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들과 박찬호 선수와의 작별인사가 올스타전이 열린 광주에서 있었다. 2012년 고향 무대에 돌아와 한 시즌을 마무리하고 은퇴 선언을했으니 늦어도 많이 늦은 작별인사였다. 늦게나마 은퇴식을 갖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선수협의 발상과 올스타전에서 선수 은퇴식이 전례가 없다며 난색을 표했던 KBO 나름의 유연한 대응 덕분이었다. 은퇴식 행사는 심플했다. 박찬호 선수는 시구자로 마운드에 올라 덤덤하게 공 하나를 던졌다. 특별했던 것은 김경문 NC 다이노스 감독이 시포자로 공을 받은 것이다. 상패·액자 등을 선물받고, 간단한 작별의 인사를 팬들에게 전했다.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각기 다른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헹가레를 하는 장면이었다. 그 만큼 박찬호 선수를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이 또 있을까. 수많은 후배들이 그를 보면서 꿈을 꿨고, 지금 한국 프로야구의 주축으로 성장해 올스타라는 이름으로 그를 높이 들어 올린 것이다. 다만, 선수들이 모두 61번을 등에 새기고 출전 하는 등 작지만 상징적인 부분들을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박찬호 은퇴식


  박찬호 선수 은퇴식 관련 기사에 'IMF 때 힘이 많이 됐다'는 댓글이 달렸다. 그 글에 누군가가 또 댓글을 달았다. 요지는 'IMF 그만 팔아먹어라. 당시 박찬호 보면서 희망을 얻은 사람 아무도 없다. 내 회사가 부도나는데 야구 보겠나, 그것도 오전에 하는 야구를' 정도다. 일견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대기업들이 도산하며 수많은 중소기업들도 줄도산 하던 시절, 지갑을 닫은 소비자들로 인해 슈퍼·식당 등의 소규모 자영업자들 까지도 망연자실하던 시절 그깟 공놀이가 뭐라고 희망을 얻겠나. 하지만 인간이란게 참 신기한게 그 공놀이에서 희망을 보더란 말이지. 박찬호 선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양놈들과 싸우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응원하게 되는 것은 그에게 우리 자신을 투영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스포츠 응원은 대리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필자의 이야기로 마무리하자. IMF 당시 어렵지 않은 집들이 얼마나 있었겠나. 당시 중학생이던 필자의 어머니는 이발비를 아끼기 위해 집에서 깎아줬다. 못나게 깎을까 조심조심 깎다보면 결국 바가지머리가 됐다. 선생들이 교칙 위반이라며 혼을 내면 그렇게 서럽더라. 이발소에서 반듯하게 깎은 스포츠 머리가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마음이 모나다 보니 교우 관계도 매끄럽지 못했다. 쉬는 시간, 박찬호 선수의 경기를 잠깐이나마 보는게 낙이었던 것 같다. 박찬호 선수, 고마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박찬호 은퇴식 시구


사진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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