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가족들이 광화문 광장에서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세월호 1주기, 추모를 해야 할 기간에 농성을 하게끔 만드는 정부가 유가족들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번엔 2학년 3김도언 학생의 어머니를 만나봤다.


4월 3일. 광화문 광장 퍼포먼스

 


우리 도언이는

  엄마가 기억하는 도언이는 구김 없고, 정의감 있는 아이였다. 집에서는 동글동글 도언이라고 불렀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동그란 안경을 썼기 때문. 성격도 동글동글해서 친구도 많았다. 바른생활부 활동도 하고, 연극도 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던 아이였다. 1학년 때는 연극을 해서 금상을 받아오기도 했다. 전교에서 도언이를 모르는 친구들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피아노 연주도 잘 하고, 춤도 잘 추고, 사물놀이도 잘 하고. 다방면에 재능이 있던 도언이. 엄마, 오빠, 이모, 사촌오빠들 까지 6명이 한 팀이 되어 사물놀이 봉사를 다니기도 했다. 엄마는 그때 그 시절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도언이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누구보다 친근한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과 소통하고 싶어했다. 누구보다 선생님을 잘 따르는 아이기도 했다. 그 또래 아이들이 선생님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다반사. 하지만 도언이는 진로와 관련해서는 꼭 선생님하고 상담했다. 선생님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난 뒤 다은이 친구들로부터 알게 된 사실 하나. 친구들 사이에서 상담사로 통했다는 것. 고민이 있는 친구들은 항상 도언이에게 이야기를 했다. 도언이는 친구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조언도 해줬다. 친구의 비밀을 다른데 가서 떠벌리는 성격도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아이였다. 외가쪽에서 막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어른을 만나면 배꼽인사를 할 정도로 예의가 바른 아이였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 딸을 잃었으니, 엄마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하다.

 

  아들은 든든한 맛이 있고, 딸은 살가운 맛이 있다. 도언이 오빠도 있지만 도언이는 특히 친구 같은 자식이었다. 도언이랑 커플링도 맞췄다. 도언이가 엄마를 졸라서 맞추게 된 것. 도언이는 학생들 하는 티타늄 같은 것으로 하려 했는데, 엄마의 제안에 화이트 골드로 맞췄다. 도언이는 그 커플링을 항상 손에 끼고 다녔다. 엄마와 교감하는 징표였다. 지금 반지는 평택 추모공원에 도원이랑 함께 있다.


  도언이는 엄마의 살아가는 낙이자 의미였다. 항상 도언이를 끼고 잤다. 자다가도 뽀뽀하고, 만질 정도로 엄마와의 스킨십에 스스럼이 없을 정도였다. 도언이가 잘 때 볼을 만지면 ~하면서 잠투정을 했다. 그러다가도 엄마야하면 안도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또 엄마가 이불을 안 덮고 자면, 조심히 이불을 덮어주던 속 깊은 아이. 그런데 지금은 손을 대도 없으니 미칠 노릇이다. 자다가 습관적으로 손을 뻗는데, 그 곳에 도언이가 없다. 엄마는 자신을 너무나 닮은 딸의 사진을 휴대폰에 저장해 놓았다. 포토샵으로 수정을 하지 않아도 예뻤던 딸. 하루 종일 그 사진을 보고 있어도, 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지난 1년의 기억

  도언이가 나오기 전까지, 물에서 시신이 올라오면 가족들이 확인을 하러 가야했다. 특이사항이 도언이와 비슷한 여학생의 시신이 건져질 때마다. 마음 약한 엄마가 무너질까봐 도언이 오빠가 그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오빠라고 하지만 아직 20대 초반, 시신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힘든 내색하지 않고 감당해냈다. 그 슬픔과 분노가 어느 정도의 크기일지, 엄마도 가늠하지 못한다.

 

  오빠는 제대로 된 심리치료도 받지 못하고 작년 6월 군에 입대했다. 연기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17년간 함께 살았던 동생이 죽었는데,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가족들의 곁에 남아 힘을 보태려 했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설득했다. 제대하고 나왔을 때도 엄마 아빠가 밝히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때 행동하라고 했다. 권리는 보호해주지 못하면서 의무를 강요하는 나라가 싫었지만, 의무를 다 해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입대하는 아들이 엄마는 걱정됐다. 혹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돌발행동을 할까봐. 그랬을 때, 혹시나 세월호 유가족 전체가 욕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 여느 엄마들 같았으면 몸 건강하란 말하기에도 바쁜 그 시간, 엄마는 군대에서 문제 일으키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아들이 입대한 지 벌써 10개월이 지났지만 면회 한 번 찾아가지 못한 것이 엄마는 못내 미안하다. 그런 상황을 만드는 정부가 밉다. 아들은 1주기에 맞춰 휴가를 나온다. 휴가 나온 아들을 위한 음식 장만할 시간도 없는 현실이 엄마는 또 미안하다.

 

  엄마는 동네에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전에는 편하게 하던 행동들도 조심하게 된다. 주위 시선을 자꾸 의식하게 된다. ‘딸을 잃었는데 저렇게 행동해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동네 슈퍼도 가지 않고, 세탁소도 가지 않는다. 사고에 대해 물어볼까봐, 부담스럽다.

 

  이런 이유로 유가족분들 중에는 이사를 하신 분들이 많다. 도언이네도 이사를 하려고 생각했다.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의 반대로 없던 일이 됐다. 아빠는 도언이 흔적이 남아있는 집을 떠나기 싫다. 도언이의 흔적이 남은 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사는 것도 싫었다. 도언이 방은 그대로 뒀다. 책상, 침대, 옷장도 그대로 뒀다. 도언이 신발, 우산 할 것 없이 도언이가 사용하던 모든 물건도 모아뒀다. 학교에서 신던 실내화도 집으로 가져왔다. 심지어 사용하던 칫솔도 그대로 뒀다. 그런데 도언이만 없다. 그래서 물건들로 가득찬 그 방은 엄마에게 그저 빈 방이다.

 

  돌아온 도언이의 생일. 엄마는 생일상을 집에서 직접 차렸다. 살아 있을 때도 항상 집에서 생일상을 차려줬으니까. 도언이가 좋아하던 김치찌개, 카레, 튀김, 잡채 등 한 상 차렸다. 김치찌개는 특별히 아빠가 끓였다. 도언이가 아빠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좋아했기 때문. 생일상을 도언이 책상 위에 차려줬다. 다른 부모님들은 함께 생일잔치를 하고, 서로 챙겨주기도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도언이 생일은 우리 가족끼리 있고 싶었고, 다른 가족들을 만나면 더 아플 것 같았다. 그리고는 도언이가 있는 평택 추모공원에 다녀왔다.

 

  엄마는 도언이가 매 순간 그립고, 또 그립다. 특히 아침에, 애들 학교 가는 시간에 생각이 많이 난다.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미어진다. 매일 데리고 등교하던 기억이 떠올라 더 힘들다. 오전 여섯시 반, 도언이랑 함께 집을 나서던 그 시간. 엄마는 또 도언이 방에서 눈물을 훔친다.


4월 5일. 안산~광화문 1박2일 도보행진을 마친 유가족들

지난한 싸움

  사고가 난 뒤 엄마는 운영하던 가게를 닫았다. 진행하던 건강 관련 강의도 접었다. 도언이의 장례를 치르고,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슬렀다. 지난 6월이었다. 엄마는 아빠랑 진도 체육관, 팽목항을 돌아다녔다. 음식 싸들고,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다녔다. 도언이 친구들이고, 선생님이니까. 수중수색이 종료될 때까지 그렇게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엄마 아빠도 위로를 많이 받았다.

 

  엄마는 연약하지 않다.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1920일 동안 도보행진을 했다. 물론 힘들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것조차 힘든 순간도 있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그 물집이 터지고. 근육통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는 도언이 생각하면서, 실종자 분들 생각하면서 걸었다. 아침이면 근육 이완제를 먹었다. 저녁이 되면 파스를 붙이고. 아침에 또 일어나면 힘들지만 약 먹고, 함성 한 번 지르고, 힘을 얻어 걸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겠지, 정부에서 세월호 인양 등 문제를 해결해주겠지. 기대하며 걸었다.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 전국에서 4000명이 넘는 분들이 유가족들을 맞이했다. 도보행진은 학부모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언론에서는 보도해주지 않았다. 제대로 보도했다면 현재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추모기간에 쓰레기 시행령안이나 배·보상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가족 마음을 제대로 전해줬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할 것을 요구했다.

 

교육계 변화해야

  엄마는 세월호 이후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계는 세월호 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교육청의 허가를 받고, 학교에서 아이들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겠다고 인솔하고 갔지만 지켜주지 못했다. 엄마는 학교를 믿고 애들을 보냈다. 하지만 아직 교육부는 변화지 않고 있다.

 

  “아이들 안전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교과서적인 내용 말고 실제 위험이 닥쳤을 때, 생명을 지키는 방법과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또한 세월호의 진실을 가르쳐야한다. 세월호 사고의 원인과 현재 과정을 알려줘야 한다. 진실을 알아야 아이들이 행동할 수 있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엄마는 교육청 등 교육계와 연계된 활동을 많이 한다. 지난 1일과 2일 도언이 엄마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청년 문화 콘서트 기억과 약속에 참석했다. 1일에는 약 1200명의 청년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월호 사고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2일에는 의정부에 있는 북부 청사에서 교장선생님, 교육부 직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교장선생님들 모시고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경기도 이재정 교육감이 추진한 덕분에 마련된 자리였다. 세월호에 대해, 교육부의 부패, 세월호 이후 달라져야할 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 일정 때문에 엄마는 삭발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마음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오는 길에 유가족들이 단체삭발식 하는 모습을 인터넷 생중계로 봤다. 너무 마음이 미어졌다. 유가족들이 삭발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그렇게 몰아넣는 정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1주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추모기간에 추모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부는 느닷없이 배·보상 이야기를 꺼냈다. 돈을 흔들며 유가족을 모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론은 분별없이 배·보상에 관련된 뉴스만 보도했다. 마치 우리가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나선 것이 더 많은 보상을 받아내기 위함인 것처럼 비쳐지게 만들고 있다.


4월 6일. 광화문 촛불 문화제

도언이만을 위해 울고 싶다

  비가 오면 엄마는 제일 먼저 도언이 우산이 생각난다. 도언이는 노란, 빨간, 하얀 우산 세 개를 준비해두고 옷에 맞춰 들고 다닐 정도로 멋쟁이였다. 우산에는 예쁜 공주 도언이라고 표시해 두었다. 우산 뿐만 아니라 자기 물건에는 꼭 예쁜 공주 도언이라고 표시를 했다. 하늘나라에도 비가 올 텐데, 그 곳에서 우산은 쓰고 있을까. 도언이 우산은 내가 쓰고 있는데혹여나 비를 맞고 있지 않을지 여느 엄마와 같은 걱정을 한다.

 

  또한 이 비가 침몰하는 대한민국에 단비가 되어주기를 기도한다. 물은 생명이다. 메마른 대지에 비가 쏟아지면 그 토양에서 생물이 다시 살아난다. 메마른 대한민국에 생명을 불어넣는 근원이 되기를 바란다. 하늘에서 아이들이 도와줄 거라고 믿는다.

 

멈춘 시간 움직일 수 있는 건 언론

  그날 모든 시간이 멈춰졌다. 엄마 아빠들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생각도 멈춰버렸다. 작년 416일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게 중요한 사실이다. 애들 희생된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진상을 밝히고자 1년을 버텨왔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멈춘 시간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언론이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지만 국민들도 깨우칠 수 있다. 우리는 그 시계를 움직이게 하려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다.”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데,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다. 언론이 제대로 서있다면 지금처럼 정부에서 추모기간에 배·보상 이야기를 했겠나. 빨리 진상규명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면 온전히 내 딸 도언이만을 위해 울 수 있으니까. 기도할 수 있으니까.”

 

  엄마는 지금 울 수가 없다. 밖에서는 절대 울지 않는다. 울면 지치니까, 지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도언이 방에서 소리 죽여 운다. 엄마는 진상이 규명되고 도언이만을 위해 울 시간이 오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