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앞, 높다란 빌딩 숲 뒤편 그늘진 마을 동자동 쪽방촌. 동자동 쪽방촌은 전국의 쪽방촌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거주민만 1100명이 넘는다. 이 조그마한 동네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쪽방이라는 기형적인 주거형태 때문이다. 쪽방이란 한국 전쟁 후 생긴 주거형태로 여인숙 주인들이 손님을 더 받기 위해 방을 여러 개로 쪼개 장사를 한 것이 그 유래다. 수많은 인파가 서울역 앞을 오가지만 그들의 존재조차 모른 채 지나간다. 하지만 분명 그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동자동 쪽방촌을 찾아갔다.



  다시 찾은 동자동엔 기대감과 불안감이 뒤섞여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내쫓길 위험에 처했던 9-XX번지의 주민들은 다행히 아직 동자동에서 살고 있다. 집주인이 건물 개보수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 아시바를 설치하겠다고 예고했지만, 강행하지는 않았다. “언론과 시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집주인이 전향적으로 나왔다. 현재 협상이 진행중이라고 9-XX번지 주민들은 말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주민들은 집 밖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었다. 창문조차 없는 좁은 방에서 하루 종일 혼자 갇혀 있기에는 너무 갑갑하다. 추운 겨울에는 어쩔 수 없이 방에서 지내지만, 겨울이 지나면 집에서는 잠만 자고 밖으로 나온다.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낸다. 날이 따뜻해지면 방을 빼고, 노숙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동자동 초입에 위치한 새꿈 어린이 공원에는 주민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따뜻한 볕을 쬔다. 한 쪽에서는 동네 어른들이 바둑을 두고 있다. 훈수를 두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자리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부대끼며 살다보니 다툼이 잦은 것도 사실. 이른 시간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벌써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운 주민도 보인다. 술자리에선 사소한 말다툼이 멱살잡이로 번지기도 한다. 한 쪽에서는 외상을 주지 않겠다는 슈퍼마켓 주인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싸움을 말리기는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 눈치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각자 집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며, 이웃과는 어색한 눈인사만 할 뿐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아파트촌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강모(62.)씨는 21년 전에 동자동 쪽방촌으로 들어왔다. 중간에 두 번 다른 동네로 떠나기도 했지만 결국 동자동으로 돌아왔다. 강 씨는 부산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신문을 팔고, 구두를 닦았다. 그러다 열아홉 살 때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아직 여의도에 비행장이 있던 시절이었다. 영등포에 자리를 잡은 강 씨는 여의도 비행장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중국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배달을 하기도 했다. 요즘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돈을 모을 수는 없었다.


  강 씨는 평생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가방끈이 짧다보니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었다. 사회 전체가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없는 사람들은 더 어려웠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번듯한 직업을 갖고, 열심히 돈을 모아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집값을 감당하지 못해 계속 밀려났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는 고무공장에 취직해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 빈자리가 감당하기 힘이 들었다. 결혼생활도 실패로 끝이 났다. 그동안 일을 해 번 돈을 가지고 다시 상경하게 됐다. 함께 올라왔던 친구를 따라 방세가 싼 동자동 쪽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동자동에 자리를 잡은 것이 21년 전. 그 사이 강 씨는 이 동네를 두 번 벗어났다. 그동안 모은 돈을 밑천 삼아 친구와 함께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그에게 일을 맡기는 이는 적었다. 처음 하는 사업이다 보니 어리숙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다 사기를 당해서 결국 사업을 접게 됐다. 그리고 다시 동자동으로 돌아왔다. 태안화력발전소 공사에 인부로 일을 하러 갔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동자동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또다시 무위로 돌아갔다.



  현재 강 씨는 동자동 희망나눔센터 1층 커피숍에서 일을 하고 있다. 강 씨가 내민 명함에는 예비 바리스타라고 적혀있었다. 그는 정식 학원에서 자격증 딴 것은 아니고 대충 배워 수료증만 받았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취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비 바리스타라고 적었다. 바깥에 커피 전문점에 가면 커피를 비롯해 생과일 쥬스까지 수십 가지 메뉴를 팔고 있다. 우리는 달란 열 가지 정도의 메뉴만 판매한다. 메뉴에 있는 몇 가지만 만들 줄 안다고 말했다. 부끄러워하며 말했지만 일을 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내심 자랑스러운 눈치다.


  강 씨의 한 달 수입은 약 100만원 정도. 자활근로를 하거나, 기초생활 수급을 해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수입이 50만원을 밑도니, 쪽방촌 주민들 중에서는 여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그는 길거리를 지나가다 햄버거 하나를 먹고 싶단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몇 번을 망설이다 그냥 돌아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언제 돈을 쓸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강 씨는 동자동을 떠날 꿈을 아직 꾸고 있다. 100만원 남짓의 수입의 일부를 떼어 주택부금을 넣고 있다. 방세를 내고, 주택부금을 넣고, 이래저래 생활비로 사용하면 남는 것이 없다. 올해 담뱃값이 껑충 뛰면서 40여년간 피웠던 담배도 끊었다. 술은 아직 끊지는 못했지만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결국 동자동을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 “요즘 집값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1억은 우스운 돈이더라. 현재 버는 수입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도 10년이 걸린다. 결국 우리 같은 사람은 갈 곳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강 씨가 일을 하고 있는 희망나눔센터는 한 기업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주민 복지시설이다. 원래 있었던 목욕탕 건물을 5년간 임대해 주민들이 사용하도록 했다. 동자동 회원증이 있으면 샤워시설과 빨래방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커피숍의 음료는 1500원에서 2900원까지 가격이 다양하지만, 회원들에게는 천원에 판매하고 있다.



  조모(60.)씨는 희망나눔센터에서 자활근로 활동을 하고 있다. 몸이 건강할 때는 인근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기사로 일을 했다. 그 때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당뇨로 건강이 좋지 않아진 조 씨는 기초생활 수급을 받아 생활을 했었다. 그러다 지난 해 수급대상자에서 탈락됐다. 몸이 아프니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다. 몇 달간 방세를 못 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동자동 희망센터에서 자활근로를 하게 됐다. 빨래방과 샤워실 청소를 비롯해 세제, 비누 등을 챙기는 것이 조 씨의 몫이다.


  자활근로는 하루에 6시간씩 3교대로 돌아간다. 하루 6시간을 일하고 조 씨는 약 5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겨우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돈이다. 20여만원의 방세를 내고 남은 돈으로 한 달을 생활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아끼려 해도 써야할 돈이 있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하고, 옷도 사야한다. 쪽방은 난방비나 전기세를 따로 내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노후대비란 조 씨에게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조 씨는 주로 무료급식을 이용한다. 동자동은 전국에서 가장 큰 쪽방촌으로 그 수가 1100명에 이른다. 맞은편 서울역에 노숙자들도 많다. 그러다보니 무료급식을 하는 곳도 다양하다. 5분 거리에 인정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만나샘 급식소가 있다. 다시서기 상담센터는 서울역 쪽에서 무료급식을 나눠준다. 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에서 후원을 하고 있다. 어버이날, 추석, 설 때가 되면 양말 한 켤레라도 나눠주는 온정의 손길이 이어진다. 쌀이나 김치 등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조 씨는 그렇게 나누는 손길들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며 감사를 표했다. 또한 동자동은 워낙 쪽방 거주민들이 많이 모여있고, 서울의 중심지에 있어 후원을 많이 받는다. 전국에 쪽방촌들이 있다. 다른 쪽방촌들도 우리와 사정이 다르지 않다. 관심이 부족한 지역은 더 힘들다고 쪽방촌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부탁했다.


  쪽방촌은 현대 도시민들의 삶의 모습과 다르다. 현대인들은 아침부터 바쁘게 일터로 이동해 하루 종일 일하고, 해가 저물고 나서야 돌아오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반상회 때나 한 번 얼굴을 마주친다. 교류가 없는 만큼 부딪힐 일도 잘 없다. 층간 소음 문제나 쓰레기 처리 문제 등 문제가 발생할 때 얼굴을 붉힐 따름이다. 이곳 쪽방 사람들의 삶은 달라 보인다. 매일같이 치고 박고 싸운다. 서로 욕을 한다. 그렇지만 또 화해한다. 동네 사람들끼리 정답게 인사한다. 동자동을 들여다보며 이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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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형과 글쟁이 동생 쌍둥이 형제의 낙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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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주요 관문. 갓 상경한 시골 촌부들의 입을 다물지 못 하게하는 화려한 빌딩들. 그 화려함의 뒤편, 서울에서 가장 어두운 곳 동자동 쪽방촌이 있다. 쪽방촌은 한국 전쟁 후 생긴 주거형태. 여인숙 주인들이 손님을 더 받기 위해 방을 여러 개로 쪼개 장사를 한 것이 그 유래다. 동자동은 서울시의 쪽방촌 중 가장 큰 규모. 거주민이 1100명이 넘는다.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동자동 쪽방촌에 찾아가봤다.


  동자동 주민들을 만난 건 서울시청 앞. 한 손에 피켓을 든 동자동 주민 20여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피켓을 들어본 경험이 없다”는 수줍은 고백처럼 그들의 모습은 어색했다. 변변한 구호 한 번 외치지 않고, 묵묵히 피켓을 들고 앉아있을 뿐. 손에 든 피켓만 아니었더라면 영락없이 동네 마실 나온 어르신들이다. 덩치가 큰 오세영(남.61) 씨가 앉은 간이의자가 휘청하더니 이내 오 씨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뒹굴었다. 그 모습을 본 김 모 씨는 “의자가 부서졌다”며 핀잔을 준다. 오 씨는 “사람이 다치지 않았는지 먼저 묻는 게 도리 아니냐”며 툴툴댄다. 김씨는 “돌바닥이 부서지진 않았는지 봐야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지켜보는 경찰들도 크게 경계하지 않는 눈치다.


6일 동자구 주민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종착역이라 생각했는데…

  이날 시청 앞에 모인 이들은 용산구 동자동 9-XX번지에 사는 주민들. 44년 된 이 건물은 동자동 쪽방촌 중에서도 가장 월세가 싼 편에 속한다. 그런 이유로 이곳 주민들 대부분이 이 건물에서만 10년 이상씩 살았다. 그들은 동자동이 인생의 종착역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 모 씨는 “이렇게 살다가 망우리나 벽제로 가겠거니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2월 이곳에 퇴거 공고문이 나붙었다. 건물의 개보수와 안전보강공사가 이유라고 했다. 주민들은 비상대책위를 세우고 합의를 통해 해결하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건물주는 지난 3월, ‘아시바’(공사를 위해 건물 외벽에 설치하는 철골 구조물) 설치를 강행했고, 주민들과의 마찰이 빚어지면서 중단된 상황. 건물주는 조만간 추가 설치를 강행하겠다는 입장. 현재 주민들의 월세 두 달치도 받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월세 두 달치 해봤자 30만원인데, 그 돈으로 어딜 갈 수 있겠나. 동자동 일대의 다른 쪽방에서도 우리를 받아줄 여력이 없다”고 했다. 기초생활 수급자인 최 모 씨는 “여기서 밀려나면 서울역에서 노숙을 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주거지가 없으면 기초생활 수급비도 받을 수 없다”며 사정을 얘기했다.

  이들의 요구는 “그저 지금처럼 살게 해 달라”는 것. 하지만 말처럼 간단하게 해결되기 힘든 실정이다. 서울시가 중재에 나서긴 했지만, 개인의 사유재산이라 적극적인 개입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주민 대표들과의 면담에서 “서울시에서 일정한 조건 하에 있는 주거취약계층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하는 것은 많이 했다. 지난 임기에 8만호, 이번 임기때 8만호 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람이 방에 몸만 누인다고 되는 게 아니고, 자신의 삶과 연결된 생태계가 있어야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며 건물주와의 중재를 통해 동자동 공동체가 이어질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원순 시장과의 면담을 끝내고 나온 이들의 면담 결과를 듣는 주민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사실상 해결된 것은 없기 때문. 당장 공사가 단행되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이 앞선다. 상심한 주민들은 터덜터덜 동자동으로 걸어서 돌아갔다. 주민들과 서울역 맞은편 동자동까지 동행했다. 동자동 9-XX번지 앞에 나와 있던 주민들이 걱정되는 얼굴로 맞이한다. 결과를 전해들은 주민들의 표정이 어둡다. 주민들이 집을 비운 사이 우체부가 다녀갔다. 건물주가 내용증명을 보내온 것. 공사를 강행하겠다는 건물주의 의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용증명을 받고 보니 더 착잡해진다.



"누군가 내 죽음 슬퍼해주면…"

  뇌병변 장애 4급 판정을 받은 오세영(61) 씨는 요즘 통 잠을 이루지 못한다. 퇴거 공고장이 붙은 이후 계속되는 불안증세 때문이다. 그는 매일 수면제를 먹고 잠에 든다. 고아원에서 유년을 보낸 그는 이곳 동자동을 고향이라 생각한다. 

  “고아원에서 나와 16세부터 혼자 살아왔다. 이곳저곳 떠돌다 정착한 곳이 동자동 쪽방촌이다. 9-XX번지에 산지도 벌써 15년”이라며 남은 시간도 이곳에서 보내길 원한다고 했다. “혼자 살다보니 외롭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래도 내가 죽었을 때 다만 한두 사람이라도 소주 한 잔 올리며 슬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 다른 곳으로 간다면 어찌될지 모를 일 아니냐.”

  그는 “지난겨울 동자동에서 네 사람이 죽었다. 그 중 셋은 무연고다. 한 달간 보관되다 화장터 근처에 뿌려졌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을의 가운데 위치한 조그마한 공원에서 합동 장례식을 한 차례 치른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동자희망나눔센터


  지난해에는 ‘동자동 희망나눔센터’가 KT의 지원을 받아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주민을 위해 빨래방과 공동샤워시설을 개방하고, 자활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한 카페프렌차이즈업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 중인 1층 마을 카페에서는 시중보다 훨씬 저렴한 1000원에 커피를 살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에겐 그마저도 사치다. 담뱃값마저 올라 가뜩이나 빡빡한 살림이 더 어렵다. 희망나눔센터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전찬우(남.50) 씨는 “담뱃값이 올라 올 초에 금연을 결심했다. 보건소에서 운영하는 금연클리닉에도 가봤다. 6주간 금연 패치를 지원받았는데, 6주 이후에는 지원이 되지 않더라. 이후 다시 피게 됐다”고 말했다.

  전씨가 동자동 쪽방촌으로 오게 된 건 1999년. 1997년 IMF 한파로 운영하던 인쇄공장이 문을 닫을 상황에 처했다. 친척들에게 돈을 융통하려했지만 이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그렇게 떠돌다 전씨가 찾은 곳은 남산. 죽기 위해서였다. 전 아내와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려 했다. 자해를 해 팔뚝에서 피를 흘리고 있던 그를 지나가던 가톨릭 신부가 데리고 내려왔고, 동자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세상은 쪽방과 쪽방 아닌 곳으로  

  전씨는 쪽방촌의 현실을 보여주겠다며 본인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가 사는 곳은 9-XX번지에서 불과 5분 정도 떨어진 쪽방. 가는 내내 그는 “이쪽은 쪽방이고, 이쪽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어쩌면 그에게 세상은 쪽방과 아닌 곳으로 나뉘어있는 줄도 모르겠다. 그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건물의 복도는 좁고 어두웠다. 건장한 성인 남성 두 명이 마주하게 되면 누군가는 길을 비켜줘야 할 정도. 좁은 복도를 사이로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의 방은 10호. 붉은 가림막을 걷고 들어가자 살림이 한 눈에 보였다. 옷가지들이 한켠에 수북이 쌓여있고, 바닥에는 이불이 깔려있다. 곰돌이 인형이 두 개 있는데, 순이와 돌이란다. 순이와 돌이는 쿠션이자 전씨의 말동무.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TV, 냉장고가 들어가 있다. 그런 이유로 월세는 20만원이 넘는다. 이 동네 쪽방 중에서 제법 비싼 편이다. 전씨는 “없는 살림에라도 손님 대접은 해야 한다”며 굳이 매실주스를 권했다. 




  전씨에게서 쪽방촌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쪽방촌에서는 취사에 어려움이 많다. 휴대용 버너를 이용해 통로에서 취사를 한다. 겨울에는 춥다보니 방 안에서 취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간이 협소해 화재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역의 무료급식소를 찾아가 해결하기도 하고, 동자동 사랑방에서 500원을 주고 사먹기도 한다. 싼 값에 먹지만 김치·밥·국 세 가지만 나오는 식단이 맛있을 리 없다.

  화재 위험 때문에 개인 난방기기를 사용할 수도 없다. 정해진 시간동안 전기패널을 통해 공동으로 난방이 된다. 난방시간은 보통 밤 10시에서 아침 6시까지 정도. 조금의 온기나마 오래 잡아두기 위해 겨울철엔 이불을 개지 않는 것이 쪽방촌 생활의 지혜.

  쪽방촌에는 40여만원씩의 지원을 받아 생활하는 기초생활 수급대상자들, 노인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노인들이 많이 산다.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아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 경제적 취약계층인 이들에겐 실질적 도움이 절실하다. 일용직 잡부로나마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다. 그마저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전씨는 “이 동네에 건강한 사람들은 없다고 보면 된다. 일을 나가는 날보다 못가는 날이 더 많다”고 했다.

  인터뷰 당일에도 전 씨는 병원에 다녀왔다. 척추와 허리 쪽이 많이 아프다. 전씨는 인터뷰 중 약을 먹을 시간이라며 약봉투에서 약을 주섬주섬 꺼냈다. 한 번 먹는 양이 열다섯 알은 넘어 보인다. “배고플 때 먹는다”며 웃음을 짓는다. “저녁에 먹는 약은 더 많다”고 했다. 달력에는 다음 병원 예약 날짜가 적혀있다.

 

언제쯤 동자동에도 봄바람이

  전씨는 9-XX번지의 상황이 남 일 같지가 않다. 언제 나가랄지 모르는 건 이곳도 마찬가지. 9-XX번지 문제가 건물주의 의사대로 진행이 된다면 그 다음엔 어느 곳이 될 줄 모른다는 것이 동자동 주민들의 공통적인 불안.

그는 “시에서는 서울 외곽의 임대주택으로 가라고 한다. 모두 뿔뿔이 흩어지라는 말이다. 그래도 이 동네에 함께 살며 부족하나마 이웃의 정을 가지고 살았는데,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섞이는 것이 쉽지 않다. 이미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갔다가 돌아온 주민들도 있다”고 했다.
작년에 돌아온 주민 한 명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단다. 다행히 미수에 그쳐 지금은 정신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쪽방촌 낡은 건물 앞에는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그 모습이 이질적이다. 서울역 쪽으로 내려가는데 바람이 스치고 지난다. 온기를 품은 봄바람이. 언젠가는 이곳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에게도 봄바람 부는 날이 올까.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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