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앞바다. 지난해 416, 국민 전체를 충격 속에 빠뜨린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난 그 바다 속에는 아직 사람이 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홉 분의 실종자들. 그들은 오늘도 외치고 있다. ‘세월호에 아직 사람이 있다’, ‘유가족이 되고 싶다. 광화문 광장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단원고 2학년 2반 허다윤 양의 아버지 허흥환 씨를 만났다.


다윤이 아빠 허흥환 씨



"유가족이 되고 싶다"

  다윤이 아빠는 유가족이 되고 싶다. 세상 천지에 유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냐만,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은 그렇다. 다만 뼛조각 하나라도 찾았으면. 다윤이가 어둡고 추운 물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하루 빨리 찾아서 밝고 좋은 곳에 보내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아빠로서 최소한의 도리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이 막막하다.


  “아흔이 다 된 내 어머니는 오십 넘은 아들과 통화를 하면 아직도 밥 먹었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묻는다. 그런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는 자식을 버리지 못한다. 속을 썩이면 혼을 낼 수야 있지만, 그 순간 뿐이다. 부모는 자신이 죽어야만 비로소 자식의 손을 놓을 수 있다. 하루빨리 다윤이를 찾아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싶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친구들이 다윤이를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음주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도 1. 하지만 아빠에게 그 시간은 의미가 없다. 시간은 흘러간다는데. 사계절이 한 차례 흘렀다는데. 낙엽이 지고, 눈 내리는 겨울 지나 또 봄이라는데. 아빠의 시계는 아직 지난해 416일에 머물러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팽목항으로 달려갔던 때와 현재가 변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

오히려 현재가 더 참담하다. 당시에는 진도 체육관에서 기다리다 구조작업이 진행되면 바지선으로 바로 달려갔다. 다윤이의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희망도 사라졌다. 지난해 11, 수색 종료 후 5개월이 지났지만 공식적인 인양 발표는 없다. 아빠는 거리로 나섰다.


다윤이는…

  다윤이는 어려서 많이 아팠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를 했다. 아빠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여유도 없이 다윤이를 안고 병원으로 한 달음에 달려갔다. 병원에서는 열없는 경기라고 했다. 흔치 않은 병이라고. 서울대병원에 다니며 3년 동안 치료하고 나서는 괜찮아졌다. 그렇게 나았는가 싶었는데, 또 아팠다. 가게에서 놀다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고 난 뒤, 쓰러진 것. 아빠는 그 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다윤이의 온 몸이 굳어서 못 움직이더라. 5분정도 정신없이 아이의 팔 다리를 주물렀다이후 2년간 또 병원을 다녀야만 했다. 다른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 시기. 다윤이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아팠다. 그런 아픈 시절을 지나, 이제 겨우 건강해졌는데. 이제는 아프지 않고, 행복할 날들만 앞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떠난 다윤이가 아빠는 너무 아프다.


  아프면 빨리 성숙해진다고들 한다. 다윤이가 그랬다. 악의가 없고, 순한 아이. 말 한마디를 해도, 오랜 시간 생각하고 건네던 속 깊은 딸.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진솔하게 사람을 대할 줄 알았던 다윤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먼저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진 아이였다. 방학이나 연휴면 보육원 같은 곳에 봉사를 많이 다녔다. 어린 애들을 좋아했고, 아픈 아이들을 먼저 살필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다윤이의 장래희망은 유치원 선생님. 다윤이에게 딱 어울리는 꿈이었다.


  다윤이는 부모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엄마 아빠한테도 내가 속을 안 썩여서 너무 좋지?”라며 해맑게 웃던 아이. 어려서는 너무 많이 아파서, 속 썩일 시간도 없었다. 아빠는 속을 썩여도 좋으니 옆에만 있었으면한다.


집안 걱정에 가지 않으려 했던 수학여행

  마지막이 된 그 날의 수학여행. 다윤이는 수학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보름 전부터 출발하는 당일까지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을 생각하고, 아픈 엄마를 먼저 걱정했다. 다윤이 엄마는 뇌종양 신경섬유종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다윤이가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에도 병상에 누워 있었다.


  아빠는 그런 다윤이가 안쓰러웠다.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수학여행. 학교 친구들 전체가 갔다 오는데, 다윤이만 친구들과의 추억을 만들지 못할까봐. 수학여행을 다녀오면 한동안 그 이야기로 꽃을 피울건데, 다윤이가 친구들의 대화에 낄 수 없겠다는 걱정도 됐다. 아빠는 이 기회에 공부하느라 받은 스트레스도 풀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라고 다윤이를 설득했다. 착한 딸 다윤이는 이모가 마련해 준 돈으로 어렵게 수학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아빠는 가지 않겠다던 다윤이를 자신이 설득했다는 것이 아직도 한으로 남아있다.


  아빠는 다윤이와 함께 여행을 다니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다윤이는 아팠고, 아빠는 바빴다. 직장 생활하느라 바빴던 아빠는 가족끼리 제대로 놀러 가본 적이 없었다. 사고 나기 한 해전 여름, 부산에 사는 이모네에 놀러 갔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이었다. 마지막 가족여행일 줄 알았더라면,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걸, 더 많은 사진을 남겨 둘 걸. 아빠는 다윤이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아쉽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다윤이

  다윤이의 생일은 101. 그날도 아빠는 진도 체육관에서 다윤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많은 희생자들이 나온 시점, 그래도 아직 수색작업을 한참 열심히 할 때였다. 부모 생일이나 애들 생일에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단원고 황지현 양도 생일에 돌아왔다. 아빠도 생일엔 나오겠지조그마한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그 전날 태풍이 부는 바람에 바지선이 철수했다. 결국 다윤이 생일에는 수색작업도 할 수 없었다. 아빠는 다윤이 생일에 팽목 등대를 찾아갔다. 손에는 조그마한 케익 하나를 들고.


  지난해 11, 실종자 가족들은 초주검이 됐다. 수색 중단.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정부에서는 인양도 수색의 방법이라고 실종자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인양은 결정되지 않고 있다. 아빠는 화가 난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양을 검토하겠다는 말을 했는데, 검토는 5개월 전에 시작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은 공식 발표를 하고 인양작업을 시작해야할 시점이다. 바다에서 작업을 하는 건 4~7월이 시기적으로 좋다고 한다. 8, 9월 되면 바람 불고 태풍 불고. 이런 상태로는 올해 안에 인양 작업을 시작이나 할지 모르겠다.”



"다윤이 뼈라도 품에 안아봤으면"

  엄마 아빠는 아픈 몸을 이끌고 매일 9시 안산 분향소에서 출발하는 서울행 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교복 입은 학생들을 마주친다. 다윤이와 닮지 않은 아이들을 봐도 다윤이 얼굴이 떠오른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다 딸 같다.


  희생자 가족들을 거리로 내모는 현실이 아빠는 화가 난다. 지난 2일에는 삭발식에 참여했다. 아빠는 다윤이를 건질 수만 있다면 삭발이 아니라 더 한 것도 할 수 있다. 부부는 오전에는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오후에는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한다. 엄마 아빠를 버티게 하는 힘은 오로지 다윤이. 다윤이를 바닷속에서 꺼내주고 싶어서 버틴다. “쓰러지더라도 다윤이 꺼내고 나서 쓰러지겠다. 엄마로서,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라며 아빠는 건져낼 때까지 버티겠다 다짐한다.


  지나가던 시민들의 빈정대는 말을 들을 때, 이제 그만하라는 말을 들을 때 아빠는 화가 너무 난다. 원래 아빠는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분한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따져 묻는 성격이었다. 그런 걸 아는 엄마는 다른 사람 어떤 말을 해도, 뭐를 해도 찾을 때까지는 삼키라고. 가만히 있으라고신신당부 한다. 다윤이를 찾기 전까지 아빠는 어떤 일이 있어도 속으로 삼킨다. 그 화가 아빠의 속을 까맣게 태워도, 그래서 건강이 더 나빠진대도 아빠는 삼킨다. 화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 그리고 혹여 다른 사람한테 낸 화가 돌아와 다윤이를 찾는데 방해될까봐, 그것이 겁나서 아빠는 오늘도 참고 넘어간다.


  다윤이 아빠는 건강이 좋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리를 구부릴 수가 없을 정도. 허리도 아프고 왼쪽 다리도 아프다. 30분가량 스스로 왼쪽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이 다윤이 아빠가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 그러지 않으면 잠시 걷는 것조차 힘이 든다. 신경섬유종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다윤이 엄마는 참사 후 상태가 급속히 나빠져 뇌와 양쪽 귀에 종양이 생겼다. 이제 한쪽 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다. 의사는 병의 진행속도를 늦추려면 집에서 쉬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는 집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다윤이가 아직 차가운 바닷속에 있기 때문에.


  아빠의 지금 꿈은 단 하나다. 다윤이 뼈라도 만져보는 것. 다윤이의 유품은 이미 물 밖으로 나왔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 다윤이가 운동화를 사달라고 해서, 같이 고르러 갔다. 다윤이가 좋아하던 민트색 운동화. 그 운동화가 다윤이가 들고 간 여행 가방에 담겨 돌아왔다. 아직 한번도 신겨지지 않은 채. 언니에게 빌린 검은색 모자, 휴대전화, 엄마가 선물한 지갑도 가방에 들어있었다. 다윤이만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유품은 필요 없는데, 다윤이가 돌아와야 하는데아빠는 혼잣말을 한다.


  아빠는 다윤이 유품을 감식할 때 보고 이제껏 보지 않았다. 다윤이를 만날 때까지 보지 않으려 했는데, 그제 찾아온 취재진의 요청에 꺼내보였다. 유품을 보는 것이 너무 아파도, 지금은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해야 할 상황이니까.


  “정부는 못믿지만, 국민은 믿는다. 나도 국민의 한 사람이니까. 세월호를 잊지 말아 달라. 아직 그 안에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기억해 달라. 또한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 달라.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를 인양해야 한다. 우리의 바람은 오직 그 것뿐이다. 딸아이를 제발 품으로 돌려주세요.” 다윤이 아빠의 호소는 오늘도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은 위클리 서울 지면에 실은 본인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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