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광화문 광장에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삭발식이 거행됐다. 이미 아이들과 함께 죽은 목숨, 기꺼이 내던질 각오가 되어있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단원고 희생자 이재욱 학생의 엄마 홍영미씨도 이날 길었던 머리를 다 밀어버렸다. 싹둑 잘린 머리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단원고 이재욱 군의 엄마를 만나봤다.


단원고 故이재욱 군의 엄마 홍영미씨


  재욱이 엄마는 아직 삭발한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화장실 갔을 때 살짝 봤다.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조금 다르더라. 내 머리가 뒤통수가 납작하다. 재욱이도 뒤통수가 납작하다며 낯선 모습 속에서도 아들을 찾았다.


우리 재욱이는…

  엄마가 기억하는 아들 재욱이는 밝고 자유롭고 건강한 아이였다. 재욱이는 워낙 활발해 이런 저런 활동도 많이 했다. 1학년 때는 2학년이었던 누나와 함께 학생회 활동을 했다. 재욱이가 학생회에 들어갔던 이유는 축제를 멋지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 홍보부장을 맡아 제 역할을 충실히 했고, 덕분에 그 해 단원고 축제는 어느 때보다 성공적으로 마쳤다.

 

  대외 활동도 활발했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코스프레 축제에도 3년간 친구들과 함께 쫓아다녔다. 파쿠르 전국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했다. 파쿠르는 주변 환경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극복하는 훈련으로 스턴트맨처럼 벽을 타고 뛰어넘기도 한다. 재욱이는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이면 동아리 모임에 나가 비디오를 찍기도 했다. 홍씨는 사고가 났을 때 동아리 친구들이 많이 찾아와줬다며 분향소에 찾아와 함께 힘들어하고 울어준 아들의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재욱이는 또 애인처럼 살가운 아들이었다. 엉덩이나 팔뚝 같은 데가 튼튼했는데, 엉덩이를 팡팡 때리에이엄마!” 하면서도 엄마와의 그런 스킨십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도 가끔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재욱이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엄마는 속상하다. “재욱이 사이즈만한 인형을 만들까하는 생각도 해봤다며 농담을 해본다.

 

  재욱이는 누나랑 방을 같이 썼다. 나이를 먹어가며 방이 필요해져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지만, 이사를 하게 됐을 때는 이미 사고가 난 이후. 엄마는 재욱이의 방을 꾸몄다. 방에는 평소 사용하던 물건들로 가득하다. 이사를 할 때면 의례 물건들을 버리지만 엄마는 아들의 물건을 작은 것 하나까지 놔두고 올 수가 없었다. 책상도, 옷장도 그대로 뒀다. 모든 게 다 그대로인데 재욱이만 없다. 엄마는 재욱이의 향취를 느낄 수 있을까 가끔 옷장을 열어본다.

 

지옥 같았던 지난 1

  지난 1년 재욱이네 가족의 삶은 지옥 같았다. 운동을 좋아해 건강에 자신이 있던 재욱이 엄마는 건강을 잃었다. 위도 아프고, 소화도 잘 안 된다. 물만 먹어도 살이 붙는다. 순환이 안돼서 그렇다. 세포 활성화가 잘되면서 노폐물들이 땀으로 배출이 돼야하는데 안되면서 결국 피부병이 생기는 단계까지 왔다. 아픈 몸을 이끌고라도 농성장에 나오는 것이 엄마는 좋다.

 

  엄마는 사고 당일의 기억은 떠올리기도 싫다. 그날은 몹시 추웠다. 몸도 추웠지만 마음까지 추웠다. 으슬으슬하고 세포가 떨렸다. 심장이 멎고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심정이었다. 재욱이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엄마니까. 그 순간부터 무너지고 엄마도 같이 죽었다. 그리고 삶의 목표를 잃었다.

 

  사고가 난 직후에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힘들었다. 재욱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정해야하니까. 잊기 위해 잠을 자고, 잊지 못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던 날들이 이어졌다. 재욱이가 좋아하던 치킨·피자를 시켜 먹을 때, 같이 갔던 음식점 앞을 지나갈 때면 잘 먹던 모습이 자꾸 떠오르다. 하루에 수십번은 냉장고 문을 여닫던 아이. 길을 가다 재욱이 또래의 아이가 보이면 가슴이 미어진다. 재욱이와 닮은 곳 하나 없는 그 모습에서도 재욱이가 떠오른다.


  사고 당시에 단원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누나는 상실감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재욱이 뿐만 아니라 250명의 후배를 한 번에 잃었다. 학생회, 동아리에서 친하게 지냈던 후배들도 다 잃었다. 한 달쯤 지나고 나서야 마음을 추슬렀다. 동생의 삶을 대신 살아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예전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절망감을 벗어나야했다. 현재는 어엿한 대학생.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누나로 살기 위해 목표했던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휴대폰 바탕화면에는 교복을 입은 재욱이가 누나와 함께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다. 엄마는 수시로 재욱이의 사진을 본다. 딸아이였다면 더 많은 사진이 남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학생증 사진이 다른 사진들보다 잘 나왔다. 이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사용될 줄 당시엔 누구도 몰랐다. 재욱이의 명예주민등록증에도 이 사진이 사용됐다. 고등학교 2학년 생일이 지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수 있지만, 재욱이는 주민등록증을 받아보지 못하고 떠났다.

 

재욱이의 첫 생일

  지난해 1219. 사고가 난 후 맞은 재욱이의 첫 생일. 먼저 경험한 주변 엄마들이 많이 걱정했다. 거의 매일 아이들의 생일이 돌아온다. 생일을 맞는 엄마들은 미친다. 첫 생일이니까. 아이 장례도 장례지만 첫 생일이 너무 힘들다고 먼저 경험한 엄마들이 위로했다. 평소 꿋꿋한 성격이기에 잘 견딜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1주일 전부터 이유 없이 아팠다. 재욱이 생일을 양력으로 챙겼는지, 음력으로 챙겼는지도 헷갈렸다. 가족들은 양력으로 챙겼다고 하는데, 자꾸 음력으로 챙겼던 것만 같았다. 불과 1년 전에 챙긴 생일인데. 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생일날 아침엔 미역국, 생선구이, 피자 등 재욱이가 좋아하던 것으로 상을 차렸다. 생일상을 가족끼리 함께 나눠 먹고, 납골당·분향소에 들러 다시 상을 차렸다. 재욱이 친구들도 찾아왔다. 재욱이랑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닌,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아이들이었다. 재욱이도 단원고에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독수리 5인방 엄마 아빠들도 재욱이의 생일을 함께 챙겨줬다. 독수리 5인방이란 재욱이랑 1학년 때 친했던 친구들 부모의 모임. 아이들은 2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라졌지만 똘똘 뭉쳐서 잘 다녔다. 그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애들 장례를 치르고 나서 5인방 부모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누구보다 서로의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주 모인다.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많은 위안을 받는다. 그렇게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다. 아이들 때문에 맺어진 부모들의 인연이 지금은 살아가는 동력이 됐다.

 

바라는 건 오로지 진상규명

  지난 1년간 세월호와 관련돼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가족들이 바라는 건 진상규명과 참사 이전과는 다른 안전한 대한민국 건설. 재욱이 엄마는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 이 두 가지만 옳은 방향으로 결정이 됐으면 삭발까지 할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모든 것들이 유가족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건지고, 장례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애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했는지 알아야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 움직이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경우를 목격하고 경험했다. 시간만 끌고 있지 진상규명은 하나도 되지 않고 있었다. 재판은 그 동안에 진행되고 있고.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될 거라고 믿었다.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부와 정치권은 차일피일 미뤘다. 언론들은 세월호 사건을 정치적 사건처럼 보도했다. 세월호 가족의 목적이 더 많은 돈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악질적인 기사들도 넘쳐났다. 여야는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하다 결국에는 반쪽짜리 특별법을 만들었다. 반쪽짜리 특별법을 가지고라도 어느 정도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정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안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진상규명이 될 거라는 기대의 조그마한 불씨마저 꺼뜨린 거다. 사고 후 현재까지의 상황이 완전한 속임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래서 엄마는 머리를 박박 깎았다.

 

  재욱이 엄마는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죽었다. 지금 내가 움직이는 것은 그 아이들을 살려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라고 밝혔다. “육신을 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해도 정신은 살려낼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이 과정이 아이들을 살리는 과정이다. 그러니 우리가 세월호를 어떻게 인양하지 않을 수 있겠나. 썩어가는 대한민국을 눈 뜨고 지켜볼 수는 없다. 양심이 회복되고 정부, 정치, 국민의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다. 지금껏 방관하며 살아와서 이런 꼴이 됐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지구는 계속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언론이 변해야 사회도 변해 

  삭발식날, 광화문광장은 기자들로 발 딛을 틈이 없었다. 이에 대해 재욱이 엄마는 우리 목소리를 한껏 냈다. 이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왔다는 게 조금은 위안이 됐다. 그 전에는 아무리 외쳐도 철옹성이었다. 평소에는 농성장에 찾아오는 기자들이 별로 없다. 오늘 많은 언론사에서 취재를 오는 것은 좋다. 하지만 제대로 보도가 될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며 언론행태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언론이 중요하다. 416일날도 언론만 제대로 보도 했더라면 살릴 수 있었다. ‘전원 구조 오보’, 책임 진 사람이 하나라도 있나? 세월호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왜곡한다. 마치 우리가 보상금을 때문에 이러는 것처럼 보도한다. 언론은 양심선언을 해야할 때다. 언론히 변해야 우리 사회도 변할 수 있다. 그러면 4.16 이후에 멈춰있던 시간도 흘러갈 수 있다”라며 언론의 각성을 촉구했다.


  삭발식이 끝나갈 무렵 내리던 비는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거세게 내렸다재욱이 엄마는 개인적으로 비 오는 것을 좋아한다재욱이가 옛날에 친한 친구들끼리 비가 쏟아질 때 맨몸으로 뛰어나가 개구쟁이 짓을 하며 동영상 촬영을 한 적이 있다그런 상황들을 알고 있으니까 비가 오는 것이 반갑다하늘나라에서 또 모여서 신나게 놀고 있겠구나 싶다실제로 세월호 100, 200, 300일 등 큰 행사 때마다 비가 왔다아이들이 응원을 해주는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Colorless.

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