 이런 상태로는 올해 안에 인양 작업을 시작이나 할지 모르겠다.”



"다윤이 뼈라도 품에 안아봤으면"

  엄마 아빠는 아픈 몸을 이끌고 매일 9시 안산 분향소에서 출발하는 서울행 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교복 입은 학생들을 마주친다. 다윤이와 닮지 않은 아이들을 봐도 다윤이 얼굴이 떠오른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다 딸 같다.


  희생자 가족들을 거리로 내모는 현실이 아빠는 화가 난다. 지난 2일에는 삭발식에 참여했다. 아빠는 다윤이를 건질 수만 있다면 삭발이 아니라 더 한 것도 할 수 있다. 부부는 오전에는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오후에는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한다. 엄마 아빠를 버티게 하는 힘은 오로지 다윤이. 다윤이를 바닷속에서 꺼내주고 싶어서 버틴다. “쓰러지더라도 다윤이 꺼내고 나서 쓰러지겠다. 엄마로서,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라며 아빠는 건져낼 때까지 버티겠다 다짐한다.


  지나가던 시민들의 빈정대는 말을 들을 때, 이제 그만하라는 말을 들을 때 아빠는 화가 너무 난다. 원래 아빠는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분한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따져 묻는 성격이었다. 그런 걸 아는 엄마는 다른 사람 어떤 말을 해도, 뭐를 해도 찾을 때까지는 삼키라고. 가만히 있으라고신신당부 한다. 다윤이를 찾기 전까지 아빠는 어떤 일이 있어도 속으로 삼킨다. 그 화가 아빠의 속을 까맣게 태워도, 그래서 건강이 더 나빠진대도 아빠는 삼킨다. 화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 그리고 혹여 다른 사람한테 낸 화가 돌아와 다윤이를 찾는데 방해될까봐, 그것이 겁나서 아빠는 오늘도 참고 넘어간다.


  다윤이 아빠는 건강이 좋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리를 구부릴 수가 없을 정도. 허리도 아프고 왼쪽 다리도 아프다. 30분가량 스스로 왼쪽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이 다윤이 아빠가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 그러지 않으면 잠시 걷는 것조차 힘이 든다. 신경섬유종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다윤이 엄마는 참사 후 상태가 급속히 나빠져 뇌와 양쪽 귀에 종양이 생겼다. 이제 한쪽 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다. 의사는 병의 진행속도를 늦추려면 집에서 쉬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는 집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다윤이가 아직 차가운 바닷속에 있기 때문에.


  아빠의 지금 꿈은 단 하나다. 다윤이 뼈라도 만져보는 것. 다윤이의 유품은 이미 물 밖으로 나왔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 다윤이가 운동화를 사달라고 해서, 같이 고르러 갔다. 다윤이가 좋아하던 민트색 운동화. 그 운동화가 다윤이가 들고 간 여행 가방에 담겨 돌아왔다. 아직 한번도 신겨지지 않은 채. 언니에게 빌린 검은색 모자, 휴대전화, 엄마가 선물한 지갑도 가방에 들어있었다. 다윤이만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유품은 필요 없는데, 다윤이가 돌아와야 하는데아빠는 혼잣말을 한다.


  아빠는 다윤이 유품을 감식할 때 보고 이제껏 보지 않았다. 다윤이를 만날 때까지 보지 않으려 했는데, 그제 찾아온 취재진의 요청에 꺼내보였다. 유품을 보는 것이 너무 아파도, 지금은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해야 할 상황이니까.


  “정부는 못믿지만, 국민은 믿는다. 나도 국민의 한 사람이니까. 세월호를 잊지 말아 달라. 아직 그 안에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기억해 달라. 또한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 달라.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를 인양해야 한다. 우리의 바람은 오직 그 것뿐이다. 딸아이를 제발 품으로 돌려주세요.” 다윤이 아빠의 호소는 오늘도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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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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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사고 희생자 가족들이 416시간 집중 농성을 선포하고 다시 광화문에서 풍찬노숙을 시작한 지도 보름이 넘었다. 봄이 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추운 날씨, 노숙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터.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행색도 초췌해져간다. 하지만 눈빛만은 힘을 잃지 않고 있다. “그렇게 힘은 들지 않다. 몸이 힘든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묻어있다.


유민아빠 김영오 씨가 광화문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김영오씨는 지난해 일어난 세월호 사고로 딸 유민이를 잃었다. 평소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아빠는 딸 유민이에게 미안해서 세월호 사고의 진상을, 유민이가 그 어두운 물 속에서 죽어야만 했던 이유를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유민이를 위해 아빠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못난 아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알아서 진상 조사를 할 줄 알았다. 지난해 516일 청와대 면담에서 받은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의 약속을 믿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만 지나갈 뿐이었다. ‘세월호 특별법은 여야간의 정쟁에 발목을 잡혀 진척이 없었다.


  유민아빠는 지난해 716, 단식 투쟁에 나섰다. 세월호 특별법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라는 요구였다. 유민 아빠는 당시엔 “3일 정도 단식하면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요지부동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유민아빠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갔고, 건강은 악화됐다. 치아가 약해졌다. 통증 때문에 양치질도 할 수 없게 됐다. 기억력도 상당히 나빠졌다. 또렷하던 기억들이 희미해졌다. 하지만 아빠는 왜 자신이 단식을 하고 있는지, 목적만은 잊지 않았다.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 그 진실을 밝혀야 했다.


  각계에서 유민아빠의 건강을 걱정했다. 대신 단식 할테니 건강을 돌보라는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빠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유민이가 사고를 당했을 때, 아빠는 이미 한 번 죽었기 때문이다.


  살이 46킬로그램까지 빠졌다. 허리와 다리 관절이 아파 걷거나 서는 것이 힘들었다. 근육을 다 소진하다보니 앉아있으면 갈비뼈가 장기를 찔러 장기가 붓기도 했다. 그래서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펴고 있었다. 그런 몸으로 청와대로 향했다.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마저도 힘겨운 유민아빠를 경찰은 막아섰다. 단식 40일 째, 결국 유민아빠는 쓰러졌다.


  병원에서도 링거만 투약할 뿐, 단식을 이어갔다. 그래도 정부와 여당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 때 아빠는 대한민국은 정부가 국민을 국민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에게 국민은 그저 세금을 내는 기계일 뿐이다. 사람이 죽어도 그저 기계가 망가졌네, 할 사람들이라고 유민아빠는 느꼈다. 자신이 아니라 천 명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명의 존엄보다 돈의 가치가 우선인 사회, 이 사회를 바꾸기 전까지 아빠는 편히 죽을 수도 없었다. 46일 만에 유민아빠는 단식을 중단했다. 단식은 중단했지만, 진상규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단식하던 때를 돌아보면 고마운 분들이 많았다. 동조단식에 나선 수많은 국민들, 서명을 하고 광화문에 나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민들, SNS에 응원의 글을 올려주는 분들까지. 그 중에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들도 있다.


  나이 많은 분들 중에는 보수층이 많다고 한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 앉아있으면, 들릴 정도로 비아냥거리며 가시는 어른들도 있다. 하지만 마음 따뜻한 어른들도 많았다. 단식을 하고 있는데, 팔순 다 되신 분들이 오시더니 큰 절 하고는 눈물을 쏟았다. “유민아빠 미안해. 내가 사회를 잘못 만들어서 유민아빠가 굶고 이 무슨 고생인가.” 그 한마디에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그 말의 진정성과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눈시울을 붉혔다.


  어린 학생과 젊은이들이 찾아올 때면 더 힘이 났다. 어린 학생들이 벌써 특별법이 왜 중요한지 내용을 다 알고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기특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유민아빠는 희망을 봤다.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왕따를 당하거나 우울증으로 자살하려던 아이들이 편지를 써서 오기도 했다. ‘다시 살겠다는 의지를 갖게 됐다’ ‘왜 살아야하는지 알겠다이런 편지를 많이 받았다. 그런 모든 성원이 유민아빠가 46일을 버티는 힘이 됐다. 유민아빠는 그런 분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46일이나 단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감사를 전했다.


  그런가하면 마음 상하게 하는 일들도 벌어졌다. 일간베스트(일베) 회원들이 단식하는 유민아빠를 조롱하기 위해 광화문으로 왔다. 이른바 폭식투쟁이었다. 부아가 치밀고 속이 뒤집어졌다. 하지만 단상도 설치해주고, 체하지 않게 물도 갖다 주라고 민우아빠한테 부탁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편히 식사할 수 있게 하자. 싸우지 말자. 저 사람들도 같은 나라에서 안전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니까.”


  당시 유민아빠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출처 없는 루머들과 그걸 퍼나르는 언론이었다. 유민아빠의 단식이 길어지고, 언론의 관심을 받자 인터넷에는 온갖 루머들이 나돌았다. 아픈 가족사를 들춰냈다. 마치 보상금을 많이 받아내려고 환장한 사람처럼 몰아갔다. 유민아빠는 스트레스로 머리가 한주먹씩 빠졌다.


  언론은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루머를 사실인 것처럼 보도했다. 그 보도로 루머는 확대재생산 되어갔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유민아빠는 언론을 믿지 않게 됐다. “기자들이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보고 방송을 내보내든 기사를 쓰든 해야 하는데, 알아보지 않는다며 언론사의 보도 행태를 지적했다. 또한 일부러 왜곡된 기사를 쓰지 않는 기자라 하더라도, 정곡을 찌르는 기사를 쓰는 기자가 없다. 겉으로 보이는 면만 보도한다. 그 속을 파헤치고, 물고 늘어지는 기자가 없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유민아빠 김영오씨


  지난해 11, 결국 세월호 특별법은 수사권과 기소권이 빠진 반쪽짜리로 만들어졌다. 아빠는 반쪽짜리 특별법이라도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되면, 제대로 진상조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바랐다. 세월호 사고의 진상을, 왜 딸 유민이가 죽어갔는지, 사회 구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밝혀지길 기도했다. 하지만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해양수산부가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시키는 시행령안을 입법 예고한 것.


  아빠는 다시 광화문 농성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희생자가족들은 지난달 30일부터 ‘416시간 집중 촛불 농성을 선언했다. 이번에도 유민아빠 자신의 건강은 생각하지 않는다. “건강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몸 망가지더라도 시행령 폐기하고, 특별법이 제대로 시행되도록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지난 1, 정부는 배보상 기준을 발표했다. 언론이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4억이니 8억이니 떠들어 댔다. ‘왜 세월호 가족들이 다시 광화문으로 나왔는지’, ‘정부시행령안의 문제점은 무엇인지광화문 광장에서 외치는 유가족들의 목소리는 언론에서 사라졌다. 그러다보니 국민들은 유가족들이 돈을 더 받으려 생떼 쓰는 줄로만 안다. 그래서 임원진 11명이 삭발 결의했다. 임원진의 결단에 희생자 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참여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현재 70여명의 희생자 가족들이 삭발을 한 상황, 유민이 아빠도 당연히 앞장섰다.


  유민 아빠는 정부시행령안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시행령은 모법인 세월호 특별법의 입법취지를 완전히 무력화 시킨다. 쓰레기 같은 시행령이다. 이 시행령대로라면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를 출범시키지 않는게 낫다. 기획조정실에서 실장과 총괄담당, 조사1과장이 상임위원의 업무를 조정하게 되어있다. 결국은 파견공무원들을 통해 정부가 특조위를 조종하겠다는 말이다.”


  “해경에서 8, 해수부에서 9명의 공무원이 파견되는 것도 말이 안된다. 해경과 해수부는 수사를 받아야 할 대상이다. 해경과 해수부에 대해 갖가지 의혹들이 풀리지 않고 있다. 이들이 특조위에 참여하겠다는 것은 내가 죄를 지었는데, 스스로 수사를 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들의 수사를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진상조사 소위원회의 조사 범위를 정부가 조사해온 것을 검토하는 수준으로 축소 한 것도 문제다. 이렇게 할 것이면 왜 특별 조사를 하는가. 형식적으로 대충 덮고 가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수많은 의혹이 산적해있다. 이 의혹들을 제대로 해결하려면 직접적인 재조사를 실시해야 하는데, 시행령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에서는 포괄적인 재해와 재난에 대한 안전을 점검, 안전사회 건설을 추진하게 돼있다. 하지만 시행령에서는 선박과 해상으로만 축소했다. 재해 재난이 해상에서만 일어나는가, 말이 되지 않는 시행령이다라며 정부 시행령안의 폐기를 요구했다. 또한 수정이나 협상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1주기가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예정대로였다면 추모행사 준비에 한창 바쁠 시기. 희생자 가족들은 시행령이 철회가 안 될 경우 1주기 행사 또한 취소하겠다는 마음이다. 유민아빠는 시행령 이대로 통과되면 진상 조사는 물건너 가는데, 추모행사를 하고 싶겠나. 1년이 지났는데,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유민이를 추모할 면목이 없는 것이다. 1주일 내에 진상을 밝힐 수는 없어도, 최소한 정부가 내놓은 쓰레기 시행령안을 폐기하고, 특조위의 원안대로 시행하겠다는 약속, 세월호 선체 인양을 하겠다는 약속 정도는 받아내야 유민이 볼 낯이 생긴다상징적으로 416시간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시행령안이 폐기될 때까지 사실상 무기한 농성에 돌입한 것이라며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유민아빠는 마지막으로 더 이상 가족들 가슴에 상처 주지 말라. 돈 받으려 여기 앉아 있는 것 아니다. 왜 내 자식이 죽었는지 밝혀달라고, 안전사회 건설하자고 앉아있는 거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아프니까 두 번 죽이지 말아 달라. 광화문으로 모여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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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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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6일 남미순방을 떠났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안산합동분향소에서 열리는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제에 초대했지만 대통령은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초대장이 잘못 전달된 것일까. 팽목항에서 알맹이 없는 담화를 7분간 진행하고 남미로 향했다. 지난해 단 한명도 구조 하지 못하고 304명을 수장시킨 국가의 리더는 그렇게 또 유가족들과의 대화를 회피했다.


광화문 누각 건너편에서는 시민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경찰은 유가족이 보이지 않도록 경찰버스로 차벽을 세웠다.


  대통령의 직무를 대행해야하는 이완구 총리는 ‘성완종 게이트’에 연루돼 곤혹스러운 상태다. 수많은 시민들이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경찰은 1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골목 골목을 막아섰다. 100여대의 경찰 버스로 차벽을 쳤다.


  시민들은 2008년 FTA 반대집회 때 등장한 ‘명박산성’을 떠올렸다. 경찰은 당시보다도 더 가혹하게 시민들을 막아섰다. 당시에는 세종대왕상 앞의 광장까지는 시민들의 진입을 허락한데 반해 광장진입을 원천 봉쇄했다. 시민들은 세월호 광장에서 분향도 할 수 없게 됐다. 신원확인 후 인근주민들에게는 길을 비켜주던 경찰이 이번에는 얄짤없다. 그저 돌아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퇴근길이 경찰에 의해 봉쇄된 인근 주민들의 원성이 터져나왔다. 경찰은 유가족과 행진 참가자들에게 캡사이신을 뿌렸다. 10여명은 연행되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광화문 누각 앞까지 진입에 성공했다. 그리고 경찰은 병력과 버스를 이용해 유가족들을 감금했다. 유가족들은 그 자리에서 노숙 농성을 이어갔다. 광화문 누각 앞은 전기도 물도 화장실도 없다. 기본적인 생활도 유지할 수 없는 곳에 유가족들은 고립되었다. 416연대는 “자식 잃은 부모에게 국가가 이런 모욕까지 안 깁니다”라며 페이스북에 한 장의 사진을 올렸다. 파란색 플라스틱 상자가 하나 놓여있고, 그 아래로 액체가 흘러있다. 유가족들이 최소한의 부위만 가린 채 소변을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사진 출처 = 416연대 페이스북

  17일 저녁, 경찰들은 횡단보도를 지키고 섰다. 횡단보도를 건너겠다는 시민들에게는 우회하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취재기자라고 신분을 밝혀도 통제를 당했다. 경찰 간부 하나는 “지금은 곤란하니 20분 후에 오라”고 말했다. 다시 갔을 때 그 간부는 없었고, “건널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17일 밤 경찰이 횡단보도를 막고 있다.


  그때 건너편에서 유가족들이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화장실 통제는 어느 정도 풀렸다고 했다. 재욱이 엄마는 “도시락은 전달 돼 식사는 했다. 해도해도 너무한다. 우리나라 인권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된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유가족들을 이렇게 대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재욱이 엄마는 “낮에는 잠깐 취재 허락했었는데, 다시 막나보네. 우리 사이에 끼어서 한번 들어가보자"라고 제안했다. 유가족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기로 했다. 영석이 엄마는 “경찰이 막아서면 그냥 돌아가. 괜히 마찰 생기면 우리 엄마들도 못들어가게 할지 몰라”라며 신신당부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 하자 경찰이 막아섰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냥 돌아섰다. 길 건너에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 정부의 불통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작부터 꾸준히 지적받고 있지만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시끄러운 일이 있으면 해외 순방을 떠났다. 세금을 들여 마련한 경찰버스로 차벽을 치고, 대한민국의 청년들을 의경이란 이름의 저임금 경찰 병력으로 뽑아 국민과 반목하는데 낭비하고 있다. 유가족에게서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권리마저 박탈하고, 누가 볼 까 접근까지 막고 있다. 언제까지 피해서 해결될 문제는 없다. 시민들은 오늘도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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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일 박근혜 대통령의 인양 검토 발언에 대해 세월호 유가족들과 국민대책위는 못 믿겠다는 입장이다. 유가족들은 세월호 인양의 기술적 검토는 이미 끝났다. 그런데 기술적 검토를 한 뒤 결정하겠다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유가족들이 박 대통령의 발언을 반기고 있다는 보도를 봤는데, 아무 발언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는 말을 침소봉대한 것이라며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박래군 416일의약속국민연대 상임운영위원은 유가족들은 박 대통령의 발언을 믿지 않는다. 세월호 선체 인양의 기술적 검토가 끝났다는 사실을 유가족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인양에 대한 찬성 여론이 높아지자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벌인 쇼라고 평가 절하했다. 또한 우는 아이 달래듯 하는 정부의 태도에 유가족들이 분개하고 있다. 시행령안의 폐기와 세월호 선체 인양 문제를 결정할 때까지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주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기술적 검토를 한 뒤 적극적으로 고려하겠다는 이야기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백 번 해오던 이야기다. 대통령의 입에서 처음 나온 발언이라고 특별히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여야할 때라며 정부의 세월호 선체 인양 결정을 촉구했다.


  한편 이완구 국무총리는 7일 기자단 오찬 간담회에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에 문제가 있다면 유족의 입장을 반영하겠다. 유가족의 입장을 진솔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이번주 유가족을 만나겠다. 전향적으로 모든 문제를 풀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 총리의 발언에 대해 박주민 사무차장은 수정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문구 몇 개 고치자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고, 본질을 흐리는 발언이다. 폐기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주장했다.


  7일 일부를 제외한 세월호 유가족들은 농성을 쉬었다. 지난달 30일부터 계속된 강행군에 심신이 지친 것. 특히 지난 4일과 5일 안산분향소에서 광화문까지의 도보행진과 6일 세종시 해수부 앞에서의 농성은 유가족들을 지치게 했다. 끝날 기약이 없는 농성을 위해 7일 하루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


  4.16 촛불 문화제는 계속 이어졌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50여명의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촛불을 밝혔다. 이날 집회에서 세월호 특위 비상임위원인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가 강연을 했다. 김 교수는 세월호 유가족들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감사해야할 대상이다. 안전 사회 건설을 위해 앞장서고 있는 숭고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또한 세월호 진상조사는 단순히 세월호 사고의 원인을 밝혀 유가족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일이 아니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며 “200억원이 아니라 더 큰 비용을 치르더라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교수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 정부 시행령안에 대해 파견된 공무원인 기획조정실장이 조사를 조정하는 업무를 맡게 되는데, 사실상 조정이 아닌 조종을 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정부 시행령안대로 조사가 이뤄진다면, 특위 위원들은 거수기로 전락하고 만다. 이른바 세금도둑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가족의 입장을 반영하겠다는 이완구 총리의 발언에 대해서는 문제점들을 다 고치면 이미 지난 2월 세월호 조사특위에서 제출한 안과 똑같을 것이라며 정부 시행령안 폐기와 특조위 원안 채택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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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유가족들이 광화문 광장에서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세월호 1주기, 추모를 해야 할 기간에 농성을 하게끔 만드는 정부가 유가족들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번엔 2학년 3김도언 학생의 어머니를 만나봤다.


4월 3일. 광화문 광장 퍼포먼스

 


우리 도언이는

  엄마가 기억하는 도언이는 구김 없고, 정의감 있는 아이였다. 집에서는 동글동글 도언이라고 불렀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동그란 안경을 썼기 때문. 성격도 동글동글해서 친구도 많았다. 바른생활부 활동도 하고, 연극도 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던 아이였다. 1학년 때는 연극을 해서 금상을 받아오기도 했다. 전교에서 도언이를 모르는 친구들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피아노 연주도 잘 하고, 춤도 잘 추고, 사물놀이도 잘 하고. 다방면에 재능이 있던 도언이. 엄마, 오빠, 이모, 사촌오빠들 까지 6명이 한 팀이 되어 사물놀이 봉사를 다니기도 했다. 엄마는 그때 그 시절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도언이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누구보다 친근한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과 소통하고 싶어했다. 누구보다 선생님을 잘 따르는 아이기도 했다. 그 또래 아이들이 선생님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다반사. 하지만 도언이는 진로와 관련해서는 꼭 선생님하고 상담했다. 선생님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난 뒤 다은이 친구들로부터 알게 된 사실 하나. 친구들 사이에서 상담사로 통했다는 것. 고민이 있는 친구들은 항상 도언이에게 이야기를 했다. 도언이는 친구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조언도 해줬다. 친구의 비밀을 다른데 가서 떠벌리는 성격도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아이였다. 외가쪽에서 막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어른을 만나면 배꼽인사를 할 정도로 예의가 바른 아이였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 딸을 잃었으니, 엄마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하다.

 

  아들은 든든한 맛이 있고, 딸은 살가운 맛이 있다. 도언이 오빠도 있지만 도언이는 특히 친구 같은 자식이었다. 도언이랑 커플링도 맞췄다. 도언이가 엄마를 졸라서 맞추게 된 것. 도언이는 학생들 하는 티타늄 같은 것으로 하려 했는데, 엄마의 제안에 화이트 골드로 맞췄다. 도언이는 그 커플링을 항상 손에 끼고 다녔다. 엄마와 교감하는 징표였다. 지금 반지는 평택 추모공원에 도원이랑 함께 있다.


  도언이는 엄마의 살아가는 낙이자 의미였다. 항상 도언이를 끼고 잤다. 자다가도 뽀뽀하고, 만질 정도로 엄마와의 스킨십에 스스럼이 없을 정도였다. 도언이가 잘 때 볼을 만지면 ~하면서 잠투정을 했다. 그러다가도 엄마야하면 안도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또 엄마가 이불을 안 덮고 자면, 조심히 이불을 덮어주던 속 깊은 아이. 그런데 지금은 손을 대도 없으니 미칠 노릇이다. 자다가 습관적으로 손을 뻗는데, 그 곳에 도언이가 없다. 엄마는 자신을 너무나 닮은 딸의 사진을 휴대폰에 저장해 놓았다. 포토샵으로 수정을 하지 않아도 예뻤던 딸. 하루 종일 그 사진을 보고 있어도, 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지난 1년의 기억

  도언이가 나오기 전까지, 물에서 시신이 올라오면 가족들이 확인을 하러 가야했다. 특이사항이 도언이와 비슷한 여학생의 시신이 건져질 때마다. 마음 약한 엄마가 무너질까봐 도언이 오빠가 그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오빠라고 하지만 아직 20대 초반, 시신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힘든 내색하지 않고 감당해냈다. 그 슬픔과 분노가 어느 정도의 크기일지, 엄마도 가늠하지 못한다.

 

  오빠는 제대로 된 심리치료도 받지 못하고 작년 6월 군에 입대했다. 연기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17년간 함께 살았던 동생이 죽었는데,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가족들의 곁에 남아 힘을 보태려 했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설득했다. 제대하고 나왔을 때도 엄마 아빠가 밝히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때 행동하라고 했다. 권리는 보호해주지 못하면서 의무를 강요하는 나라가 싫었지만, 의무를 다 해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입대하는 아들이 엄마는 걱정됐다. 혹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돌발행동을 할까봐. 그랬을 때, 혹시나 세월호 유가족 전체가 욕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 여느 엄마들 같았으면 몸 건강하란 말하기에도 바쁜 그 시간, 엄마는 군대에서 문제 일으키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아들이 입대한 지 벌써 10개월이 지났지만 면회 한 번 찾아가지 못한 것이 엄마는 못내 미안하다. 그런 상황을 만드는 정부가 밉다. 아들은 1주기에 맞춰 휴가를 나온다. 휴가 나온 아들을 위한 음식 장만할 시간도 없는 현실이 엄마는 또 미안하다.

 

  엄마는 동네에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전에는 편하게 하던 행동들도 조심하게 된다. 주위 시선을 자꾸 의식하게 된다. ‘딸을 잃었는데 저렇게 행동해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동네 슈퍼도 가지 않고, 세탁소도 가지 않는다. 사고에 대해 물어볼까봐, 부담스럽다.

 

  이런 이유로 유가족분들 중에는 이사를 하신 분들이 많다. 도언이네도 이사를 하려고 생각했다.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의 반대로 없던 일이 됐다. 아빠는 도언이 흔적이 남아있는 집을 떠나기 싫다. 도언이의 흔적이 남은 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사는 것도 싫었다. 도언이 방은 그대로 뒀다. 책상, 침대, 옷장도 그대로 뒀다. 도언이 신발, 우산 할 것 없이 도언이가 사용하던 모든 물건도 모아뒀다. 학교에서 신던 실내화도 집으로 가져왔다. 심지어 사용하던 칫솔도 그대로 뒀다. 그런데 도언이만 없다. 그래서 물건들로 가득찬 그 방은 엄마에게 그저 빈 방이다.

 

  돌아온 도언이의 생일. 엄마는 생일상을 집에서 직접 차렸다. 살아 있을 때도 항상 집에서 생일상을 차려줬으니까. 도언이가 좋아하던 김치찌개, 카레, 튀김, 잡채 등 한 상 차렸다. 김치찌개는 특별히 아빠가 끓였다. 도언이가 아빠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좋아했기 때문. 생일상을 도언이 책상 위에 차려줬다. 다른 부모님들은 함께 생일잔치를 하고, 서로 챙겨주기도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도언이 생일은 우리 가족끼리 있고 싶었고, 다른 가족들을 만나면 더 아플 것 같았다. 그리고는 도언이가 있는 평택 추모공원에 다녀왔다.

 

  엄마는 도언이가 매 순간 그립고, 또 그립다. 특히 아침에, 애들 학교 가는 시간에 생각이 많이 난다.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미어진다. 매일 데리고 등교하던 기억이 떠올라 더 힘들다. 오전 여섯시 반, 도언이랑 함께 집을 나서던 그 시간. 엄마는 또 도언이 방에서 눈물을 훔친다.


4월 5일. 안산~광화문 1박2일 도보행진을 마친 유가족들

지난한 싸움

  사고가 난 뒤 엄마는 운영하던 가게를 닫았다. 진행하던 건강 관련 강의도 접었다. 도언이의 장례를 치르고,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슬렀다. 지난 6월이었다. 엄마는 아빠랑 진도 체육관, 팽목항을 돌아다녔다. 음식 싸들고,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다녔다. 도언이 친구들이고, 선생님이니까. 수중수색이 종료될 때까지 그렇게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엄마 아빠도 위로를 많이 받았다.

 

  엄마는 연약하지 않다.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1920일 동안 도보행진을 했다. 물론 힘들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것조차 힘든 순간도 있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그 물집이 터지고. 근육통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는 도언이 생각하면서, 실종자 분들 생각하면서 걸었다. 아침이면 근육 이완제를 먹었다. 저녁이 되면 파스를 붙이고. 아침에 또 일어나면 힘들지만 약 먹고, 함성 한 번 지르고, 힘을 얻어 걸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겠지, 정부에서 세월호 인양 등 문제를 해결해주겠지. 기대하며 걸었다.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 전국에서 4000명이 넘는 분들이 유가족들을 맞이했다. 도보행진은 학부모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언론에서는 보도해주지 않았다. 제대로 보도했다면 현재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추모기간에 쓰레기 시행령안이나 배·보상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가족 마음을 제대로 전해줬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할 것을 요구했다.

 

교육계 변화해야

  엄마는 세월호 이후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계는 세월호 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교육청의 허가를 받고, 학교에서 아이들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겠다고 인솔하고 갔지만 지켜주지 못했다. 엄마는 학교를 믿고 애들을 보냈다. 하지만 아직 교육부는 변화지 않고 있다.

 

  “아이들 안전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교과서적인 내용 말고 실제 위험이 닥쳤을 때, 생명을 지키는 방법과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또한 세월호의 진실을 가르쳐야한다. 세월호 사고의 원인과 현재 과정을 알려줘야 한다. 진실을 알아야 아이들이 행동할 수 있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엄마는 교육청 등 교육계와 연계된 활동을 많이 한다. 지난 1일과 2일 도언이 엄마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청년 문화 콘서트 기억과 약속에 참석했다. 1일에는 약 1200명의 청년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월호 사고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2일에는 의정부에 있는 북부 청사에서 교장선생님, 교육부 직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교장선생님들 모시고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경기도 이재정 교육감이 추진한 덕분에 마련된 자리였다. 세월호에 대해, 교육부의 부패, 세월호 이후 달라져야할 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 일정 때문에 엄마는 삭발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마음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오는 길에 유가족들이 단체삭발식 하는 모습을 인터넷 생중계로 봤다. 너무 마음이 미어졌다. 유가족들이 삭발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그렇게 몰아넣는 정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1주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추모기간에 추모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부는 느닷없이 배·보상 이야기를 꺼냈다. 돈을 흔들며 유가족을 모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론은 분별없이 배·보상에 관련된 뉴스만 보도했다. 마치 우리가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나선 것이 더 많은 보상을 받아내기 위함인 것처럼 비쳐지게 만들고 있다.


4월 6일. 광화문 촛불 문화제

도언이만을 위해 울고 싶다

  비가 오면 엄마는 제일 먼저 도언이 우산이 생각난다. 도언이는 노란, 빨간, 하얀 우산 세 개를 준비해두고 옷에 맞춰 들고 다닐 정도로 멋쟁이였다. 우산에는 예쁜 공주 도언이라고 표시해 두었다. 우산 뿐만 아니라 자기 물건에는 꼭 예쁜 공주 도언이라고 표시를 했다. 하늘나라에도 비가 올 텐데, 그 곳에서 우산은 쓰고 있을까. 도언이 우산은 내가 쓰고 있는데혹여나 비를 맞고 있지 않을지 여느 엄마와 같은 걱정을 한다.

 

  또한 이 비가 침몰하는 대한민국에 단비가 되어주기를 기도한다. 물은 생명이다. 메마른 대지에 비가 쏟아지면 그 토양에서 생물이 다시 살아난다. 메마른 대한민국에 생명을 불어넣는 근원이 되기를 바란다. 하늘에서 아이들이 도와줄 거라고 믿는다.

 

멈춘 시간 움직일 수 있는 건 언론

  그날 모든 시간이 멈춰졌다. 엄마 아빠들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생각도 멈춰버렸다. 작년 416일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게 중요한 사실이다. 애들 희생된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진상을 밝히고자 1년을 버텨왔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멈춘 시간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언론이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지만 국민들도 깨우칠 수 있다. 우리는 그 시계를 움직이게 하려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다.”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데,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다. 언론이 제대로 서있다면 지금처럼 정부에서 추모기간에 배·보상 이야기를 했겠나. 빨리 진상규명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면 온전히 내 딸 도언이만을 위해 울 수 있으니까. 기도할 수 있으니까.”

 

  엄마는 지금 울 수가 없다. 밖에서는 절대 울지 않는다. 울면 지치니까, 지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도언이 방에서 소리 죽여 운다. 엄마는 진상이 규명되고 도언이만을 위해 울 시간이 오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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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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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광화문의 날씨는 흐렸다. 봄바람 같지 않게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다.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 연합예배 준비 위원회의 주관으로 부활절 예배가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약 8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해 예수의 부활과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렸다.


  예배가 마칠 즈음 세월호 유가족 250여명과 함께 도보행진을 한 시민들이 세월호 광장으로 들어섰다. 광화문 광장에서 기다리던 시민들은 상복을 입고, 영정사진을 든 유가족들을 박수로 맞았다. 지나가는 유가족들의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건네고, 포옹하며 위로했다. 유가족 중 일부는 오랜 도보행진에 물집이 잡힌 탓에 걸음을 절기도 했다.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 앞에 자리를 잡고 촛불문화제를 진행했다.


4월 5일. 안산~광화문 1박2일 도보행진을 마친 유가족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딸 예은이의 영정사진을 안고 시민들 앞에 나섰다. 그는 쉰 목소리로 예은이의 꿈이 가수였다. 노래하고 즐기는 자리는 아니지만 많은 분들 앞에 예은이와 함께 서고 싶었다흐린 날씨에도 세월호 광장을 가득 채워준 많은 시민분들께 감사하다. 하지만 더 많은 분들이 나서주셔야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며 더 많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촉구했다.


  전명선 4.16가족협위회 대책위원장은 국민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설 수 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어 세월호 진상규명이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첫 걸음이라며 진상규명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진상규명의 의지를 밝혔다.


  이번 12일 도보행진에 함께한 시민 안승혜씨는 오는 동안 비가 오락가락 했다. 영정사진에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맞을까, 꼭 안고 가는 유가족들을 보며 눈물이 흘렀다우리는 세월호 유가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살고 있다. 더 많은 빚을 지기 싫어 함께 걸었다고 세월호 유가족의 12일 도보행진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무대에 오른 세월호 가족들은 정부에 욕을 하기도 했다. 유경근 위원장은 이제껏 욕을 참았다. 할 말이 많아도 참았다. 참고 또 참으면 국가가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하지만 우리가 속았다. 앞으로는 해야 할 말들을 가감 없이 하겠다고 밝혔다.


4월 5일. 안산~광화문 1박2일 도보행진을 마친 유가족들


  광장 옆에는 119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한 시민이 구급차에 다가가 치료를 요구했다. 12일의 도보행진 동안 8개의 발가락에 물집이 잡힌 것. 본인을 트위터리안 서패후라고 소개한 시민은 군대 간 아들과 고등학교 2학년 딸을 키우는 평택에 사는 평범한 엄마다. 내 자식도 언제든지 이런 가고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엄마로서 아이들을 위해 안전사회를 건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2일간의 도보행진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한편, 세월호 유가족들은 6일 세종시 청사로 내려가 해수부에 항의 방문 할 예정이다. 오는 11일에는 집중 촛불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유경근 위원장은 “11일에는 오늘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야 한다며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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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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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일 광화문 광장에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삭발식이 거행됐다. 이미 아이들과 함께 죽은 목숨, 기꺼이 내던질 각오가 되어있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단원고 희생자 이재욱 학생의 엄마 홍영미씨도 이날 길었던 머리를 다 밀어버렸다. 싹둑 잘린 머리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단원고 이재욱 군의 엄마를 만나봤다.


단원고 故이재욱 군의 엄마 홍영미씨


  재욱이 엄마는 아직 삭발한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화장실 갔을 때 살짝 봤다.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조금 다르더라. 내 머리가 뒤통수가 납작하다. 재욱이도 뒤통수가 납작하다며 낯선 모습 속에서도 아들을 찾았다.


우리 재욱이는…

  엄마가 기억하는 아들 재욱이는 밝고 자유롭고 건강한 아이였다. 재욱이는 워낙 활발해 이런 저런 활동도 많이 했다. 1학년 때는 2학년이었던 누나와 함께 학생회 활동을 했다. 재욱이가 학생회에 들어갔던 이유는 축제를 멋지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 홍보부장을 맡아 제 역할을 충실히 했고, 덕분에 그 해 단원고 축제는 어느 때보다 성공적으로 마쳤다.

 

  대외 활동도 활발했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코스프레 축제에도 3년간 친구들과 함께 쫓아다녔다. 파쿠르 전국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했다. 파쿠르는 주변 환경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극복하는 훈련으로 스턴트맨처럼 벽을 타고 뛰어넘기도 한다. 재욱이는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이면 동아리 모임에 나가 비디오를 찍기도 했다. 홍씨는 사고가 났을 때 동아리 친구들이 많이 찾아와줬다며 분향소에 찾아와 함께 힘들어하고 울어준 아들의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재욱이는 또 애인처럼 살가운 아들이었다. 엉덩이나 팔뚝 같은 데가 튼튼했는데, 엉덩이를 팡팡 때리에이엄마!” 하면서도 엄마와의 그런 스킨십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도 가끔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재욱이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엄마는 속상하다. “재욱이 사이즈만한 인형을 만들까하는 생각도 해봤다며 농담을 해본다.

 

  재욱이는 누나랑 방을 같이 썼다. 나이를 먹어가며 방이 필요해져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지만, 이사를 하게 됐을 때는 이미 사고가 난 이후. 엄마는 재욱이의 방을 꾸몄다. 방에는 평소 사용하던 물건들로 가득하다. 이사를 할 때면 의례 물건들을 버리지만 엄마는 아들의 물건을 작은 것 하나까지 놔두고 올 수가 없었다. 책상도, 옷장도 그대로 뒀다. 모든 게 다 그대로인데 재욱이만 없다. 엄마는 재욱이의 향취를 느낄 수 있을까 가끔 옷장을 열어본다.

 

지옥 같았던 지난 1

  지난 1년 재욱이네 가족의 삶은 지옥 같았다. 운동을 좋아해 건강에 자신이 있던 재욱이 엄마는 건강을 잃었다. 위도 아프고, 소화도 잘 안 된다. 물만 먹어도 살이 붙는다. 순환이 안돼서 그렇다. 세포 활성화가 잘되면서 노폐물들이 땀으로 배출이 돼야하는데 안되면서 결국 피부병이 생기는 단계까지 왔다. 아픈 몸을 이끌고라도 농성장에 나오는 것이 엄마는 좋다.

 

  엄마는 사고 당일의 기억은 떠올리기도 싫다. 그날은 몹시 추웠다. 몸도 추웠지만 마음까지 추웠다. 으슬으슬하고 세포가 떨렸다. 심장이 멎고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심정이었다. 재욱이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엄마니까. 그 순간부터 무너지고 엄마도 같이 죽었다. 그리고 삶의 목표를 잃었다.

 

  사고가 난 직후에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힘들었다. 재욱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정해야하니까. 잊기 위해 잠을 자고, 잊지 못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던 날들이 이어졌다. 재욱이가 좋아하던 치킨·피자를 시켜 먹을 때, 같이 갔던 음식점 앞을 지나갈 때면 잘 먹던 모습이 자꾸 떠오르다. 하루에 수십번은 냉장고 문을 여닫던 아이. 길을 가다 재욱이 또래의 아이가 보이면 가슴이 미어진다. 재욱이와 닮은 곳 하나 없는 그 모습에서도 재욱이가 떠오른다.


  사고 당시에 단원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누나는 상실감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재욱이 뿐만 아니라 250명의 후배를 한 번에 잃었다. 학생회, 동아리에서 친하게 지냈던 후배들도 다 잃었다. 한 달쯤 지나고 나서야 마음을 추슬렀다. 동생의 삶을 대신 살아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예전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절망감을 벗어나야했다. 현재는 어엿한 대학생.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누나로 살기 위해 목표했던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휴대폰 바탕화면에는 교복을 입은 재욱이가 누나와 함께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다. 엄마는 수시로 재욱이의 사진을 본다. 딸아이였다면 더 많은 사진이 남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학생증 사진이 다른 사진들보다 잘 나왔다. 이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사용될 줄 당시엔 누구도 몰랐다. 재욱이의 명예주민등록증에도 이 사진이 사용됐다. 고등학교 2학년 생일이 지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수 있지만, 재욱이는 주민등록증을 받아보지 못하고 떠났다.

 

재욱이의 첫 생일

  지난해 1219. 사고가 난 후 맞은 재욱이의 첫 생일. 먼저 경험한 주변 엄마들이 많이 걱정했다. 거의 매일 아이들의 생일이 돌아온다. 생일을 맞는 엄마들은 미친다. 첫 생일이니까. 아이 장례도 장례지만 첫 생일이 너무 힘들다고 먼저 경험한 엄마들이 위로했다. 평소 꿋꿋한 성격이기에 잘 견딜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1주일 전부터 이유 없이 아팠다. 재욱이 생일을 양력으로 챙겼는지, 음력으로 챙겼는지도 헷갈렸다. 가족들은 양력으로 챙겼다고 하는데, 자꾸 음력으로 챙겼던 것만 같았다. 불과 1년 전에 챙긴 생일인데. 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생일날 아침엔 미역국, 생선구이, 피자 등 재욱이가 좋아하던 것으로 상을 차렸다. 생일상을 가족끼리 함께 나눠 먹고, 납골당·분향소에 들러 다시 상을 차렸다. 재욱이 친구들도 찾아왔다. 재욱이랑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닌,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아이들이었다. 재욱이도 단원고에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독수리 5인방 엄마 아빠들도 재욱이의 생일을 함께 챙겨줬다. 독수리 5인방이란 재욱이랑 1학년 때 친했던 친구들 부모의 모임. 아이들은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라졌지만 똘똘 뭉쳐서 잘 다녔다. 그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애들 장례를 치르고 나서 5인방 부모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누구보다 서로의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주 모인다.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많은 위안을 받는다. 그렇게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다. 아이들 때문에 맺어진 부모들의 인연이 지금은 살아가는 동력이 됐다.

 

바라는 건 오로지 진상규명

  지난 1년간 세월호와 관련돼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가족들이 바라는 건 진상규명과 참사 이전과는 다른 안전한 대한민국 건설. 재욱이 엄마는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 이 두 가지만 옳은 방향으로 결정이 됐으면 삭발까지 할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모든 것들이 유가족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건지고, 장례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애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했는지 알아야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 움직이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경우를 목격하고 경험했다. 시간만 끌고 있지 진상규명은 하나도 되지 않고 있었다. 재판은 그 동안에 진행되고 있고.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될 거라고 믿었다.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부와 정치권은 차일피일 미뤘다. 언론들은 세월호 사건을 정치적 사건처럼 보도했다. 세월호 가족의 목적이 더 많은 돈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악질적인 기사들도 넘쳐났다. 여야는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하다 결국에는 반쪽짜리 특별법을 만들었다. 반쪽짜리 특별법을 가지고라도 어느 정도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정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안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진상규명이 될 거라는 기대의 조그마한 불씨마저 꺼뜨린 거다. 사고 후 현재까지의 상황이 완전한 속임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래서 엄마는 머리를 박박 깎았다.

 

  재욱이 엄마는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죽었다. 지금 내가 움직이는 것은 그 아이들을 살려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라고 밝혔다. “육신을 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해도 정신은 살려낼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이 과정이 아이들을 살리는 과정이다. 그러니 우리가 세월호를 어떻게 인양하지 않을 수 있겠나. 썩어가는 대한민국을 눈 뜨고 지켜볼 수는 없다. 양심이 회복되고 정부, 정치, 국민의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다. 지금껏 방관하며 살아와서 이런 꼴이 됐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지구는 계속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언론이 변해야 사회도 변해 

  삭발식날, 광화문광장은 기자들로 발 딛을 틈이 없었다. 이에 대해 재욱이 엄마는 우리 목소리를 한껏 냈다. 이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왔다는 게 조금은 위안이 됐다. 그 전에는 아무리 외쳐도 철옹성이었다. 평소에는 농성장에 찾아오는 기자들이 별로 없다. 오늘 많은 언론사에서 취재를 오는 것은 좋다. 하지만 제대로 보도가 될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며 언론행태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언론이 중요하다. 416일날도 언론만 제대로 보도 했더라면 살릴 수 있었다. ‘전원 구조 오보’, 책임 진 사람이 하나라도 있나? 세월호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왜곡한다. 마치 우리가 보상금을 때문에 이러는 것처럼 보도한다. 언론은 양심선언을 해야할 때다. 언론히 변해야 우리 사회도 변할 수 있다. 그러면 4.16 이후에 멈춰있던 시간도 흘러갈 수 있다”라며 언론의 각성을 촉구했다.


  삭발식이 끝나갈 무렵 내리던 비는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거세게 내렸다재욱이 엄마는 개인적으로 비 오는 것을 좋아한다재욱이가 옛날에 친한 친구들끼리 비가 쏟아질 때 맨몸으로 뛰어나가 개구쟁이 짓을 하며 동영상 촬영을 한 적이 있다그런 상황들을 알고 있으니까 비가 오는 것이 반갑다하늘나라에서 또 모여서 신나게 놀고 있겠구나 싶다실제로 세월호 100, 200, 300일 등 큰 행사 때마다 비가 왔다아이들이 응원을 해주는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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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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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4월이다. 기억하기 괴로운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되어간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시간은 고장난 시계 같다. 사계절의 변화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지난한 싸움 끝에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반쪽짜리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나마도 제정됐다는 사실에 진상규명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시키는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이 입법예고 됐다. 유가족들이 416시간 집중농성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농성중인 광화문 세월호 광장의 풍경을 담아봤다.



  오후 다섯시 경의 광화문 광장, 4월이 되었다고 제법 봄 날씨 같다. 바람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도 이전처럼 외투를 단속하지 않는다. 교복을 입은 중고생들이 세종대왕상 앞에서 셀카봉을 들고 활짝 웃는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사진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의경들은 일사분란하게 이동한다. 그 분주한 사이에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부시행령 폐기하라”, “세월호 선체 인양하라”, “실종자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세요”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멈춰있다.


“시행령안을 폐기하라”

  세월호 유가족들은 지난달 30일 416시간 집중농성을 선언하고 항의행동에 나섰다. 다시 농성을 시작하게 된 배경은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의 입법예고. 유가족들은 “정부의 시행령안은 반쪽짜리나마 만들어진 세월호 특별법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시행령안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나섰다. 장완익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위원은 “특별법의 취지를 완전히 무시한 시행령안에 놀랐다. 법률가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기가 막힌 시행령안이다. 정부가 새로운 입법행위를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독립성 훼손과 위원회 조직 축소

  박주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시행령안은 여당 추천 상임위원인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무처장 밑에 기획조정실장과 또 기획총괄담당관을 편성, 파견 공무원이 맡게 한다. 진상규명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조사1과장 역시 파견된 공무원이 맡게 돼 있다. 정부로부터 파견된 공무원들이 여당이 추천한 사무처장을 보조케 해서 위원회 전체의 업무를 종합 조정하고 각 소위원회의 임무를 기획 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잠재적 조사 대상인 정부부처와 여당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위원회 조직 축소에 대해 “특별법에 따르면 120명 내의 직원을 둘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시행령안은 합리적 이유 없이 출범시 인원을 90명으로 한정했다. 비율 또한 파견 공무원이 다수를 차지한다. 특별조사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입장은 단호하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말도 안 되는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이 전면 폐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시행령안의 폐기를 요구했다. 


매주 수요일 7시,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을 기억하는 미사’가 열린다.


해가 저문 광화문 광장

  해가 지면서 관광객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엔 유가족들이 우두커니 남았다. 저녁 일곱시에는 한국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가 진행하는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을 기억하는 미사’가 열렸다. 지난해 12월 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시작된 이 미사는 세월호 광장으로 옮겨 매주 수요일 7시에 열리고 있다. 세월호 광장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시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그 시각 광화문 바로 앞, 유가족이 자리한 곳엔 촛불이 하나 둘씩 켜졌다. 유가족의 주위를 촛불이 둥글게 감싸 유가족들을 비추고 있다. 바닥에 세워뒀는데 바람이 불어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자세히 보니 다 마신 음료수병, 자양강장제병 따위가 촛불이 흔들리지 않게 받치고 있었다. 문득 이 장면이 바람직한 사회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뜻있는 사람들이 빛을 비추고, 그 빛이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모습.


세월호 유가족들의 주위를 촛불이 밝히고 있다.


  그 곳에서 성빈이 아빠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내 딸은 뭐든 잘 하는 아이였다.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럽지만 전교 1등 하는 딸이었다. 상장도 장학금도 많이 받았다. 판사나 외교관의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며 딸의 핸드폰에서 딸의 사진과 상장, 장학증서를 보여줬다. 눈에 그리움이 그렁그렁 맺혔다. 건강은 어떠냐고 묻자 “여기 몸 성한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런데 아플 수도 없다. 여기서 아파서 쓰러지면 안 된다. 아직 진상규명이 전혀 되지 않았고, 내 딸이 왜 그렇게 죽었는지 모르는데, 아프면 안 된다”고 다짐하듯 대답했다.


  사고 직후의 상황에 대해 “처음에 유족들은 사고 현장에 접근하지 못했다. 계속 못 가게 막았다. 해수부 장관에게 항의해서 해경 순시선을 타고 현장에 갔다. 현장에서 돌아오니 아내한테 연락이 왔다. 사망자 명단에 딸 이름이 올랐다고. 이후 병원에서 애들 신원 확인해주시던 단원고 선생으로부터 우리 딸이 아니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포 중앙병원으로 향했다. 내 딸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성빈이는 29일에 물에서 나왔다. 다른 아이들보다 빠른 편이었다”라던 성빈이 아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신 찾아가면서 나와 줘서 고맙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을 거다. 우리는 나왔으니까 다행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나온 것이 다행인 일인가 싶다”라고 어렵게 말을 이었다. “1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 물속에 있으니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은 오죽하겠나. 세월호 선체는 꼭 인양돼야 한다. 이런 기사나 좀 써라. 여기서 과거 얘기 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없다. 그 때 생각을 돌아보면 울화만 치밀고, 애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말을 끝으로 성빈이 아빠는 자리로 돌아갔다.


  유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동석했다. 유가족들은 자신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 누구의 엄마이고 아빠일 뿐이었다. 해가 저물고 나니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매트를 깔고 담요를 나눠 덮고 있어도 한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인터뷰를 중단한 것이 마음이 쓰였던지, 성빈 아빠는 가지고 있던 핫팩 하나를 건넸다.


  유가족들 사이에서는 삭발식이 화제다. 집행부를 포함해 최소 20명 이상이 삭발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한다.(실제로는 2차에 걸쳐 70여명이 삭발에 동참했다) “00이 엄마는 두상이 예쁘니까 꼭 해야겠다”, “머리숱 적은 00이 아빠는 하나 안하나 별 차이가 없다”등 서로 농담을 주고 받지만 그 속에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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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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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누군가는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20144월을 잔인하단 단어로 다 형용할 수 있을까? 세월호 1주년. 걷다보니 어느새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손에 들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 겨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광화문에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봄을 돌려주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목도리 하나는 둘러줄 수는 있지 않을까?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이하 세월호 가족협의회)330일 광화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세월호 선체 인양과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제정안의 철회를 요구했다. 기자회견 이후 청와대 항의 방문을 시도했지만 다수의 경찰 병력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경찰에 막힌 청와대 항의방문

  세월호 가족협의회는 항의 방문하기 위해 청와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세종대왕상 앞에서 지키고 있던 경찰 병력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마치 세종대왕이 앞길을 막고 있는 듯 보였다. 괜히 세종대왕에 화가 났다. 가족협의회 일부는 경찰 병력이 막지 않는 곳을 뚫고 광화문 앞까지 나아갔다. 그 이상은 넘어갈 수 없었다.


  50여명 남짓의 유가족들을 막겠다고 나선 병력은 세 배는 족히 되어보였다. 병력이 디귿자로 가족협의회를 감쌌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바쁜 걸음을 재촉했으며, 또 누군가는 잠시 서있었다. 외국인들은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광화문으로 나아가려던 한 시민과 경찰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50대 남성으로 보이는 그는 왜 자꾸 따라오냐? 경찰이면 다냐? 움직일 자유가 내게 있는 것 아니냐며 경찰에 따져 물었다. 경찰은 당신이 자꾸 넘어가려 하니까 그러지라며 대꾸했다. 따라오지 말라는 남성을 경찰은 결국 세종대왕상까지 따라갔다. 그를 따라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경찰이 광화문 가는 길을 막기에 뒤돌아서 농성장으로 가려했다. 그 순간 경찰 여섯 명이 따라 오더라.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울분을 토하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재근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은 대통령께 면담을 요청하기 위한 청와대 항의 방문일 뿐 가두시위나 행진이 아니라고 행사의 성격을 확실히 규정했다. 그런 연유로 경찰이 막아선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 공동상황실장은 경찰이 계속 막더라도 그 자리에 앉아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또 청와대로 가기 위해 날마다 항의행동을 계속할 것이라며 의지를 밝혔다.


  이 공동상황실장은 가족들이 왜 또 광장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는지 (국민들이) 잘 모르고 계신 것 같다. 특조위 조사권을 무력화 시키는 시행령 폐기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광장으로 나오게 됐다고 세월호 가족협의회가 광장으로 다시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대통령 면담을 요청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힘이 절실하다. 411일부터 추모주간을 선포, 촛불집회(11)대규모 추모문화제(16)범국민 대회(18) 뿐만 아니라 1주기를 맞아 전국에서 다양한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국민들의 참여를 부탁했다. 끝으로 우여곡절 끝에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됐는데, 특별법이 제대로 시행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며 언론이 더욱 관심을 갖고 올바르게 보도할 것을 촉구했다.

 

그래도 아직 희망 갖는다

  시민단체 간사인 조은씨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민들에 유인물을 건네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면 광화문 농성장에 찾아와 일을 돕는다고 밝힌 그는 시행령 제정안 철회와 세월호 선체 인양 등 문제들이 하루 속히 해결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반대 주장을 가질 수는 있지만, 농성장에 찾아와 유가족들에게 욕을 하는 분들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며 관용의 정신을 요구했다. “하지만 몇 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유인물도 잘 받아 주시고, 다른 유인물과 달리 길바닥에 버리는 분들도 많지 않다그런 모습을 볼 때 아직 우리 사회에 희망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바닥에 나뒹구는 유인물이 없었다.



가족협의회는 왜?

  세월호 가족협의회는 왜 다시 광화문 농성장으로 나왔을까? 가족협의회는 지난 327일 해양수산부가 입법예고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제정안은 특별조사위원들이 제안한 시행령안을 완전히 묵살한 전혀 새로운 안이라고 소리 높였다.


  이들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을 정부가 조사한 것에 대한 검증 수준으로 축소 위원장과 위원들의 위상과 역할을 약화 사무처의 인력과 예산을 축소하고 위원회 사무처의 주요 직책을 정부 파견 고위 공무원이 장악했다며 조사대상이 되는 기관의 공무원들이 특조위를 사실상 통제하는 법안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세월호 특별법과 특조위의 조사권을 무력화시키는 시행령이라며 즉각 철회를 요구했다.


  세월호 가족협의회는 또한 특별법을 무력화하는 이런 초법적이고 불법적인 시행령안을 일개 부처인 해양수산부가 단독으로 마련했을 리 없다청와대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독립적 국가기구의 시행령이 아니라 청와대가 작성한 진상규명 통제령이며 간섭령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박근혜 정부가 특별법 시행령 논의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세월호 인양 약속에 대해서도 손바닥 뒤집듯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며 세월호 선체에 대한 온전하고 조속한 인양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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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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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31일은 세월호가 침몰한 349일째 되는 날이었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의 딸 예은양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지도 349. 그의 시계는 아직도 2014416일에 멈춰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해 그는 오늘도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차가운 바닥에 앉아있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을 만난 건 광화문, 저녁 일곱 시가 넘어갈 무렵이었다. 낮에 한차례 비가 내린 탓에 조금 쌀쌀한 날씨였다.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덤덤히 이렇게 지낸다는 유 위원장. 그 앞에 어둠이 내려앉은 광화문 광장이 펼쳐져 있다. 광장의 돌바닥에 그대로 앉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찬기운이 올라오는 그 자리에 앉은 모습이 묘하게도 편해보였다. 1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 했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건강은 괜찮은가.

  건강이야 당연히 안 좋다. 계속 밖에서 생활하다보니 여기저기 아픈데도 생기고. 그래도 몸 아픈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세월호 사고가 벌써 1주기를 맞는다.

  1, 저희한테는 그런 감각이 없다. 시간이란 감각을 잃은 지 오래 돼서, 그게 1년인지 10년인지 그냥 똑같은 날들의 반복일 뿐이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입장에선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하다. 1년이란 시간이 원래 어느 정도의 길이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 416일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세월호 유가족들은 2014415일까지 삶을 살았던 거고, 416일부터는 살아있지 않다. 참사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고통 속에 갇혀있다.

 

예은이는 어떤 딸이었나.

  그냥 내 딸이다. 어떤 딸이었냐 따지기 전에 그냥 내 딸이다. 내 목숨보다도 귀한 내 딸. 그것뿐이다. 가수가 되는 것이 예은이의 꿈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에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한테 예쁜 모습을 남겨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프로필 사진을 포함해서 예은이 사진이 핸드폰에 잔뜩 있다. 그런데 안 본다. 못 보겠다.

 

사고 이후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가.

  아내는 지금 광화문 광장에 같이 나와 있다. 나보다 더 힘들거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엄마니까.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니까. 그 고통을 가늠할 수도 없다. 예은이한테 쌍둥이 언니가 있다. 우리 하은이(쌍둥이 언니)는 말로 표현은 잘 하지 않아도 엄마 아빠보다도 더 많이 힘들거다. 쌍둥이는 항상 티격태격 한다. 그러다가도 가장 친한 친구처럼 서로를 의지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함께 있었으니 세상 누구보다도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1년이 지났지만 하은이는 아직 적응을 잘 못하는 것 같다. 새벽마다 운다. 보고싶다고. 나도 아내도 같이 운다.

 

하은이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하은이가 부쩍 더 열심히 공부하고, 매사에 열심이다. 표현하지 않아도 아빠 눈에는 마음이 다 보인다. ‘예은이 몫까지 해야지, 예은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언니가 돼야지하는 다짐이. 그렇게라도 집중하면 그 시간동안 동생 예은이를, 아픈 기억을 잊을 수 있으니까. 1년간 스스로 이겨내기 위해서 무던히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대견하고, 고맙다.

 

세월호 이후 1, 언제 가장 힘들었나?

  지난 1년간 많은 일이 있었다.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게 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이를 찾으려고 팽목항에서 진도앞 바다에서 헤맸던 일들, 그때 목격했던 말도 안되는 일들, 예은이를 다시 찾았을 때 그 얼굴, 차가운 손의 감촉도 다 생생하다. 돌아와서 미안한 아빠지만 부끄러운 아빠는 되지 말자고 다짐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내자고 달려들었을 때 그 다짐은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특별법 만드는 과정에서 단식하고 농성하고 도보행진 하고 별 짓을 다 했는데 그 과정도 다 기억이 난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무엇을 했고, 무슨 어려움이 있었고, 무엇 때문에 울었고. 그런데 아쉬운 건 이 1년이란 시간동안 숱하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어느 하나도 우리를 웃게 해준 일이 없다. 우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준 일은 없었다. 언제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 할 수가 없다. 매일같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니까. 오늘도 마찬가지고.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의 항의는 어떻게 해결되었나?

  해결이 된 건 없다.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지금 이렇게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자리를 잡았는데 내려올 이유가 있나. 우리는 농성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 면담 요청을 하고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농성을 할 계획이었다. 전혀 납득되지 않는 이유로 막히게 되면서 청운동까지 가게 됐고, 12일간 농성을 하다 내려왔다. 해결이 된 게 아니고 자진해서 내려온 것이다.

 

아직 아홉 분의 실종자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선체 인양도 아직 되지 않았다.

  선체 인양에 대한 국민의 여론은 여전히 관심이 많다. 어제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62%의 국민이 비용에 관계없이 선체 인양을 해야 한다고 뜻을 보여주셨다. 이건 정말 놀라운 수치다. 정부나 여당은 세월호 인양에 대한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가능한 한 인양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려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가 넘는 국민들이 인양을 지지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시신일지언정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서 가족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다. 그것을 미루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의 정부이기를 부정하는 것 밖에 안된다.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비용도 정부에서 주장하는 것만큼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세월호 인양을 통해 아홉 분의 실종자들이 하루 속히 가족분들의 품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호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책임지는 안전한 사회 건설. 이것이 세월호 특별법의 목적이다. 이번에 세월호 선체를 인양하고, 아홉 분의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를 정상적으로 풀어가면 정부에 대한 신뢰, 안전에 대한 믿음이 쌓일 것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정부에서 왜 놓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부는 왜 선체 인양을 하지 않는다고 보는가?

  단정적으로 말을 할 수 없다. 여태까지 정부는 인양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물론 인양을 하겠다는 말을 한 적도 없다. 그러니 왜 인양을 안 하는지 거기에 대해 뭐라 이야기 할 뚜렷한 근거가 없다. 그냥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다. 인양을 할 경우에 무언가 이 정부에 부담이 되는 거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세계 경제10대국인 대한민국에서 세월호 한 척 인양하지 못한다는 것은 납득이 되질 않는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4월 2일 삭발식에 앞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광화문 농성장에 시민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세월호가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다. 얼마 전 여론조사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관심도를 물어봤을 때 관심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70%가 넘었다. 참사 직후에 거리로 광장으로 나와주셨던 뜨거운 행동으로 보여준 열기는 식었다고 볼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국민이 1년 내내 거리로 나올 수 있나? 더 중요한 건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을 국민들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국민들을 만날 때마다 느낀다. 관심이 식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변화했을 뿐이다. 1주기를 앞두고 국민들이 저희에게 보여준 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까지 돕겠다고 성원해준다.

  참사 이후 안전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는데, 세월호 사고이후 대한민국이 안전해졌다고 생각하느냐는 여론조사에 80%가 넘는 사람들이 안전해지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안전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겪고 나서 안전 문제를 여실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새정치 민주연합을 비롯한 야당에 대해.

  새정치 민주연합은 사실 1년간 노력 많이 했다.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의 편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항상 애를 써준 의원들도 많다. 문제는 항상 아쉬운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정치 구조에서 야당의 현실적 어려움을 부정할 순 없지만, 너무 쉽게 타협해주고 양보해준 것 같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못하는 모습이 아쉽다. 협상의 한계를 너무 쉽게 인정하는 것 같다.

  정의당의 경우에는 워낙 소수 정당이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그 정도의 소수 정당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본다. 특히 세월호 사고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서 배제됐기 때문에 정의당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적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애쓴 분들께는 감사하다.

 

새누리당에 대해 묻겠다.

  새누리당에도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의원들이 있다. 야당보다 그 비율이 낮지만. 새누리당의 경우에는 당차원에서의 결집력, 결정된 사항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좋다. 문제는 그 방향이 우리 가족들의 생각과 정반대 방향이라는 점에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런 모습들이 피해자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세월호 사고를 단순 교통사고로 표현하고, 피해자 가족들이 정치투쟁을 하는 것처럼 몰아간다. 국민을 편가른다. 정부여당에 우호적이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여당이 결정해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 아쉬운 건 우리니까.

 

팽목항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 중인 이호진씨 부녀의 근황이 궁금하다.

  직접 연락한 지는 꽤 됐고, 다른 가족들을 통해 소식은 전해 듣고 있다. 근황이야 뻔하다. 도보행진을 해본 사람의 입장에서 그 고통이 눈앞에 선하다. 더욱이 삼보일배 도보행진을 하는데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중단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으면 좋겠다. 지금 속도로 하면 올 가을이나 돼야 도착한다. 같은 가족의 입장으로 가족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향후 계획을 말해달라.

  지금 당장은 416시간 집중 행동 농성을 하고 있다. 목적은 두 가지다. 우선 말도 안 되는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안이 전면 폐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폐기만이 목표다. 두 번째로는 정부가 세월호를 인양하겠다는 입장을 1주기 이전에 밝히는 것이다. 진상조사 된 것도 없는데 최소한 그 약속은 받고 1주기를 맞아야하지 않겠나.

 

어떤 문제가 해결 돼야 집에 돌아갈 수 있나?

  난 돌아갈 집이 없다. 내 집에는 예은이가 있어야 한다. 예은이가 없는 집은 건물일 뿐이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좀 덜 미안한 엄마 아빠가 되어 예은이를 만나러 가는 것이 목표다.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예은이한테 갈 수 있는 것. 지금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 왜 예은이가, 우리 아이들이 거기서 죽어야했는지. 그 진실을 밝혀야 예은이를 만날 수 있다.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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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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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세자를 주인공으로 한 SBS 드라마 '비밀의 문'이 지난 주 시작되어 4회까지 방영되었다. 지난 8월 부터 방영을 시작한 동시간대 MBC 드라마 '야경꾼 일지'와 거의 비슷한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시작이 좋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긴 한석규씨가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든 비정한 아버지로 기억되는 영조를 어떻게 연기할 지도 많이 기대가 된다. 

비밀의 문

 

  '비밀의 문'은 '맹의'를 둘러싼 갈등으로 시작된다. '맹의'는 영조(한석규 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형 경종을 몰아내기위해 노론의 영수 김택(김창완 분)과 결탁한다는 내용이 담긴 서약서이다. 왕위에 올라서도 '맹의'라는 아킬레스건 때문에 노론이 반대하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조는 10년전 '맹의'를 불 태워 버리려 했으나 현재에 나타나서 다시 영조의 목을 노린다. 그러던 중 세자 이선(이제훈 분)의 초상화를 그리는 예진화사이자 세자의 유일한 벗인 신흥복(서준영 분)이 '맹의'를 둘러싼 싸움에 휘말려 살해당한다. 드라마는 신흥복의 억울한 죽음의 비밀을 풀고자 하는 세자와 이 사건의 비밀이 밝혀짐과 동시에 세상에 나오게 될 '맹의'의 존재를 감추기 위하여 신흥복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이려는 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끌어가고 있다.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감추려는 자의 싸움은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소재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의 문'을 마음 편히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벌써 5개월이 넘게 이런 일이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세자는 이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기 위하여 특별검협본부를 설치하여 병조판서 홍계희(장현성 분)에게 수사를 지시하지만 영조와 김택의 압박으로 홍계희는 엉터리 수사 결과를 내놓는다. 세자의 스승이자 소론의 실세인 박문수(이원종 역)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지려 하지만 그가 가진 힘은 진실을 파헤치기에 역부족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5개월간 보여준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모습과 드라마의 노론 소론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지점이다.

 

   드라마를 통해 작가가 세상에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3회에 나온 서지담(김유정 분)의 아버지 서균(권해효 분)과 부용재 행수 운심(박효주 분)의 대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담을 걱정하여 지담이를 야단쳐두라는 운심에게 서균은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와 그 유족이 안타까워서 진실을 밝혀 보겠다는게 뭐가 문제야. 우리 지담이 문제 없어. 문제가 있다면 자식 놈 귀한 뜻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이 못난 애비가 문제고 진실이나 정의 따위엔 관심조차 없는 이 험한 세상이 문제인게지"라고 따지 듯 대답한다.

비밀의 문

 

  세월호 사건이 있은지 5개월이 훌쩍 넘어갔지만 여전히 그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맹의'가 드러나면 안되는 영조와 노론 무리 같이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면 안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는 세자와 서지담만이 신흥복의 억울한 죽음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지담은 사실상 신흥복의 죽음과 전혀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죽음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노출시키고 있다. 필자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 분위기를 돌아보게된다. 5개월 동안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지났으니 덮어두자고 한다. 마음만 아프고 진실은 밝혀질리 없으니 힘빼지 말자고도 한다. 산사람은 살아야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말까지 꺼내면서 지금 불경기의 책임을 세월호 희생자 및 유가족에게 떠넘기고 있다. 필자가 드라마를 드라마로만 즐기면서 보지 못하는 까닭이다.

 

p.s.

  4회에 나온 지담이와 서균 부녀의 대화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정인 허정운(최재환 분)을 잃은 친구 춘월에게 이불 덮어 주고 나온 지담은 서균에게 아래와 같이 말한다.

 

지담 : 이불 덮어주고 왔어. 해줄수 있는게 그거 밖에 없더라구. 아부지 사람이 뭐야? 사람답게 사는건 어떻게 하는거야?
서균 : 지담아 그건...
지담 : 억울하게 정인 잃은 친구에게 뭘 해야 사람이지? 적어도 이불 덮어주는 것 보단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수 있어야, 그래야 사람아냐?
서균 : (한숨)

 

  억울하게 가족과 친구들을 잃은 이에게 뭘 해야 사람인가? 어떻게 해야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반동 분자 딱지 붙이고 아들 딸 팔아 신세 고치려 한다는 유언비어는 퍼뜨리는 자들이 사람이 아님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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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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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친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지 4개월이 지나갔지만 세월호에 대한 의문들은 해소가 되기는 커녕 커져만 가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화도 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마음이 지친다. 멀리서 사건이 해결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만 보고 있는 필자 같은 사람도 지치는데 세월호 유가족들과 그들을 도와서 세월호 특별법을 통과시키려는 변호사들 포함 자원봉사자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40일 단식하고 병원으로 실려간 유민 아빠 김영오씨와 20일째 단식중인 가수 김장훈씨를 비롯한 문화 예술인들, 그리고 문재인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의 몸과 마음은 얼마나 지쳤을까?


  필자의 어머니가 아침에 지인이 보낸 카톡메시지라며 필자에게 이게 맞는 소리냐고 물었다. '새민년이 제출한 특별법대로면 또 다른 특권층이 생긴다는 지적'이라는 글이었다. 필자의 어머니는 지금까지 두번 같은 카톡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어제 아줌마들 모임에서 이 얘기를 한 아주머니가 꺼내길래 필자의 어머니가 이게 사실이겠냐고 일축하셨다고 한다. 그 내용을 읽어보니 세월호 유가족들은 아이들 죽음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파렴치한으로 몰아가는 거짓말 투성이었다.


   이 글의 내용을 옮기는 자체가 또 다른 유언비어 유포가 될까봐 전문을 싣지는 않겠다. 이 글은 새정치민주연합과 새누리당이 제안한 세월호 특별법 내용을 짜깁기하거나 세월호 특별법에 들어가있지 않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글에는 세월호 특별법에 가족 생활안정 평생지원에 더해서 TV 수신료, 수도요금, 전기요금, 전화요금 등의 공공요금 감면과 상속세 및 양도세 등 각종 조세감면 혜택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마치 이것이 유가족들이 주장하는 내용이고, 지금 세월호 특별법이 여야 원내대표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인양 설명하고 있다. 이에 더불어 이 법이 통과되면 대한민국에 재벌 부럽지 않은 특권층이 생겨나게 된다며 세월호 특별법을 막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이미 지난달에 이와 비슷한 카톡문자를 심재철이 전달한 것이 알려져 논란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 내용이 더 악날해지고 거짓말이 더 붙었다. 누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가? 그 목적은 세월호를 정쟁으로 이념논쟁으로 끌고가서 국론을 분열시키려는 것이다. 글의 마지막은 그 목적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런 특별법이 통과되면 재벌 부럽지 않은 특권층이 생겨난다는 거다. 이미 특권층에 뺏길수 있는 것은 모두 뺏긴 계층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는 거다. 실제로 이 문자를 전달한 필자 어머니의 지인은 이전에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했는데 이제는 반대 서명을 해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진짜 이쪽 방면으로는 뛰어난 새끼들이라는 생각이든다.


  인터넷 검색 한번만 하면 드러날 거짓말을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 필자의 어머니의 답은 간단했다. 어머니 세대는 검색하는게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저런 말이 안되는 내용을 보고도 이상하다고 느끼고 사실인지 알아보고자 하는 의지나 능력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이런 악성 마타도어는 고연령대 아줌마들을 매개로 퍼져나가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이 원하는건 보상이 아니다. 보상을 원했다면 40일 단식하며 자신의 몸을 버릴 일도 없다. 돈 몇푼 벌겠다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람이 어디있는가? 게다가 국민들이 성금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한 유가족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가족의 요구는 단 하나 진상규명이다. 그것을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진상조사위원회에 달라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희생되어야했는지 그것을 알아내자는거다. 책임있는 사람들 처벌하고 국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면 고쳐서 다시는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유가족의 바람이다. 박근혜의 사생활을 캐내자는 것도 아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국정최고 운영자의 판단이 어떠했는지, 보고는 적절했는지 확인해서 고치자는 거다.


  국민이, 그것도 억울한 참사의 유가족이 단식을 하는 나라는 진짜 세계 어디에도 없다. 유가족이 40일 단식하고있는데 모른채 하는 정부는 북한과 대한민국 두 나라 밖에 없을 거다. 부끄러운일이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이 일과 무관한듯 자신은 모든것을 잊은듯 행동한다. 유가족이 원하면 언제든 만나겠다던 약속은 5월이후 지켜진 적이 없다. 정말 세월호 유가족들을 죽이려는 것인지 묻고싶다. 교황에게 유가족을 위로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이 그냥 해본 말이 아니라면 이렇게 모른척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박근혜씨의 결단이 없이는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는 문제는 새누리당에서 절대로 받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유가족을 살릴 수 있는 것은 박근혜씨의 결단 밖에 없다. 박근혜씨의 결단을 이끌어 내는 것은 국민들의 압박 외에는 방법이 없다. 우선은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을 보면 틀렸다고 얘기해주자. 끝까지 우기면 싸우자. 그리고 지치지더라도 세월호에서 관심을 거두지 말자. 힘들어도 끝까지 지켜보고 목소리를 내자. 그것이 억울하게 죽어간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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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조약돌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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